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격내각’ 의 종횡무진 원 맨 플레이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 ①]

쾌도난마 형 불도저
張基榮 경제부총리
‘돌격내각’ 의 종횡무진 원 맨 플레이


글 /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 부회장)

▲ 장기영 경제부총리

경제기획원(EPB)이 설립된 건 5.16 군사혁명 직후인 1961년이지만 경제정책의 중추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장기영(張基榮)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취임한 1964년5월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 가지 경제관련 일을 했으나 경제부처를 장악하여 경제정책의 참모본부 겸 사령탑으로서 명실상부한 역할을 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다.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다 장 부총리의 적극적 성격이 겹쳐 기획원의 높은 위상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의 ‘돌격내각’

1963년 선거에서 15만 표의 차이로 어렵게 이겨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든 경제실적을 올려 정통성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선거 후의 민심수습을 겸해 초대 내각은 동아일보 사장 출신의 중후한 최두선(崔斗善) 총리를 중심으로 소위 방탄내각(防彈內閣)을 짰으나 물가폭등을 비롯한 경제혼란을 수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은 말할 것도 없고, 1962년에도 섣부르게 단행한 통화개혁의 실패로 경제는 바닥을 기었다. 1963년의 정치적 혼란과 두 차례의 선거 후유증으로 경제는 혼미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과의 갈등으로 미 잉여농산물(剩餘農産物) 도입이 늦어지는 바람에 쌀, 밀가루, 면사 값이 크게 올라 인심이 흉흉했다. 기아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목표로 출범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2~66년)은 초반부터 차질을 빚어 1964년 수정계획을 다시 짜야 했다. 목표성장률을 연평균 7.1%에서 5%로 낮췄다. 거기에 농사조차 흉년이 들었고 대규모 데모 사태와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계엄령을 선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64년 5월 박 대통령은 전면개각을 단행,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를 묶어 소위 돌격내각을 출범시켰다. 장 부총리는 후에 외교·국방은 정일권 총리가, 경제는 경제부총리인 자신이 책임을 지는 연합내각의 성격이었다고 밝혔다. 장 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6개월만 기다려 달라”는 구호를 내걸고 난마같이 얽힌 경제난국을 풀기 위해 비상한 조치들을 쓰기 시작했다. 한은(韓銀) 부총재를 지낸 금융인 출신이지만 한국일보 창업사주(創業社主)이기도 한 장 부총리는 관청 절차나 관례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이 급하니 방법을 가릴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파격의 발상과 임기응변적 수단이 많이 동원되었다. 변칙적 방법과 억지도 불사했다.
총리가 있었지만 경제문제는 장 부총리가 다 요리했다. 장 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기발한 아이디어와 행동력으로 기획원을 장악했고 그 여세를 몰아 경제부처들을 제압했다. 기도 세고 얼굴도 두꺼웠다. 거기다 쾌도난마식으로 일을 풀어내니 뭐라 시비걸기도 어려웠다. 기획원과 다른 부처의 얼을 빼놨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확대성장을 지향하는 기획원과 안정 위주의 보수적인 재무부는 충돌하기 마련인데 그 때마다 재무장관이 경질되었다. 장 부총리 재임 중에 바뀐 재무장관이 5명이나 된다. 박동규(朴東奎), 이정환(李廷煥), 홍승희(洪升憙), 김정렴(金正濂), 김학렬(金鶴烈)씨 등인데 이중 장 부총리와 한은에서부터 같이 근무하여 가까웠던 김정렴 장관을 제외하곤 다 장 부총리와의 갈등에 의한 퇴진이었다.

사방서 견제…‘내가 욕 많이 먹는거 알아’

장 부총리는 경제팀장으로서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장애가 되는 장관들을 갈아치우곤 했다. 열차가 달리는데 어느 한 차량이라도 보조가 맞지 않으면 열차 전체가 속도를 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 독주 때문에 국회 불신임 제안을 세 번이나 받았지만 불도저 같은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내가 욕 많이 먹는 거 잘 알아요. 한국경제란 배에 물이 들어와 가라앉고 있는데 욕먹는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아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견제는 사방에서 들어왔다. 장 부총리가 취임한지 1년쯤 지난 1965년 봄 기획원에 나가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간밤에 부총리실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도둑이 아니고 정보기관 같다는 것이다. 장 부총리는 서둘러 청와대로 올라갔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밤에 중앙정보부에서 부총리실 캐비닛을 열어 그 안에 있던 현금, 수표, 외화, 보석 등 귀중품을 몽땅 털어갔다는 것이다. 정보부장은 그 증거물을 들고 박 대통령을 찾아가 이렇게 부총리가 뇌물을 받고 부패했으니 구속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다. 장 부총리는 곧 미국을 공식 방문할 박 대통령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박 대통령은 장 부총리가 이번 방미 길에 경제관계로 할 일이 많으니 미국 갔다 와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한다. 당시는 집권층 내부의 암투도 심했고 정보부는 무소불위(無所不爲)로 권력을 휘둘렀다. 장 부총리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정보부의 견제를 받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장 부총리의 능력과 실적을 높이 평가할 때라 방미 후에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대담소심(大膽小心)을 표방하는 장 부총리는 일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면서도 금융인 출신답게 세심한 포석을 잊지 않았다. 장 부총리는 국무회의와는 별도로 부총리가 주재하는 경제장관회의를 최대한 활용했다. 경제장관회의는 5.16 직후 설치되었으나 유명무실했다. 경제장관회의 의장인 기획원장관과 부총리가 자주 갈리는 바람에 기획원도 부총리도 별 힘을 쓰지 못했다. 5.16 군사혁명 후 당면과제인 경제개발사업을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 경제계획과 예산업무를 같이 하는 경제기획원을 발족시켰으나 경험도 노하우도 모자라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기획원이 설립된 1961년 7월부터 장기영 부총리가 취임하는 1964년 5월까지 3년 여 동안 장관이 7번이나 갈렸다. 초대 기획원장관인 김유택(金裕澤) 장관은 7개월 만에 물러났다가 1962년과 1963년에 다시 취임, 3번이나 장관을 지내는 기록을 세웠지만 재임기간은 모두 합쳐 2년이 안되었다. 기획원장관에 부총리 타이틀이 붙은 것은 1963년 12월 김유택 장관이 세 번째 취임할 때부터다. 원만한 성품의 영국신사인 김 장관은 부총리를 내세워 다른 경제부처를 휘어잡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독주가 아니라 장애물 경주

