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칼 차관과 냉랭관계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 ④]

張基榮(장기영) 불도저 부총리
면도칼 차관과 냉랭관계
고시 1기 김학렬, 내가 장관 맡았어야


글/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

▲ 장기영 경제부총리

장 부총리는 어디까지나 능률 신속 위주여서 행정절차나 관료조직을 뛰어넘어 일을 했다. 차관이나 차관보, 국장들을 제치고 과장들을 데리고 직접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땐 과장 보고 기안해 오라 하여 부총리가 먼저 사인을 한 다음 역순으로 사인을 받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고위간부들은 불만스러워 했으나 장 부총리의 시퍼런 서슬 때문에 속으로만 앓았다.

급할 때는 국장·차관보다 먼저 결재

그러나 기가 센 김학렬(金鶴烈) 차관만은 노골적으로 불평을 했다. 장 부총리는 모른 체 했다. 김 차관은 5개년계획 작성이라든지 세계은행 조사단과의 협의라든지 하는 고상하고 투명한 일만 주로 하고 이권에 관계되는 일엔 배제되었다. 기획원의 일상적인 일은 김 차관이 맡아 했지만 엘리트관료 출신으로 행정절차를 중시하는 김 차관은 장 부총리의 행정방식을 아주 못마땅해 했다. 심지어 저의(底意)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장 부총리가 오기 전에는 잠깐씩 거쳐 지나가는 장관 밑에서 차관으로서 모든 일을 총괄 했는데 갑자기 소외를 당하니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른다. “기획원은 말이야, 포스트가 잘못됐어. 머리 좋은 내가 장관을 맡아 기획을 하고 장(張)은 추진력이 있으니 차관을 맡아 밀어붙여야 하는데” 하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했다.
같은 3층에 있었지만 장관과 차관 사이는 냉랭했다. 장 부총리도 몇 번 바꿀까 생각했다는데 고시 1기의 청렴하고 유능한 김 차관을 자르기엔 코스트가 너무 컸는가 보다. 그대로 안고 가기로 생각을 바꾸는 대신 있어도 없는 것 같이 대접했다. 그 통에 기획원 관리들은 처음엔 힘들어 했으나 워낙 두 사람간의 힘의 차이가 커서 그런대로 거기에 적응했다. 기획원의 양대 전성기를 이룩한 장기영, 김학렬 양 부총리의 확집(確執)은 이때 비롯된 것이다. 이 확집은 두고두고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여러 경제 관료의 출셋길을 바꾼다.
김학렬 차관은 가냘픈 몸매에 면도칼 같은 성격이었다. 그의 소문은 일찍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머리 좋고 이론에 밝고 공부도 많이 하나 입이 험하다고 했다. 가령 한은에서 GNP 통계가 발표되면 담당사무관을 불러 맹렬히 공부를 해놓고 다음 회의 때 국·과장들에게 “작년 우리나라 투자율이 얼마야?” “자본계수는?” “해외저축률은?” 하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여서 최신 경제 책이나 논문 들을 미리 구해다 읽었다. 당시는 넉시(R. Nurkse), 틴버겐(J. Tinbergen), 뮈르달(K.G. Myrdal), 루이스(A. Lewis), 로스토(W. W. Rostow) 교수 등의 후진국 개발론이 각광을 받았다. 김 차관은 이론에 밝고 철저히 준비하니 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밑의 신세를 안지고 사생활이 깔끔하다 했다. 일찍부터 부인이 가계를 책임져 김 차관이 당당하게 일할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서 결재를 받을 때 잘 모르면 눈이 쑥 빠지게 혼들이 났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엘리트 공무원이라 결재할 때 미스를 귀신같이 잡아내고 가차 없이 질책했다. 국장 땐 과장을, 차관보 땐 국장들을 혼내고 차관이 되자 차관보를 비롯한 모두를 떨게 했다. 차관보를 하다가 차관이 되었을 때 같이 차관보를 하던 사람이 좀 무관하게 굴자 “어제까지는 같은 차관보였지만 지금은 내가 차관으로서 당신의 상사”라면서 깍듯이 예의를 차릴 것을 요구했다 한다. 또 천하의 장 부총리와 맞설 정도였으니 대단한 기(氣)라 할 수 있다. 어느 직원이 인사 부탁을 했다고 인사카드에 붉은 펜으로 ‘인사 청탁 한 놈’이라 써넣고는 절대 지우지 못하게 했다. 그 카드는 김 차관이 기획원을 떠나고 난 후에야 바뀌었다.

