深泉이 紳商정신 전승하기까지

존경하는 ‘고대정신’ 선배
55년 한우물 유한 맨
深泉이 紳商정신 전승하기까지


글/ 제재형 언론인· 한국일보 社友회장

연만희(延萬熙) 회장은 자유·정의·진리를 숭상하는 고려대학 출신 유한(柳韓)맨이다. 아호는 심천(深泉), 1930년 10월 15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개성 송도(松都)중학을 거쳐 1949년 고려대학에 입학, 6.25 전란을 겪으면서 수학(修學) 6년만인 1955년 경제학사로 졸업했다. 국민은행 전신인 고려무진에 5년간 근무하다가 1961년 8월 유한양행(柳韓洋行)에 공채(公採)로 들어가 한눈팔지 않고 지금까지 55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유한사람’이 된 것이다.

배려와 화합의 깊은 샘의 덕장

▲ 경제풍월 창간 16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연만희 유한양행 고문

연 선배는 의학산업을 일으켜 국민의 질병을 퇴치하겠다는 신념으로 버들표 유한양행을 창업한 신상(紳商) 유일한(柳一韓) 박사를 만난 것이 최대의 행운이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회고한다. 심천(深泉)이란 아호가 말해주듯이 깊은 우물처럼 퍼낼수록 더욱 맑고 깨끗한 샘물을 쏟아내는 기업경영인(CEO)이다. 겸손히 머리 숙일 줄 알고, 남을 배려하여 곧잘 뒷줄에 서며, 말수가 적지만 험담보다는 덕담을 즐겨하며 항상 손해 보는 마음씨로 화합을 이뤄내는 젠틀맨(신사)이다. 온화한 성품의 덕장(德將)이요, 생활공동체의 피스메이커(화해자)이기도 하다.
심천은 유한양행의 밑바닥 사원에서 시작하여 차례차례 올라가 사장, 회장을 넘어 고문(顧問)에 추대된 저자세 경영자이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의 ‘창업정신에 충실한 모범생’답게 기업을 키워서 일자리를 넓히고 인재를 발굴·양성하며, 고객을 속이지 않고 좋은 제품을 공급함은 물론, 이중장부를 만들지 않고 정직하게 납세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업이윤은 최대한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일한 프린시플’을 구현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아 왔다. 그리하여 유한양행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비약하진 못했지만 ‘샐러리맨의 천국’이란 좋은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비콤C를 비롯한 모든 유한약품은 “믿고 사도 된다”는 트레이드마크를 창출해낸 것이다.

자기 PR 대신에 ‘유일한’ 이야기

심천 연 회장은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문, ‘5·9회’ 회장, 유한재단 고문과 숱한 명예직을 수행하면서 기독교(107년된 수표교회 권사) 신상생활에도 독실한 8학년6반생이다. ‘5·9회’란 故 정세영(鄭世永) 전 고대교우 회장이 1999년 9월 9일 첫 모임을 갖고 ‘영원한 고대사랑’을 누리자고 다짐한 친목회인데, 정세영 회장 시절 부회장·감사로 도왔던 스탭 19명이 구성원이다. 정 회장이 별세한 2005년 이후 ‘포니정’의 49학번 동기생인 심천이 회장직을 맡고 있다.
필자가 고려라이온스클럽 회장으로 봉사할 때 심천 선배는 재무회계로서 후배인 나를 정성껏 도와주셨고 그는 나중에 22대 회장을 역임하셨다.
심천 연만희 회장은 9988 100세 시대에 졸수(卒壽)를 바라보는 연세인데도 술·담배를 삼가는 절제생활로 양호한 건강상태를 누리고 있다.
“자기 PR를 좀 하시라”고 주문하면 서슴없이 ‘유일한 스토리’를 술술 풀어나간다. “지금 유한그룹에 창업자의 핏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1991년 향년 62세로 타계한 따님(유재라·柳載羅)도 별세하기 전 모든 재산(당시 250억, 현시세 900억 주식)을 유한재단에 몽땅 기부하고 빈손으로 가셨어요. 아들 유일선 변호사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귀가 뚫리는 나이’

