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학도의용군 창설

▲ 소석(素石) 이철승 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참전유공자 공식등록
素石 李哲承(이철승, 국방부가 사실확인…
“학련 구국동지들 희생 너무 많아”

6.25 학도의용군 창설 공적이 뒤늦게 공식 확인되어 이철승(李哲承) 당시 학도의용군 단장이 ‘참전 유공자’로 공식 국가유공자로 등록되리라는 보도가 6.25를 체험한 세대에게 깊은 감회를 주고 있다. 소석(素石) 이철승 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은 올해로 아흔셋의 고령으로 65년 만에야 참전 유공자로 예우를 받게 됐기 때문이다.

보훈처가 알아보고 유공자로 등록…

이철승 이사장은 지난 16일, 학도의용군 창설 65년 만에 ‘참전 유공자로 인정’됐다는 보도(동아일보)에 대한 소감을 묻는 전화 인터뷰에서 “국방부가 사실을 공식 했다는 거요”라고 짧게 말하고 “그때 전국의 학련 구국동지들이 낙동강 전선에서 너무 많이 희생됐다”는 슬픈 감회를 잠시 들려주었다.

▲ 보전시절 상과교수인 박극채 교수와 윤원구와 소석 이철승

6.25 참전 유공자 등록은 본인이 직접 참전사실을 입증하여 보훈처에 신청해야 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소석은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신청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지난 12일 국방부로부터 이 이사장이 학도의용군을 창설했던 사실을 확인했다는 서류를 보내와 등록절차를 밟게 됐다는 이야기다.
6.25 학도의용군 창설과 참전사실이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국가유공자로 공식 등록된 것은 이 이사장 개인의 명예를 넘어 혈서(血書)를 쓰고 지원입대하여 많은 피를 흘린 수많은 학도의용군의 명예회복의 의미가 있다.
당시 이 이사장은 전국학련구국대 중앙위원장으로 수원을 거쳐 대전에서 학련 소속 학생들을 규합하여 학도의용군을 조직하여 낙동강 전선 및 인근 안강, 기계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을 기록했다. 이날 소석은 “국가보훈처가 이를 알아보고 참전 유공자로 등록해 준다니 고마운 일”이라고 하면서도 6.25 초전부터 9.28 수복 및 북진대열까지 학도의용군이 참전하여 풍전등화격의 조국의 운명을 건져낸 공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는 소감을 덧붙였다.

‘대한민국과 나’ 속의 6.25 학생운동

소석은 지난 2011년,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시그마북스 발행)에 6.25 학생구국운동에 관해 자세히 기술했다.

▲ 1946년 전국학련위원장으로서 이승만 박사 내외분과 함께.

회고록은 1·2권 두 책으로 △제1부, 일제·해방·건국 편에 반탁(反託), 건국운동, 반공투쟁 및 6.25 학도의용군의 참전 내용을 싣고 △제2부 ‘민주장정’(民主長征)에는 4.19학생혁명, 5.16후 7년간의 해외망명(亡命), 귀국 후 3김 시대의 ‘40대 기수론’을 회고했다.
2권에는 중도통합(中途統合)정치, 큰 정치, 탈북자 구국운동을 기술했고 앞으로 남아있는 과제로는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대표의장으로서 “제 나라 역사도 모르는 ‘상놈’의 정권”(노무현정부)을 바로 잡는 일이라고 적었다.
소석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이 있기 하루 전 6월 24일은 5.30 총선거에 출마했다가 빚을 져 이를 갚기 위해 포천에 있는 금광을 처분하고 귀경했다. 5.30 총선거 때 28세의 청년으로 전주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었다.
이튿날 6.25 전쟁 소식을 듣고 계동의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 돈암동의 조소앙 선생 댁을 방문했지만 전쟁에 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6월 27일에는 전국 학련의 오홍석, 양근춘, 정진방 등이 찾아와 서울을 떠나 학련 구국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밤 11시에 한강다리를 건넜다. 한강 인도교 폭파 3시간 전이었다.
이로부터 소석과 전국 학련 소속 학생들의 의용군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대선서 구국 총연맹 학생부장 취임

소석과 일행이 수원을 거쳐 대전에 도착하니 충남 학련의 최극씨 등 50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흥여관에 자리를 잡고 학도의용군을 창설하여 길거리에 격문을 내 붙이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100만 학도 총궐기’를 호소했다.