몽둥이질 부총리 아래 대쪽차관

기획원은 인사가 비교적 공개적이고 공정했다. 부흥부 때부터의 전통이라 했다. 외국과의 일이 많고 이론과 아이디어 싸움이기 때문에 실력대로 인사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기획원 인사는 대개 예측이 가능했다. 김 차관은 좋은 인재에 욕심을 많이 냈다. 고시합격자 중 성적 좋은 사람을 뽑아오고 훈련도 철저히 시켰다. 유솜과의 업무가 많아 유솜 자금으로 미국 유학도 많이 보냈다. 기획원 간부 중에 밴더빌트(Vanderbilt), 시라큐스(Syracuse) 등 미국 대학의 석사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때만 해도 고시합격자 중 성적상위자는 재무부를 선호했고 그 다음이 기획원과 상공부, 외무부였다. 김 차관은 기획원을 일등 부처로 만들려면 좋은 인재를 뽑아 철저히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또 실제로 실천했다.
김 차관은 일을 대(竹)를 쪼개듯이 쫙 밀어붙였다. 몽둥이로 몰듯이 하는 장 부총리와는 대조적이었다. 한번은 김 차관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경제개발 2차 5개년(67~71년)계획안을 검토하는 10시 반 회의(Ten-Thirty Meeting)이었다. 1차 5개년(62~66년)계획은 자유당, 민주당에서 만든 것을 토대로 5.16 후 혼란 속에서 2개월 만에 급조된 것이어서 여러 가지로 허술한 점이 많았다. 1962년 1월 김유택 기획원장관은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간사(發刊辭)에서 “이번의 5개년계획은 겨레의 중지를 모은 것이다. 그러나 단시일 내에 성안해야 했던 관계로 계획의 내용에 있어서 충분한 조사와 검토를 거치지 않은 부분이 없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데…” 하고 솔직히 시인할 정도였다. 1차 5개년계획은 1962년 군사정부에서 공표되었으나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53년 자유당 때에 발표된 네이산(Nathan) 보고서와 타스카(Tasca) 보고서를 들 수 있다. 네이산(Robert R. Nathan)은 53년 3월 유엔 산하의 UNKRA(한국재건기구)와 계약을 맺고 와 어떻게 하면 한국을 재건할 것인가 하는 주제로 장기계획을 발표했다. 타스카(Henry J. Tasca)는 53년 7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특사로 내한하여 대한원조 3개년계획을 만들었다. 조잡하지만 첫 장기개발계획이라 할 수 있는데 둘 다 미국원조자금을 효율적으로 써서 자립경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59년엔 부흥부의 싱크탱크였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개발 7개년계획의 전반 3년계획을 만들었으나 정식 정책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자유당 때는 장기건설계획을 마련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보고하면 “5개년계획 같은 것은 소련의 스탈린이나 하는 짓”이라고 일언지하에 각하되어 다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다. 60년 민주당 정부는 종래의 계획들을 보완하여 5개년계획을 만들기는 했으나 단명으로 끝나는 바람에 햇빛을 보지 못했다. 5.16 후 군사정부는 민주당 때 만들어 놓은 것을 거의 그대로 쓰고 멤버들도 활용했다. 그래서 그렇게 단시일 안에 5개년계획 같은 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61년 박 정희 최고회의의장이 미국에 갈 때 이 엉성한 5개년계획을 들고 가 특별원조를 요청했다.

