6.25 종군 국가유공자
광학사랑 큰 발자취
李志雄(이지웅) 서울광학회장 향년 92세
국가유공자로 국립현충원에 안장

▲ 고 이지웅 서울광학 창업회장

6.25 종군기자 출신의 서울광학 이지웅(李志雄) 창업회장이 지난 12월 18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종군기자로 6.25 전선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용맹상을 널리 보도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에 따라 국가 유공자로서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천직 은퇴후 서울광학 창업

고인은 1922년 5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중학을 졸업한 뒤 반공 우국지사형 언론인으로 크게 활약했다. 8.15 직후 서울중앙통신 기자로 출발하여 동양통신 편집국장과 상무이사를 거쳐 천직(天職)을 마치고 은퇴한 후 대한언론인회 6.25 참전용사 회원으로 ‘그때 그 시절’을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고인이 광학산업에 투신한 것은 1967년 동경대 유학시절에 만난 일본 노리다광학 사장과의 의기투합이 계기였다고 생시에 증언해 주셨다. 노리다 도시오 사장은 2차 대전 후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으로 모국의 광학산업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먼저 제시했다.
광학산업이 수출산업으로 유망할뿐더러 군사용 조준기술을 지원하는 것이 모국의 방위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감명 받은 유학생 이지웅 씨가 귀국 후 언론인 생활을 마감한 50대 중반에 서울광학을 창립했다.
고인이 1974년 9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서울광학을 설립하자 노리다 사장이 중견기술자와 함께 가공기계들을 무상 지원하여 서울광학이 창업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창업 뒤에는 서울광학이 가공 생산한 광학렌즈의 대일 수출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고인은 노리다 사장의 이 같은 각별한 모국애를 잊을 수 없어 충북 음성공장에 노리다 사장의 동상을 올려놓은 광학탑을 세워 매일 꽃다발을 바쳤다.

▲ ‘87년 8월 신축공장 완료, 10월 서울광학 준공식을 가졌다. (오른쪽사진)▲기술지도 모습

한국 첨단광학산업 개척 큰공

고인은 1987년 10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에 2만6천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성수동공장을 이전, 첨단 광학공장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각종 수출용에서부터 방위산업용 렌즈까지 다양하게 개발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산업 경쟁력’ 강화에 크게 공헌했다.
레이저 프린터용 렌즈, FAX와 복사기용 렌즈, 군용 야간 투시경, 인공위성용 광학제품 등을 속속 개발 수출했다. 이어 지난 2000년 10월에는 대형 렌즈 가공실을 준공, ‘렌즈 직경 4m 시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서울광학이 국내 광학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지난 1988년 10월 노태우 대통령의 음성공장 방문으로 잘 설명된다. 서울광학이 첨단 광학용품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한 공적을 국가원수가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서울광학은 이를 기념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방문기념 돌을 공장 입구에 세웠다.

▲ 1951. 이지웅 종군 기자 (오른쪽사진)▲ 군부대와 함께 숙식하며 종군했기에 작전 지휘 광경을 촬영할수 있었다.

광학사랑 노후의 삶 못 잊어

언론계를 떠나 생소한 광학산업에 투신한 고인은 공장 안에서 침식하는 수도승과 같은 삶으로 첨단 광학렌즈와 노후를 함께 했다.
서울 자택을 떠나 음성공장에 도착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공장에서 만근(滿勤)했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집무실로 출근하면 밤새 각국에서 들어온 이메일을 체크하고 언론인 출신의 오랜 습관으로 조간신문 읽고 TV뉴스를 더듬어 본 후 구내식당에서 아침밥 먹고 다시 집무실로 출근하는 방식이다.
공장 내의 침실과 집무실은 불과 몇 걸음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 집무실이라야 1인실 규모에다 늘 에너지 절약을 위해 형광등을 줄여 돋보기를 끼고 서류를 읽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공장을 방문하여 “숲속의 산사에 있는 수도승과 같아 보인다”고 지적하자 고인은 “그런 소리를 종종 듣기도 한다”고 응답한 적이 있다.
고인은 저녁 8시가 넘어 숙소로 퇴근하여 9시 TV뉴스를 시청한 후 취침한다. 비록 광학산업에 투신했지만 천직인 언론계를 떠날 수 없어 신문과 TV와는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고인은 1주일 만근이 끝난 토요일 하오에는 쌓아둔 빨랫감들을 싣고 서울 본가로 올라와 가족들과 휴일을 보낸 후 월요일 새벽길에 다시 공장으로 내려가곤 했다.
이토록 철저한 언론인과 광학산업인으로 열성과 집념을 보여준 고인을 떠나보낸 심정이 쓸쓸하다.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5호 (2015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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