장기영 장관은 부총리 권한을 확실히 행사했다. 취임하자마자 경제장관회의를 통해 경제부처들을 장악해 나갔다. 모든 경제시책과 법안들은 거기에서 심의 조정됐고 국무회의는 거의 요식행위였다. 몇 년 뒤엔 기획원 차관이 의장이 되는 경제차관회의가 신설되는데 이 회의 등을 통해 기획원은 경제부처의 통괄조정권을 확실히 잡았다. 장 부총리는 재무·상공·농림부 장관을 중심으로 경제장관간담회를 자주 열어 주요 경제현안을 사전 조율했다. 비공식 간담회에서 미리 의견들을 개진하고 조정한 다음 정식 경제장관회의에 올리는 방식이었다. 이 간담회는 부총리실 옆의 작은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보통 녹실회의라 불렀다. 회의실 의자와 카펫이 녹색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요 사업들은 정부나 민간의 구별 없이 원조자금이나 차관 등 외자에 많이 의존했다. 그 도입 인가권을 기획원이 쥐고 있었다. 그 위에 정부예산의 편성배분은 기획원의 고유 영역이고 장 부총리의 개인적 영향력으로 금융조차 움직일 수 있었으니 당시 기획원의 힘은 막강했다. 장 부총리가 좌충우돌 불도저식으로 일을 밀어붙여 기획원의 힘과 영향력은 날로 가속도가 붙었다. 박 대통령도 경제를 챙기면서 장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관료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과 장 부총리의 적극성이 어우러져 경제기획원은 온갖 일에 손을 댔다. 법률로 정해진 예산, 물가, 경제협력 업무 외에 넓은 의미의 경제란 이름 아래 금융, 농수산, 수송, 건설, 보사 분야도 간여했다. 더러 간여를 넘어 주도하기도 했다. 물가대책회의를 통해 범부처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했고 ‘B미팅’이라 하여 은행장회의를 정기적으로 주재하기도 했다. 정부부처의 업무분장으로 보아 비정상이었지만 그 땐 그런 무리가 통했다. 그래서 기획원이 독주한다는 말이 많이 나왔는데 장 부총리 자신은 독주가 아니라 장애물 경주를 했다고 말했다. 일을 하려하니 견제하는 데가 워낙 많아 장애물 경주하듯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 ‘ 불도저 경제 총리’ 장기영(사진 가운데) 부총리와 1968년 7월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물가폭등에 소방수 역할