김차관, 2차 5개년 계획 천하일품 자찬

2차 계획은 외국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2년여에 걸쳐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유솜 자금으로 미국 교수들이 많이 와 거들었는데 기본모델은 아델만(Irma Adelman) 교수의 것을 썼다 한다. 또 스탠포드 대학의 패트릭(H. T. Patrick), 걸리(J. G. Gurley), 쇼우(E. S. Shaw) 교수 등이 금융부분 자문을 했다. 이들은 공개시장조작의 전단계로서 한은에 통화안정계정을 만들어 통화를 조절해야한다고 건의했는데 실제 그대로 됐다. 국제수지 부문은 머스글레이브(R. A. Musgrave) 교수가 많은 자문을 하는 등 미국전문가들이 경제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원조자금과 미국의 입김 때문이었다. 2차 5개년계획에서 연 7%의 목표성장률은 너무 낮지 않느냐고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7%도 대단히 높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1차 계획 때의 연평균 7.1% 목표는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젊은 군인들의 의욕을 나타낸 것이라 했다. 총량계획과 부문별 계획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일본에서 추진 중이던 이케다(池田勇人) 수상의 소득배증계획이 연평균 성장률을 7%로 잡아 10년 동안 소득을 두 배로 늘린다는 것이므로 우리도 뒤질 수 없다고 그렇게 의욕적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 때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연 7%의 5개년계획을 발표했는데 우리는 그보다는 높아야한다는 뜻에서 0.1%를 더했다는 설명도 했다. 당시는 아시아 각국이 경쟁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추진했는데 인도와 필리핀, 대만 등이 우등생 소리를 들었다.
한국의 경제개발은 초기엔 실적이 저조하다가 65년부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여 66년엔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나중 1차 5개년계획을 결산한 결과 연평균 성장률은 8.5%에 달했다. 그래도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2차 계획은 목표를 보수적으로 잡아놓고 나중 초과달성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솜과 세계은행 측에서도 처음엔 7%는 높은 것 같으니 좀 보수적인 목표가 어떠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들어 금리, 환율, 무역 등 현실화·자유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고도성장이 궤도를 타게 되자 세계은행에서도 한국이 성공모델이라며 여러 가지 집중지원을 했다.
2차 계획의 마무리 작업을 김 차관이 맡았다. 마지막 단계에서 관계부처 차관과 전문가들이 한 달에 몇 번씩 모이는데 회의 개회시간이 아침 10시 반이어서 ‘Ten Thirty Meeting’이라 불렀다. 외국인 고문들도 참석하여 동시통역으로 진행됐다. 숫자가 가득 쓰인 회의 자료를 넘기면서 김 차관이 회의를 주재하는데 이론에 밝고 논리도 정연한 데다 독설로 소문이 널리 나있는 터라 모두들 겁먹은 분위기였다. 회의는 김 차관 의도대로 빨리 돌아갔다. 준비도 많이 하고 나오므로 섣불리 이의를 제기했다간 타박을 듣기 일쑤였다. 한번은 안건 중에 통신시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화세 신설을 검토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체신부 차관이 무슨 말을 하려 하자 김 차관이 전광석화 같이 “오늘 회의 안건 중에 전화세 조항은 프린트에서 삭제하겠습니다. 다음.” 하고 말문을 막아 버렸다. 매사 그런 식으로 회의를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절대 구질구질한 이의를 못 달게 했다. 김 차관의 서슬 때문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론 불만도 많았고 적도 많이 만들었다. 김 차관은 이때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이 많았다. 1966년 재무장관이 되고나서 2차 5개년계획은 한국경제 사상 최고의 걸작품이며 자기는 천하일품인 이 계획을 만들었기 때문에 재무장관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2차 5개년의 아버지라고 자처했다. 66년 여름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기구) 설립을 앞두고 세계은행에서 굴하티 박사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하여 2차 5개년계획과 한국경제 전망에 대한 진단작업을 벌였는데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이때 협의를 맡았던 김학렬 차관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2차 5개년계획은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탁월한 문헌이며 기술적인 면에서도 질이 좋고 종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굴하티 조사단은 투자우선순위를 조속히 정하고 사업의 경제성과 기술성을 신중히 조정할 것과 초기의 사업집중시기를 검토하도록 건의했다. 또 매년 7천만 달러로 잡은 민간이전수입(구호식량 및 교포재산 반입)과 년 증가율 2%의 인구억제사업은 약간 의문시된다고 지적했다. 김 차관은 이러한 지적이 어디까지나 제안이지 비판은 아니라면서 자기가 만든 2차 5개년계획이 세계적인 공인을 받았다고 좋아했다.