지난 91년 3월 20일자 고려라이온스클럽 20년사에 심천이 환갑을 지났으니 “이제 겨우 귀가 뚫리는 나이”라고 말한 구절이 나온다. 논어의 ‘인생육십이 이순’(人生六十而 耳順)을 인용하여 “어떤 일이나 들으면 곧 이해가 되는 세대”라는 말이다. 바로 심천의 겸손 성품을 잘 나타낸 말이다.
당시 성공한 전문 경영인으로 환갑잔치를 차릴 수도 있었지만 부인과 단 둘이 가까운 곳에 다녀온 여행으로 잔치를 대신했다.
심천의 연배는 고단한 삶을 살아온 세대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춘추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님 못지않게 심천의 연배도 혼란의 시대를 살아왔다. 이 때문에 서로가 의지하고 참아내며 격동의 세월을 끈기와 생명력으로 견뎌오고 살아왔으니 존경하고 감사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심천은 개인적으로도 난관에 부딪힐 때는 같은 시대를 사는 주위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고비 고비를 넘기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감사한다.

은혜는 ‘모래 위의 낙서’ 아니다

인생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심천은 인생을 결정지은 큰 만남으로 유일한 박사를 꼽는다. 유한양행 근속 30년이 지날 무렵이지만 인생의 절반을 한곳에서 보냈기에 언어와 행동을 통한 ‘유일한 정신’이 자신을 이끈 사표(師表)로써 늘 나태와 안일을 경계토록 한다고 실토했다.
유일한 정신은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로 다시 되돌려줘야 한다는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정신으로 요약된다. 유 박사는 무엇보다도 남으로부터 입은 은혜는 한시도 잊지 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천은 민주화 물결 이후 윤리와 도덕을 아예 버려야 할 유산쯤으로 치부하는 일부가 나타나고 저마다 자기주장의 목소리는 높이면서 자기책임에 대한 의식은 너무 희박하다고 개탄한다. 이는 자신이 받은 도움이나 혜택을 ‘모래 위에 휘갈긴 낙서’처럼 쉬 잊어버리고 타인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나 불만은 ‘바위에 글자를 새기듯’ 뇌리에 담아 좀처럼 지우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심천은 제약경영 경험을 통해 능력제일, 합리추구 등의 명분으로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고도의 산업사회가 소박하고 훈훈한 인심을 해치고 서로가 인간 사이를 차단시켜 각박함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먼저 베풀고 보답하려는 풍토가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그 벽은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내다본다.
이 때문에 행여 인생의 후배가 묻는다면 조그마한 이익이나 순간의 편익에 연연하지 말고 양보와 희생, 봉사 등 자신이 조금 밑지는 듯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유한양행의 보수적 경영 내력

심천은 2001년 ‘고우경제’(高友經濟)와의 대담을 통해 버들표 유한양행과 유일한 박사에 관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당시 유한은 보수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편이었지만 기업비리나 정경유착 등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거의 유일한 기업으로 꼽혔다.
지난 60년대의 유한양행은 국내 법인세의 50분의 1(2%)을 납부한 큰 기업이지만 어느덧 대기업군에서 밀려난 중견기업으로 제약업계에서나 상위에 랭크될 뿐이었다. 심천이 입사할 당시에는 유한에 정기예금이 수억원에 달했는데 이것이 곧 유일한 박사의 보수적인 경영을 말해 준다는 설명이다.
유일한 박사가 8.15 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배경이 따로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박사가 유 박사에게 초대 상공부장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사양했더니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이야기다. 그 뒤 자유당 정권에 정치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아 검찰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때 조사관이 “고위층에 로비 좀 하시라”고 권유하여 5천만원을 헌납했다가 5.16 후에는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이 같은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을 체험한 후 “남의 돈(은행돈)을 쓰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사업은 자신의 능력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일관했다는 이야기다.
심천은 유한양행의 최장수 사원이자 경영인으로 유일한 박사의 기업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업은 이윤만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국가와 사회 속의 공동운명체라고 인식한다. 유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소유한 주식의 40%를 각종 공익단체에 기증했으며 사후에는 유언장을 통해 남은 재산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유한재단의 전신)에 기증했다.
유일한 정신의 계승자인 심천이 유한재단의 이사장직을 역임한 바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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