장 부총리가 취임하고 나서 가장 먼저 서둔 것이 물가대책이었다. 돌격내각이 출범하기 직전 환율의 대폭인상(1964년 5월 3일 달러당 130원에서 255원으로 올리고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바꾸었다)이 있었기 때문에 물가가 정신없이 오르고 있었다. 우선 물가를 잡아야 했다. 만성적 물자 부족에다 선거로 돈이 많이 풀렸으니 물가가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쌀, 연탄, 시멘트, 밀가루, 면사(綿絲)가 가장 골칫거리였다. 체계적인 물가정책보다 우선 급한 불을 꺼야 했다. 많이 동원된 것이 가격통제와 행정력에 의한 단속이었다.
1961년 5.16 직후 군사정부는 포고령 6호로 주요품목 가격을 1961년 5월 15일 현재가격으로 동결했는데 그 후 ‘물가조절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주요 생필품 값을 묶어 버렸다. 그런 억지 가격이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었다. 유통이 제대로 안 돼 품귀현상이 생기고 암거래와 이중가격이 성행했다. 그러면 가격동결을 조금 풀었다가 값이 너무 오르면 다시 묶었다 하면서 가격억제에 안간힘을 다했다. 그 중에서도 쌀값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쌀이 모자라 값이 오르면 인심이 흉흉해졌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은 수도권에 역점을 두어 정부보유미도 서울을 중심으로 풀었다. 농산물은 주로 미국원조로 충당했는데 늘 시간이 늦고 양이 모자랐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미국원조를 활용했다. 5.16 후 군사정부에서 군정연장을 기도하자 원조자금배정과 농산물 도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종합물가대책이란 것을 수시로 내놓아야 했다. 정 급할 땐 정부보유 달러에 의한 긴급수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보유달러가 넉넉지 못해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5.16 군사혁명으로 무너진 민주당 정부는 상당한 외환보유고를 남겨 놓았는데 군사정부에서 긴급수입에 쓰는 바람에 1961년에 2억 달러가 넘던 외환보유고가 64년엔 1억 3천만 달러로 줄었다.
1963년 식량난이 긴박하여 소맥(밀) 10만 톤을 일본종합상사를 통해 캐나다로 부터 긴급도입 했는데 이때 한국일보 사장이던 장기영 씨가 중간 역할을 했다. 이 소맥을 밀가루로 만들어 전국에 푼 것이 1963년 대통령선거 때 여당의 박정희 후보가 당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 캐나다산 소맥 도입 사실을 알고 미국 측에서 항의를 해와 한때 시끄러웠다. 미국은 잉여농산물을 원조로 주면서 한국시장은 자기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가대책은 고지점령 하듯 품목별로 각개격파를 했다. 쌀값이 오르면 큰 양곡상에 압력을 가하고 연탄파동이 나면 연탄공장을 다그쳤다. 소고기 값이 오르면 정육점 주인들을 불러다 혼을 내고 다방 커피 값을 올렸다고 보건소에서 다방의 위생검사를 하여 영업정지를 시키는 식이었다. 커피 값을 올린 다방을 혼을 내라고 기획원이 지시하면 서울시는 궁리 끝에 위생상태가 나쁘다고 문을 닫게 하는 것이다. 값을 내린 후 다시 문을 열게 해달라고 호소하면 기획원은 그것을 확인해 허가하라고 서울시에 지시했다. 그래서 기획원엔 푸줏간 주인이나 다방마담들이 수시로 몰려와 가격통제에 항의하거나 고충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떻든 정부가 정해주는 값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소고기에 비계가 더 붙고 다방 커피도 양이 줄었다. 음식도 내용이 부실해졌고 값을 올린 특제나 포장이 바뀐 과자, 물 먹인 쇠고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의 부작용이다.
1964년 7월 정부는 밥은 50원, 국수는 40원으로 값을 묶고 찻값 30원을 20원으로, 짜장면은 45원에서 35원으로 내리라고 압력을 가했다. 전투하듯 치열하게 애쓴 보람이 있어 1965년부터 지수(指數) 상으로는 광란물가가 다소 가라앉기 시작했다. 1964년에 물가(도매 기준)가 36%나 올랐으나 1965년엔 10%선을 기록했다. 물량공급이 늘어난 것도 있고 억지에 의한 통계상의 안정 효과도 있다. 돌격내각이 출범할 때 앞이 안 보였던 경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1차 5개년부터 수출 중심의 공업화

차츰 자신을 얻기 시작한 경제팀은 196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5.16 직후엔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살릴 것이냐를 둘러싸고 노선논쟁이 있었지만 이때쯤엔 외자에 의한 수출 중심의 공업화로 방향이 잡힌 뒤였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초기엔 농업개발과 기간산업 건설로 내수확대와 수입대체에 주력하다가 보세가공(保稅加工)을 거쳐 경공업 중심의 수출 쪽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당초 1차 5개년 계획은 기본목표를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의 시정과 자립경제달성을 위한 기반구축’에 두고 있었다. 중점사업도 석탄, 전력 등 에너지개발, 농촌진흥에 의한 농가소득증대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에 두었다. 장 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정책기조를 제조업과 수출중심의 전략적 성장에 두고 이를 위해 외자도입과 금융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결과적으로 불균형 성장전략이 되었다.
1965년부터 매월 청와대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열려 박 대통령이 직접 수출을 챙겼다. 군사정부는 일찍이 수출에 눈을 돌려 무역진흥공사(KOTRA)를 만드는 등 애를 썼으나 큰 효과가 없자 박 대통령이 독려에 나선 것이다. 그 회의엔 수출업자와 정부 및 금융기관 사람들이 참석하여 수출애로요인을 검토하고 수출을 늘릴 방안을 논의했다. 수출업자들이 수출을 늘리기 위해 무엇 무엇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면 박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관계자가 답변을 하게하고 어지간하면 들어주라고 했다. 자금공급을 늘려주고 각종지원을 더 해달라는 요구가 주종을 이루었다. 재정안정계획 때문에 자금을 빠듯하게 운용해야 하는 금융당국은 항상 수세에 몰렸다. 수출목표를 책임지는 상공부는 수출업자와 한 편이 되어 재무부의 긴축 때문에 수출을 못 한다고 공세를 퍼부었다. 재무부는 수출 한다고 돈을 풀면 인플레가 되어 수출기반을 망친다고 반격했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을 내세워 요지부동인 금융당국에 대해(→비해) 그래도 수출확대회의에서만은 수출업자들이 하소연도 하고 큰소리도 쳤다. 박 대통령이 은근히 두둔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수출지원도 필요하지만 물가안정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재무장관을 청와대로 따로 불러 손으로 빨래를 쥐어짜는 시늉을 하며 “너무 쥐어짜지만 말고 좀 풀어줘”하고 설득했다 한다.