양윤세·황병태 등 과장들의 전성시대

장 부총리의 일하는 스타일 때문에 기획원의 몇몇 과장들은 혹사를 당하면서 신나 했다. 막강한 영향력도 행사했다. 장관실엔 원조 및 차관 도입과 관련해 경협국 과장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다. 물가가 말썽을 부리면 물가과장, 예산 철엔 예산국 과장들이 호출을 당했다. 5개년계획을 짜는 일은 김 차관에게 맡기다시피 하여 기획국 과장들은 물가과장을 빼고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원조관계 업무와 부총리의 통역 노릇을 한 양윤세(梁潤世) 외자총괄과장과 공공차관을 담당한 황병태(黃秉泰) 공공차관과장은 매일 불려가다시피 했다. 과장들을 불러 설명을 듣고 직접 지시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부총리실에 자주 불려간 과장들 중엔 관직에서 차례로 올라가 장관이 된 사람이 많다. 양윤세 과장(동자부장관) 외에 이희일 투자기획과장(농림부장관), 최동규 경제조사과장(동자부장관), 최창락(崔昌洛) 외자수급과장(한은총재, 동자부장관), 김주남 예산총괄과장(건설부장관), 서석준 물가과장(부총리, 상공장관), 이선기(李宣基) 외자관리과장(동자부장관)이 대표적이다. 서석준 과장은 사무관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나중에 요직인 물가국장이 될 때도 선임을 제치고 발탁됐다. 한동안 기획원은 장차관의 산실(産室)이었다. 다른 부처에서 경제전문가가 필요할 땐 기획원에서 한 계급씩 높여 나갔다. 농림·건설·국방·체신부를 비롯하여 감사원이나 서울시에도 많이 나가 기획원 사람들의 출세가 빨랐다. 기획원차관은 장관 승진의 영(零)순위였다.
황병태 공공차관과장은 적극적이고 유능하여 부총리감으로 꼽혔으나 역풍도 강해 운영차관보를 끝으로 기획원을 떠났다. 일찍부터 기획원의 보스로 통했다. 뒤늦게 미국으로 유학하여 학위를 받고 대학총장, 국회의원, 주중(駐中) 대사 등 다른 길을 걸었다. 다른 부처 국과장들도 자주 불려왔다. 65년 금리현실화 때는 재무부 김용환 이재과장(후에 재무장관)이 두툼한 서류철을 안고 매일 오다시피 했다. 그 땐 과장들의 전성기여서 주요 과장들은 대통령이 직접 부르기도 하고 국회에 나가 설명도 했다. 기획원, 재무부 외에 상공부의 오원철(吳源哲) 화학과장(나중 청와대 제2 경제수석 겸 중화학추진단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나중 경제부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개발연대의 큰 몫을 한다.
한일국교정상화 후 물밀듯이 외자가 들어올 땐 김형국(金馨國) 민간차관과장이 자주 불려갔다. 한일국교정상화 후 일본상업차관이 급증, 연간 6~7천만 달러에 달했고 68년엔 한해 1억 달러가 넘었다. 외자도입심의위가 끝나면 승인된 사업에 대해 담당과장이 기자실에 와서 브리핑을 했는데 이때 차관제공자로 미쓰이(三井), 미스비시(三菱), 이토추(伊藤忠), 스미토모(住友), 닛쇼이와이(日商岩井) 등의 이름이 많이 나왔다. 유태계 아이센버그(Eisenberg)나 정체가 애매한 파나마 UDI사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중엔 승인된 사업이 너무 많아 아예 프린트해서 배포했다. 롯데가 재산반입을 할 때는 일본인 시게미쓰(重光)와 한국인 신격호(辛格浩)씨의 합작 형식으로 들여왔는데 두 사람이 동일인이었다.
물가전쟁 땐 전응진(全應瑨) 물가과장이 자주 불려갔다. 순발력과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당시 가장 골칫거리인 쌀값 등 양곡정책을 관장하는 농림부 양정국장으로 승진해 나갔다가 기업으로 전신(轉身)했다. 이때 농림부 양정국장은 내무부 치안국장, 재무부 이재국장, 기획원 예산국장, 경협국장과 더불어 대한민국 5대 요직국장으로 꼽힐 때였다. 나중엔 상공부 상역국장이나 내무부 지방국장을 꼽기도 했다. 그 무렵 기획원 안팎에서 어느 어느 과장은 배짱 있고 유능하니 장관까지 갈 거고, 어느 어느 과장은 차관보쯤에서 끝날 거다, 사무관에선 어느 어느 사람이 출세할거다 라는 말들을 했다. 그 땐 관료들의 앞날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뒤 여러 격변의 세월을 지나다보니 큰 줄거리는 비슷하게 갔으나 더러 엉뚱한 일도 벌어졌다. 정치적 격변으로 사람의 운명이 바뀐 것인데 적극적이고 유능한 사람보다 모나지 않고 적이 없는 사람이 관운이 좋고 잘 올라갔다. 기획원에서 주요과장을 거쳐 국장까지 올라간 사람은 모두 유능한 사람이지만 더 올라가 장관, 부총리가 되는 팔자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부총리는 물가와 씨름하며 연탄파동 기사타박