▲ 1946년 1월 7일 이철승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고려대 정치학과)이 반탁학생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어 충남 학련 학생들의 혈서 지원서를 들고 국방부로 이선근 정훈국장을 찾아가 참전을 요청하자 상황이 위급하니 “대구로 내려가 다시 만나자”고 했다. 이에 충남 학련 소속 300여명이 먼저 대구로 떠나고 소석은 7월 4일 대덕군청에서 가진 ‘구국총연맹’ 결성식에 참석했다.
구국총연맹은 위원장 조병옥(趙炳玉) 박사, 부위원장 김병로(金炳魯), 김도연(金度淵), 배은희, 백남훈, 청년부장 유진산(柳珍山), 학생부장 이철승 등이 맡았다. 당시 조병옥 박사는 공직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이었지만 군복에 헬멧을 쓰고 독전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감명 받아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 길에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조 내무는 취임하자마자 법 규정에도 없이 ‘학도 경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구국총연맹 학생부장을 맡은 소석은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을 비롯하여 김병로, 김성수, 김도연씨 등과 전주로 내려가니 벌써 인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었다. 이때 소석의 선친께서 “너는 빨리 떠나거라” 하여 대구로 진입하니 전국의 학련 동지들이 속속 몰려왔다.
마침 경북도청 사회과장이 채문식(전 국회의장)으로 학련 부위원장 출신이었다. 소석 일행이 그를 찾아가 긴급 구호양곡 5가마를 확보하여 ‘전국 학련 구국대’ 이름으로 참전을 결의했다. 이때 소석이 구국대 단장을 맡았다.

군번, 계급없이 ‘학병’ 마크 참전

학련 구국대는 일부 군복, 일부 교복 차림에 군번과 계급이 없었다. 비둘기 마크에 ‘학병’이란 견장을 달고 각 전선으로 투입됐다.
충남 학련소속 의용군은 육군 25연대에 투입되어 짧은 훈련을 거쳐 포항 3사단에 배속되어 기계, 안강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남겼다. 또 학련 구국대 500명은 일본 후지산에서 1주일간 특수훈련을 받고 유엔군에 편입되어 기계, 안강전투에서 상당한 희생을 겪었다.
또 경북 학련은 이용택, 손문창 등 지도부가 미리 의용군을 모집하여 영덕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전황이 급박해지자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했지만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대구사수’를 선언하여 학도의용군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이로부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수복과 38선 돌파까지 학도의용군의 활약은 계속됐다.
소석이 주도해 온 학생운동은 일제하의 총독부 학병 징집 반대에서부터 8.15 해방공간의 반탁·반공 및 6.25 참전 의용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순국희생자를 낳았다. 9.28 서울수복 기념일에는 동작구 보라매공원에 있는 ‘반탁·반공 순국학생 충혼탑’ 앞에서 위령제를 갖는다. 올해는 소석이 참전 유공자로 공식 인정을 받아 예년보다 뜻 깊은 위령제 행사를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반공, 6.25참전 유공

소석 이철승은 보성전문(현 고려대) 재학시절에 조선학생 대표로 고이소 총독을 만나 “식민지 청년이 왜 학병으로 가야 하느냐”는 언쟁을 벌인 후 학병으로 끌려가 이등병으로 복무하다 8.15로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앞장섰다.

이 무렵 모교인 고려대 좌익학생 등이 교주인 인촌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하자 고대에 복교하여 ‘왜정 시절 학생운동 선배로서’ 교내 소란을 수습했고 ‘반탁 전국학생 총연맹 위원장’, ‘전국학생 총연맹’ 대표의장으로 좌익 학생운동권과 맞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
소석은 정계에 입문하여 7선(選)을 기록하며 야당 총재와 국회부의장 등 많은 경륜을 쌓았지만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달리 끝내 집권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석은 대한민국 건국과 반탁·반공 및 6.25 참전 학도의용군 등으로 ‘대한민국과 나’ 회고록을 남길 수 있었다. YS와 DJ는 6.25 때 입대 적령기였지만 끝내 참전하지 않았고 그 뒤 야당 투사로서 집권을 기록했다. 소석은 자신이 끝까지 선비댁 가문을 지켜냈다는 말로 정계은퇴 소감을 들려주기도 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2호 (2015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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