수출이 곧 애국…1964년 1억불 돌파

1964년에 우리나라 수출이 1억 달러를 처음 돌파하자 상공부는 “우리가 염원하였던 자립경제 확립과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점이 마련되었다”고 거창하게 발표했다. 1965년 수출목표를 1억 7천만 달러로 잡았다. 그 후 수출은 매년 40% 이상씩 늘어나 66년에 2억 달러, 67년에 3억 달러를 돌파했다. 정부가 채찍질을 하여 늘려놨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때는 쌀, 원양어선에서 잡은 생선, 면직물, 생사, 합판, 중석 등이 수출주종 상품이었다. 1960년대는 세계경제, 특히 미국경제가 개방적이고 좋을 때여서 수출주도 경제를 할 좋은 여건이었다. 이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최우선 정책기조가 되어 나라 전체가 거기 매달렸다. 수출이 곧 애국이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갖은 정책을 다 썼는데 수출을 해야 수입을 하게 하는 수출입 링크제, 수출금융의 파격적 지원 등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시중금리가 연 30%가 넘을 때 연 8%로 수출금융을 지원했고 수출신용장(LC)만 받으면 돈이 나갔기 때문에 수출금융을 둘러싼 부조리도 많았다. 한번은 수출을 한다고 저리의 수출금융을 받아 수출용 원자재는 시중에서 비싸게 팔아먹고 수출품 대신 벽돌을 나일론백에 담아 싣고 나가가다 적발된 사건도 있었다. 이 나일론백 사건은 당시 막강했던 정보기관끼리의 충돌로 번져 한동안 시끄러웠다. 공산품은 스웨터를 비롯한 섬유제품과 아연도(亞鉛渡), 철판, 합판 등이 막 수출되기 시작될 때였다. 수출을 많이 하면 훈장도 주고 심지어 외제차를 수입하는 특전을 주기도 했다. 연 2백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면 외제차를 수입할 수 있었는데 전부 8개사에 불과했다. 이때 수출주종품목이던 합판을 수출하는 부산의 동명목재(東明木材) 강석진(姜錫鎭) 사장이 수출을 가장 많이 하여 훈장도 받고 독일제 벤츠 승용차를 들여와 부러움을 샀다.
해외공관별로 수출목표를 주고 목표를 달성 못하면 문책을 받았다. 주무부서인 상공부는 높게 잡은 수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연말쯤엔 매일 품목별, 업체별로 수출을 독려하여 결국 초과달성의 기록을 세우고야 말았다. 한번은 연말에 내항에 있던 배를 외항으로 옮겨 놓고 선박수출 금액을 늘리기도 했다.
그 땐 모든 것이 부족했다. 물자, 돈, 기술 모두 그랬다. 그래도 양질의 인적 자원만은 넉넉했다. 대학이나 대졸자는 많지 않았지만 취직자리가 워낙 없다 보니 대학을 졸업한 고등실업자들이 넘쳤다. 대졸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1950년대 자유당 정권 때 대학재학 중엔 징집이 연기되어 농촌에서 소 팔고 논 팔아 다투어 대학에 갔기 때문이다. 그 덕분으로 갑자기 큰 대학들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르기도 했다. 재학 중에 현역으로 가 전방근무를 하면 1년 만에 제대시켜 주는 혜택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고등실업자들은 1960년대 압축성장을 할 때 고급인력의 공급에 큰 기여를 했다.
1963년경 울산정유공장 건설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걸프 측 기술자가 “다른 후진국에서 공장을 지을 땐 대졸 기술자가 없어 애를 먹는데 한국엔 오히려 좋은 기술자가 넘친다. 이들은 매우 우수하여 설계도만 주면 알아서 처리 한다”고 만족스러워 하는 것을 들었다. 60년대 중반만 해도 대졸자가 취직할 데라곤 몇몇 은행과 국영기업이 거의 전부였다. 이때는 신입사원 채용 때 법과나 상경계 출신만 뽑았는데 유일하게 한은(韓銀)은 일반인문계를 뽑았다. 이때 들어간 서울대 문리대 출신이 나중 한은 간부로 활약한 사람이 많다. 민간 기업으로선 삼호(三護), 삼성(三星), 천우사(天友社), 한국화약(韓國火藥)이 10여 명씩 뽑았다. 대학 졸업생 중 취직이 결정된 사람은 10%가 채 안되었다. 넘쳐나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려면 기업을 일으켜야 했다. 또 만성적인 물자부족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생산시설 확충이 시급했다. 그러나 축적된 민족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외자에 의한 투자가 유일한 출구였다. 혁명 초기엔 농촌 부문을 먼저 개발하여 농촌의 구매력으로 공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그러기엔 일이 너무 급했다. 외자라 해도 미국의 원조자금이 대종을 이루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 그것도 줄어가는 추세였다. 그 대신 차관과 민간투자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독일과 일본이다.