장 부총리는 물가와 싸우면서 언론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방송의 위력을 일찍 알아 방송 뉴스를 많이 챙기고 특히 쌀값이나 연탄값이 잘못 나가면 꼭 전화를 걸 정도였다. 장 부총리는 일요일에 시장을 둘러보기를 잘했는데 방송기자에게 연락하여 같이 가기도 했다. 창고에 산더미같이 쌓인 쌀가마나 공장에서 줄줄이 생산되어 나오는 연탄이 TV 화면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안심을 하고 인플레 심리가 진정된다는 것이다. 당시는 쌀과 연탄의 품귀상태가 잦았기 때문에 소문 따라 사재기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연탄난이 극심할 땐 봉급자들이 퇴근길에 연탄 두 개를 새끼줄로 꿰어 들고 귀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66년 겨울엔 혹한이 닥쳐 연탄파동이 났다. 박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기획원에 대책본부(본부장 장 부총리)를 만들고 수습에 나섰다. 현황을 알아보고 석탄 수송을 독려하기 위해 관계부처 직원으로 구성된 대책반이 탄광지대와 소비도시에 긴급 파견되었다. 이들은 광산과 산지에 있는 석탄을 우선적으로 실어와 서울의 연탄공급량을 늘리고 연탄의 시외반출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서울시 경계선에서 연탄반출을 단속하니 이웃 경기도민들이 몰려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19공탄 한 장에 공정가격이 10원인데 시장에선 17~8원을 주고도 살 수 없었다. 신문에서 연탄부족 기사가 자주 나갔다. 연탄부족은 가수요를 부르고 그것이 연탄파동을 부채질했다. 이 때문에 연탄 대신 기름을 많이 쓰라는 정책이 나오고 응급책으로 일본제 석유난로를 대량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연탄파동 때문에 김현옥(金玄玉) 서울시장이 서울시에서 대규모 연탄공장을 지을 계획도 검토했다.
연탄부족 기사가 자주 나가자 장 부총리는 기획원 출입기자들에게 저탄장과 연탄공장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라고 했다. 당시 서울 연탄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이문동의 삼표(三票) 연탄공장에 갔는데 고속윤전기에서 연탄이 줄줄이 찍혀 나오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 공정가격으로 소형 트럭 한 대분씩의 연탄을 샀다. 그 연탄 트럭이 집으로 배달돼 오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얼마씩만 달라고 사정을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다음 기자 회견 때 연탄을 사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자 장 부총리는 “그것 보세요. 돈만 있으면 연탄은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기사도 그렇게 써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연탄사기는 계속 어려워 그런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
당시 장기영 부총리는 질풍노도처럼 일을 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장애물을 깨부수며 일을 밀어붙였다. 반대의견이나 소극적 회의론(懷疑論)은 싹 무시했다. 배짱도 좋고 신경도 굵었다. 기발한 착상이 안 먹히면 우격다짐도 서슴지 않았다. 임기응변이 강해 견강부회(牽强附會)도 잘했다. 물론 그 중에선 시대에 앞서가고 창조적인 것도 많았다. 회의 등을 통해 밀어붙일 때 이의를 달면 상식 없는 사람, 심지어는 매국노로까지 몰아붙이며 초지(初志)를 관철했다. 수력발전용 의암(衣岩)댐을 건설할 차관도입을 심의할 때 산은(産銀)에서 담보가 없어 곤란하다고 하자 “현지에 가 봤어요?” 하고 물었다. “가 봤는데 물 밖에 없더라”고 대답하자 “바로 그 물이 담보라” 하면서 통과시켰다. (계속)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한 후 1995년부터 10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필자는 1965년부터 71년까지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며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부총리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했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시절의 수기를 묵은 취재수첩과 관계기록, 신문스크랩 및 출입기자 시절의 보고 들은 내용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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