독일의 지원…기획원에 경제사절단 주재

사실 독일은 같은 분단국이란 사정도 있고 하여 한국 사정을 잘 이해하고 지원해주었다. 긴 세월이 지나 1997년 한국이 IMF 사태를 맞았을 때도 독일은 미국 금융자본이나 일본과는 달리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후하게 대해 주었다. 1964년 서독은 박 대통령을 초청하여 차관과 아이디어와 용기를 주고 격려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경제 부흥의 주역인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수상(전 경제상)을 만났을 때 시장경제체제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그 길로 가도록 강력히 권했다 한다. 그 밖에도 서독의 철강산업과 석탄개발 고속도로망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서독 탄광에서 일하는 한국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비장한 결의를 다짐했다. 박 대통령이 그토록 집념을 보였던 경부고속도로와 종합제철구상이 서독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서독은 전후 부흥에 성공하여 라인 강의 기적이란 말을 들었는데 한국도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한강의 기적이란 말을 많이 썼다. 서독은 전후 통화개혁을 하여 살인적 인플레를 잡고 경제부흥의 기틀을 잡았다. 또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히 유지하고 석탄개발과 제철·기계 등 공업화에 주력했는데 한국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박 대통령이 집권하자 통화개혁을 하고 1962년 최고회의 의장 시절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서독 루르공업지대를 인용한 것을 보면 일찍부터 서독의 경제부흥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서독 방문을 통해 큰 교훈과 자신을 얻었다 한다.
1967년엔 뤼프케(Heinrich Lubke) 서독 대통령이 답방 차 왔는데 더 많은 경협을 얻기 위해 장 부총리가 중심이 되어 열렬한 환영을 했다. 이때 기획원의 젊은 사무관이 정상회담의 통역도 하고 같이 온 서독경제성 장관 등을 기획원에서 맡아(?) 약 1억 1천만 달러의 차관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60년대 초 서독은 한국에 최초의 상업차관을 제공하고 2천 명의 광부와 1천 명의 간호사에 일자리를 주어 개발 초기에 많은 도움을 줬다. 서독 파견 광부 모집엔 대량실업 상태에 있던 대졸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펜만 잡던 대졸자들이 광부 흉내를 내느라고 흰 손에 연탄가루를 무쳐 거칠게 만드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서독에 간 대졸 광부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잔업을 맡아 하면서 탄광의 막장에서 고생했다. 광부들은 국내 월급의 5배 이상을 벌었다 한다. 이렇게 번 외화를 꼬박꼬박 본국에 송금하여 가족과 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머나먼 이국에서 서로 외로움을 달래다 부부로 맺어진 경우도 많다. 이들은 서독에서 계약이 끝나도 귀국하지 않고 세계 각지로 진출했다. 서독에서의 경험을 살려 국제화의 첨병이 된 것이다. 60년대에 이미 기획원 청사 내에 서독경제사절단이 주재했다.

한일 국교정상화에도 큰 역할

기획원은 미국, 독일 다음으로 일본과의 경협을 모색했다. 1965년 국교정상화 전에도 일본상업차관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그것만으론 부족해 국교정상화에 의한 경협의 대폭확대를 도모했다. 이런 배경에서 1965년부터 본격적이고 최종적인 교섭이 진전되어 드디어 6월 국교정상화 협정이 타결되었다. 한일협정을 통해 무상 3억 달러, 유상(재정차관) 2억 달러의 청구권과 상업차관 3억 달러 플러스 알파가 확보된 것이다. 당시 연 수출액이 약 1억 달러, 외환보유고가 1억 3천만 달러 정도였다. 이때 재정차관의 금리를 약간 높게 하는 대신 상업차관 한도를 6억 달러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논의가 경제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일본 측에서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상업차관 수요가 그렇게 많아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수교 과정에서 장기영 부총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정재계 유력자들과의 개인적 영향력을 통해서다. 장 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있을 때부터 한일회담 대표로서 특히 청구권 협상에 깊이 간여한 바 있다. 장 부총리의 성격도 있고 하여 기획원은 외무부를 제쳐놓고 여러 중요한 교섭을 했다. 그 땐 외교라 해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우방과의 경협교섭이 주류를 이루었다. 1960년대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얼마나 받느냐가 안보와 경제안정에 핵심적인 변수였다. 대미 원조교섭은 기획원이 주도적으로 해온 오랜 전통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의 원조교섭은 부흥부(復興部)에서 담당했는데 5.16 후 기획원이 신설되면서 그 기능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60년대엔 기획원과 외무부가 사무관 2명씩을 정기적으로 보내고 받았다.
장 부총리가 취임할 때만 해도 기획원엔 부흥부 출신 간부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외국과의 경협교섭 업무를 둘러싸고 기획원과 외무부는 줄기차게 다퉜다. 외무부는 해외공관이 있는 대신 기획원은 예산을 쥐고 있어 서로 만만치 않았다. 장 부총리 때만 해도 외무부는 기획원의 독주에 많이 밀렸다. 가장 비중이 큰 한일각료회담을 비롯하여 서독, 대만, 베트남과의 경제장관 회담을 모두 기획원에서 주도했다. 미국과의 교섭도 기획원에서 많이 했고 1966년 11월 존슨(Lyndon B. Johnson)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도 영접위원장을 장 부총리가 맡을 정도였다. 장 부총리는 존슨대통령의 숙소인 워커힐호텔에 가 목욕탕 수압도 일일이 점검했다고 기자들에게 털어 놓았다. 한일국교정상화 때 청구권 문제는 기획원이 주도했는데 나중 청구권구매사절단을 외교관 자격으로 동경에 보낼 땐 외무부의 견제를 많이 받아야 했다.

호화멤버 거느리며 원 맨 플레이

필자가 기획원을 처음 출입한 것은 1965년 봄 경이었는데 취임 1년이 된 장 부총리는 한창 신바람 나게 일하고 있었다. 선두에 서서 종횡무진으로 기획원과 경제정책 전반을 이끌었다. 기획원 고위직으로 차관 김학렬(金鶴烈), 기획차관보 김영준(金榮俊), 운영차관보 장예준(張禮準), 기획관리실장 이종환(李鐘桓), 종합기획국장 우윤희(禹潤熙), 경협국장 정문도(鄭文道), 예산국장 진봉현(陳鳳鉉), 기술관리국장 전상근(全相根), 통계국장 함만준(咸萬準) 씨 등 쟁쟁한 인물들이 즐비했는데 장 부총리는 이 호화멤버를 거느리고 원 맨 플레이(one man play)를 하고 있었다. 기획원 발족 때 큰 역할을 했던 이한빈(李漢彬, 전 재무차관), 차균희(車均禧, 전 차관), 이선희(李善熙, 전 운영차관보), 이기홍(李起鴻, 전 기획차관보), 정재석(丁渽錫, 기획국장), 이득용(李得龍, 1차산업국장) 씨는 이미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이한빈씨는 1989년에, 정재석씨는 1993년에 부총리 겸 기획원장관으로 돌아온다.
이한빈씨는 1950년대 재무부 예산국장 때부터 경제개발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예산과 기획업무를 같이 할 수 있는 강력한 부처가 필요하다는 소신이었고, 5.16 후 재무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재무부 예산국을 과감하게 기획원에 떼어준 기획원 탄생의 공로자다. 또 예산국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정재석씨는 과장 때 기획원 밑그림을 그렸고 30대의 기획국장으로 활약했으나 1964년 교통부로 전출되었다. 교통부에서 육운(陸運) 국장과 철도청 차장을 지냈는데 당시 그 자리는 우리나라의 수송문제를 책임지는 요직이었다. 1966년 김학렬 부총리 때 기획관리실장으로 컴백하지만 뛰어난 머리나 능력에 비해서 관운은 순탄치 못했다. 1965년도만 해도 먼 훗날 기획원 3층에 있는 장관실 주인이 되는 최각규(崔珏圭), 이경식(李經植)씨는 고참(古參)과장, 서석준(徐錫俊), 강경식(姜慶植), 진념(陳捻), 강봉균(康奉均)씨는 사무관이었다. 나중 한은총재가 되는 전철환(全哲煥)씨도 기획국 사무관으로 있었다.
최각규 과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 예산국 투자예산과장으로 날리고 있었는데 1966년 김학렬 차관이 재무장관으로 가면서 재무부 관세국장으로 발탁해 갔다. 이경식 과장은 기획국에서 여러 중요한 일을 하다가 주(駐)베트남 경협단, 청와대, 체신부 등으로 오랜 외유를 거쳐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부총리로 금의환향했다. 최창락(崔昌洛) 과장(후에 한은총재, 동자부장관)은 외자수급과를 맡아 원조관계 업무를 담당했는데 작은 체구지만 심지가 굳어 나중 장 부총리가 골치 아픈 자리인 민간차관 과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부업을 겸해 대학에 강사로 나간다고 했다. 기획원은 아니지만 경제장관이 되어 이 나라 경제를 요리한 박필수(朴弼秀, 상공부장관), 최동규(崔東奎, 동자부장관), 조경식(曺京植, 농수산부장관), 이진설(李鎭卨, 동자부장관), 최수병(崔洙秉, 공정거래위원장)씨 등은 팔팔한 사무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무렵 장 부총리는 미 존슨 대통령고문 월트 로스토(Walt W. Rostow) 박사 때문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MIT 교수를 지낸 로스토 박사는 미 국무성에서도 일했고 ‘경제발전 5단계설’로 유명했다. 즉 한 나라의 경제발전단계를 1)전통사회 2)선행조건 충족 단계 3)도약 단계 4)성숙 단계 5)대중소비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한국은 3단계인 도약단계(take off)라는 것이다. 한국이 후진국의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세계적 석학이 도약 단계에 들었다고 진단했으니 용기백배했던 것이다. 야당에서는 도약 단계가 아니라 선행조건충족 단계라고 반박했다. 그 때 한국은 후진국(後進國)이란 용어 대신 저개발국(低開發國)이란 말을 쓰기 시작하고, 조금 있다가는 개발도상국(開發途上國)으로 높여 부른다. 용어 사용에도 자존심을 찾았던 것이다. 장 부총리는 가는 데마다 경제발전 5단계설을 인용하면서 한국경제호가 막 이륙(離陸)했으므로 기뻐해야 하지만 “이제 안전벨트를 풀어도 좋습니다”란 사인이 나올 때까지 조금만 더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로스토 교수는 한국을 자주 방문하여 한국경제의 장래에 낙관적인 신호를 많이 주고 계속 격려했다.

기획·경협·예산의 세 기둥

당시 기획원은 기획·경협·예산 파트가 3개의 큰 기둥이고 기술 관리와 통계 파트가 붙어 있었다. 기획원은 옛 부흥부의 기획국(경제기획업무)과 물동국(물자수급과 물가 담당으로서 나중 경제협력국과 기술관리국으로 분화된다), 재무부의 예산국, 내무부의 통계국이 합쳐진 것인데 각 파트마다 조금씩 문화와 분위기가 달랐다.
기획국은 한국은행 출신의 학자 형이 주류였으나 나중엔 행정고시 출신의 젊은 일꾼들이 많이 들어왔다. 당시 행시(行試) 상위 합격자들이 잠시 청와대 근무를 거쳐 기획국에 많이 들어왔다가 예산국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이 자유 분망하고 거리낌이 없어 한국은행 조사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5개년계획 작성 등 이론적 일을 많이 했는데 스스로는 구름 잡는 일을 한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기획국 중에서도 매일 물가와 싸우는 역할을 담당하는 물가과만은 약간 분위기가 달랐다. 작업을 하는데 드러럭 드러럭 소리가 나는 수동식 타이거 전산기와 주판을 많이 썼다. 기획국은 나라 경제를 두 어깨로 감당한다는 프라이드가 높았다. 실력 있고 개방적이며 토론에 강했다. 객관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공평무사하고 또 가장 애국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은 많은데 생색은 나지 않고 다른 부처, 특히 재무부에서 자료를 잘 안준다고 불만이 많았다. 짜장면을 시켜먹으면서 야근을 했고 개방적이고 학구적인 분위기여서 기자들이 편하게 자주 찾았다. 외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학자 등 전문가들이 많았다. 5개년계획을 비롯하여 좋은 계획을 만들어놔도 집행부서가 존중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같은 기획원 안에 있는 예산국도 별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 때는 계획 따로 정책 따로였다. 종합제철이나 경부고속도로 등 중요한 국책사업들 중 당초 5개년계획에 없던 사업들이 많다. 1970년대 중반 들어서야 5개년계획에 반영 안 된 사업은 아예 예산신청을 못하게 하는 등의 조처가 나왔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워낙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5개년계획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67년부터 총자원예산(總資源豫算, ORB) 제도를 만들었다. 5개년계획의 틀 안에서 정부와 민간을 망라한 그 해 그 해의 총 자원을 어떻게 동원하고 배분할 것인가를 추산해보는 것이다. 1967년 총자원예산에 의하면 성장률은 10% 이상, 1인당 GNP는 1백 39달러, 물가상승율은 도매 7%, 소비자 10%, 수출목표를 3억 5천만 달러로 잡았다. 2차 5개년계획의 1차년도 목표치보다 훨씬 높아 이때 이미 초과달성의 의욕을 보였다. ORB는 기존의 5개년계획을 해마다 경제여건과 정세변화에 맞춰 5년 단위의 롤링플랜(rolling plan)으로 다시 짜보는 데 큰 뜻이 있었다. 해마다 ORB는 그해의 국정목표가 되었다.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경협국

경협국은 손에 잡히는 일을 하고 국내외업자들도 많이 다루어 노련하고 융통성이 많았다. 외국 사정에도 밝고 적극적이었다. 나중 정계로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많다. 미국 원조기관이나 세계은행 등 외국인들을 응대하는 일을 맡았는데 수완도 좋고 술도 강했다. 외국인들과 상대할 땐 논리적인 설득도 중요했지만 술자리에서 담판을 벌여 승복시키는 일도 잦았다. 차관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위해 조사팀이 한국에 오면 어떻게든 납득시키라는 엄명을 받아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했다.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와 기백이 전해져 좋은 결과를 얻어 냈는지 모른다. 외국인을 잘 접대해야 차관획득 등 국가사업이 잘 된다면서 정말 열심히 설득하고 접대했다. 그래서 한국에 한번 오면 또 오려했다. 1967년 미국의 조지 볼(George Ball) 투자사절단이 왔을 때 숙소인 워커힐호텔에서 과장급이 신발정리까지 했다. “대한민국 과장이 신발정리나 하고 있으니…. 이것도 다 애국하는 일이니까” 하고 웃었다.
김학렬 부총리가 포항종합제철을 추진할 때 경협국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제성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 온 아카사와 쇼이치(赤澤一) 일본 통산성 중공업국장의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3량의 특별열차를 편성해 지방출장을 갔다. 세계은행 아시아국장이 왔을 땐 접대 차 비밀요정에 갔다가 그날 밤 일제단속을 벌인 특별사정반에 걸려 버렸다. 급한 김에 같이 갔던 사무관이 수표를 내밀었다가 그것마저 압수당했다. 밤중에 급보를 받은 기획원간부는 청와대에 사정을 설명하고 잡혀있던 일행들을 빼내기도 했다. 당시는 외자유치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세계은행 국장은 그 다음날 부총리 안내로 박 대통령을 예방하면서 그 사무관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간곡히 요청했다 한다. 부총리는 기자들에게 그런 사정을 털어 놓으면서 수표를 압수해간 기관 책임자가 “수표를 주려면 자기한테 직접 주지 왜 복잡하게 주느냐”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었는지 기획원은 일본통산성과 세계은행으로부터 포항제철의 경제적 타당성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부정적 평가를 받았던 사업이었다.
그 땐 큰 사업을 하려면 원조나 차관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기업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들 중엔 나중 재벌급이 된 사람도 있다. 외자도입이 한창일 땐 “여기가 당신 사무실이야?”하는 핀잔을 들으며 매일 기획원으로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후에 이들은 자기 회사에서 출세를 했다.

야당 경제통 김대중, 이재형, 이중재 포진

외자를 도입하려면 기획원에 신청서를 내고 외자도입심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초기에 차관도입은 정부지불보증을 받아야 하므로 국회동의가 있어야 했다. 이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국회동의를 다루는 국회재경위(國會財經委)엔 쟁쟁한 야당 경제통이 많았는데 김대중(金大中), 이재형(李載瀅), 이중재(李重載), 고흥문(高興門), 진의종(陳毅鐘) 의원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을 납득시켜 난관을 넘으려면 대단한 경제적·시간적 코스트를 치러야 했다. 재경위의 국정감사 때도 장관이었다. 3층 회의실에 거물급들이 즐비하게 앉아 차관난맥상과 부실기업, 물가폭등 문제를 질타했다. 장 부총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이들을 응대했다. 장 부총리는 재경위 의원들과의 협상기술도 뛰어났다. 30대 한국은행 조사부장 때부터 국회에 드나들며 로비를 한 경력이 있는지라 국회의원들을 능수능란하게 응대했다. 당시 국회의 김성곤(金成坤) 재경위원장이 막강할 때여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주로 밀실협상을 통해 난제를 해결했다. 1967년부터는 정부지불보증 대신 은행지불보증이란 편리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러나 그런 절차보다도 보이지 않는 힘이 차관도입 여부를 결정했다.
당시 차관, 특히 현금차관이나 물자차관은 확실한 이권이었다. 시중 실질금리가 30% 가까이 됐는데 차관금리는 10% 선이었다. 때문에 차관을 도입하려면 상응한 대가를 내야 했고 그것을 요리하는 사람은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여당인 공화당의 재정위원장, 그리고 부총리란 소문이 파다했다. 이 네 사람이 합의해야 차관을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무적인 작업을 기획원 경협국에서 했다. 그 땐 민간의 수준이 낮을 때라 차관사업 계획서를 국제기준에 맞춰 만들기가 어려웠다. 경협국에서 대신 만들어주다시피 했다.
석유화학공업을 시작할 때 황병태 공공차관 과장 방에 가보면 복잡한 석유화학공장들의 흐름을 그림으로 붙여 놓고 설명을 해주곤 했다. 납사, 크래킹센터, VCM, PTP, 폴리프로피렌, 폴리스타이렌 등등 이름도 생소한 제품들을 나열하고는 석유화학의 전방사업과 후방사업을 설명하는데 공과대학도 안 나온 과장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으면 외국 책을 갖다놓고 공부한 것이라고 말했다. 석유화학공장을 짓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처음엔 할 만한 민간업자를 불러 공장을 찍어주고 외국 파트너를 구해주기도 했다.

예산국이 힘 있고 콧대 높았던 시절

예산국은 전통 있는 재무부 예산국이 그대로 옮겨 온 것이라 관료적 전통도 있고 힘도 있었다. 1965년엔 시골 무사 같은 진봉현씨가 예산국장으로 있었고 재무부 예산국 초창기 이한빈 과장 밑에서 최각규씨와 더불어 초임사무관으로 고생했던 김 주남씨가 예산총괄과장으로 있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김 과장은 항상 웃음 띤 얼굴에 여유가 있었다. 이한빈 재무부 예산국장 때는 김학렬 과장이 주위와 마찰은 있었지만 뱃심 있고 이론에 밝아 선임들을 제치고 후임 예산국장으로 발탁됐다 한다. 옛날 예산국 멤버들이 기획원에서도 그대로 포진하여 그들끼리 특별한 유대감이 있는 것 같았다. 부하들을 무섭게 다루기로 소문난 김학렬씨도 친정인 옛 예산국 식구에 대해선 한목 놓아 주는 분위기였다. 예산국은 한여름 철엔 정신없이 바쁘고 사람이 붐볐다. 늘 각 부처 예산담당자들이 와서 사정을 하고 하여 콧대가 아주 높았다. “당신 설명을 들으니 옳고 타당한 것 같다. 내 돈 같으면 주겠는데 정부예산이라 여유가 없고 우선순위가 있다”는 식으로 가차 없이 손질했다.
1966년 예산을 짤 때는 2천억 원이 넘는 요구액을 1천 1백 억 선으로 깎았다. 그러나 이들도 함부로 못 하는 데가 있었다. 바로 국방비와 정보예산이었다. 국방비는 내역을 볼 수도 없고 함부로 깎을 수도 없어 나중엔 GNP의 6%로 한도를 정하고 그 안에서 조정토록 했다. 국방비는 경상성장률이 항상 예상보다 앞서가는 바람에 6% 한도를 못 채우고 5% 선에서 머물렀다. 국방비를 둘러싸고 기획원과 국방부는 끊임없이 다퉜는데 박 대통령이 예산보고를 받으면서 성역을 두지 말고 예산을 깎고 정 어려우면 자기에게 직접 보고하라며 예산국에 힘을 실어 주었다. 정보예산은 좀 심하게 깎았다가 밤중에 기관원이 예산국장실 기밀서류를 촬영해가서는 보안이 허술하다고 청와대에 보고하는 바람에 예산국장이 사표를 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산국과 정보부의 기싸움은 술자리에서도 벌어졌다. 예산편성이 끝나면 한 자리 벌이는데 먼저 술에 떨어졌다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 가장 술이 센 대표들을 뽑아 점심부터 고기로 속을 든든히 채운 다음 용약(勇躍) 출전했다. 만약 이겼으면 소문을 내며 기뻐하고 진 해는 몹시 억울해 했다. 예산국장 차엔 당시 무척 귀하던 야간통행증이 있었는데 기획원이 철야작업을 하거나 긴급연락을 할 때 동원 되곤 했다.
예산국은 보수적인 곳이라 전통과 관행을 많이 답습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빠듯한 세수(歲收)에 세출을 맞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재정인플레를 방지하기 위해 적자예산은 적극 피해야 한다는 컨센서스는 있었다. 국세청이 설립된 1966년에도 미국원조자금인 대충자금(對充資金)이 3백 84억 원이나 되어 그토록 고생하서 걷은 내국세(7백억 원)의 절반이 넘었다. 이땐 담배를 판 전매익금(專賣益金)이 75억이나 되어 예산의 큰 몫을 차지했다. 경제개발과 더불어 재정규모가 커지면서 같은 예산도 효과적으로 써야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강경식씨가 예산총괄과장이 되면서 과장실에 컴퓨터 터미널을 갖다놓고 초보 단계의 예산전산화작업이 시작되었다. 강 과장 방에 가면 컴퓨터에 찍혀 나오는 숫자를 보면서 설명을 하곤 했다. 강 과장 위의 예산국장이 젊은 최동규(崔東奎)씨인데 두 사람 다 기가 센 사람들이라 예산국엔 다소 긴장기가 돌았다. (계속)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한 후 1995년부터 10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필자는 1965년부터 71년까지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며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부총리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했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시절의 수기를 묵은 취재수첩과 관계기록, 신문스크랩 및 출입기자 시절의 보고 들은 내용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0호 (2015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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