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일한 경영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연만희 유한 양행 고문.

혈기와 義氣의 외골성품
민족정신 태생의 반골
‘민족고대’ 학풍에 유일한사상 학습
사장·회장 역임 후 상근고문 특례

유한양행 최장수 근속기록의 연만희 고문은 1930년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독립투사와 민족정신을 호흡하여 성장했다. 평생 의기(義氣)의 투지와 외골 성품으로 일관한 삶도 출생고을과 집안의 내력과도 연관된다.
향리를 떠나 멀리 개성 송도중학을 나오고 고대에 진학하여 ‘민족고대’(民族高大)의 학풍을 배운 것도 그의 태생적 기질의 선택이었다. 또한 농구를 특기로 룰을 중시하는 스포츠정신도 고대를 지망한 한 가지 요소라고 믿어진다.

민족정신 고을 태생에 ‘민족고대’ 학풍 진학

여든이 넘은 고령이지만 연 고문의 고대정신은 참으로 유별나다. 선후배들의 안부를 깨알처럼 챙기며 잘 나가는 동문을 격려하고 입원해 있는 동문을 위로하는 것이 거의 일상이다. 한참 아래인 후배들에게도 늘 ‘아우님’으로 호칭한다.
세상 사람들이 약간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고대교우회, 해병대전우회, 호남향우회를 3대 ‘극성외골’이라 지칭해도 싫은 내색이 없다. 격동과 격변의 굴곡세월을 살아온 생애에 고대정신만큼 자신을 지켜준 지주가 더 있겠느냐는 말이다.
연 고문은 고대 경제과 동기 가운데 고인이 된 현대산업개발의 정세영(鄭世永) 회장, LG 창업인맥인 구두회(具斗會) 회장 등과 각별한 우정을 회고한다. 고인의 추모행사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다녀온 후 생전에 어려운 처지의 동문들을 이모저모로 보살펴 준 정을 끝없이 소개한다.
금융계에 큰 발자국을 기록한 박동희 전 중소기업은행장과도 동기로 어떤 어려움도 상의하면 발 벗고 나서는 우정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한다.
연 고문은 민족고대에서 배운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공선후사’(公先後私)정신을 필생의 교훈으로 삼아 왔다고 말한다. 또한 유한양행 입사 이후에는 유일한 박사로부터 정직(正直)과 신용(信用)을 배워 최장수 ‘유한맨’으로 살아오면서 ‘유일한 사상’의 계승자로 자부할 수 있는 것이 평생의 보람이라고 소개한다.

초급장교로 상급자 고발했다 영창구금

연만희 청년은 고대 경제과 2학년 때 6.25 전쟁을 만나 대학생 신분으로 입대했다. 서울이 수복됐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서울이 함락된 1950년 12월 1.4 후퇴 피난길에 소집영장을 받았다.

▲ 제1회 유재라 봉사상 시상식에서의 연만희 고문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유한양행>

전세가 다급하여 국민방위군을 대량으로 모집할 때 대열이 경남 밀양에 집결하자 “고3 이상은 손들고 나오라”고 지시하여 장교 요원으로 선발됐다. 실향민 대학생 신분에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보니 38선을 넘어온 민족정신에다 20대 초반의 혈기로 전쟁의 두려움도 잊었다.
당시 새파란 육군소위의 눈으로 보니 부대의 질서가 뒤죽박죽이었다. 군수과 선임 장교가 트럭에 쌀가마니를 싣고 나가 팔아먹는 꼴을 보니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즉각 초급장교 112명의 연명을 받아 상부에 보고하고 엄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거꾸로 연 소위를 군기문란과 상관에 대한 불복이라는 죄목으로 영창에 구금했다.
연대장이 곰곰 생각하다 1주일 만에 석방하니 결국 젊은 혈기의 정의감의 승리였다. 이 무렵 임관 동기로는 국내 최대 운송그룹을 창업하여 무사고 무분규를 기록하고 있는 허명회(許明會) KD운송그룹 회장이 당시를 증언해 준다.
그로부터 연 소위는 숱한 고비를 거쳐 전투에 참가한 무공으로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전역함으로써 6.25 참전 국가유공자가 됐다.
그 뒤 대학에 복교하여 4년 졸업 후에는 신생 고려무진(高麗無盡)에 입사했으니 전공을 살린 진로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일자리가 바늘구멍이던 시절 첫 직장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퇴사하고 말았다. 전쟁 중에도 상급자의 비행을 고발했다가 영창에 갇혔던 전력이 되살아 난 셈이었다. 갓 출범한 무진회사의 ‘혈족경영’ 행태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깔이 다시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사상’ 학습으로 고속성장

잠시 실직상태로 방황하던 시기에 유한양행에서 ‘미스터 연’이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국에서 돌아온 유일한 박사가 금융회사에 다녀 경리업무에 밝은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면담하고 싶다고 했다.
1961년 유한양행에 입사하고 보니 창업주의 뜻에 따라 기업공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증권시장이 제대로 개설되지 못한 초창기였다. 입사 얼마 뒤 총무과장으로 발탁되어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상장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나니 차장, 부장으로 승진코스가 열렸다.
미국식 경영마인드의 유일한 박사가 종종 보고를 받을 때마다 ‘미스터 연’이라 호칭하며 어깨를 두드려 준 격려가 곧 ‘유일한 사상’의 학습과정이었다. 이로부터 1969년 상무, 1976년 전무이사로 승진했으니 능력이 평가됐다 해도 고속 성장으로 비쳤다.
1971년 창업주가 별세한 이후 유한양행은 후임사장을 사원대표로 공식 호칭했다. 이 무렵 연 고문은 1982년에는 미국계 제약사와 합작한 유한스미스크라인 대표이사를 맡아 방제회사로 밀려난 모양새였다. 그러나 1986년 창업주의 딸 유재라 여사의 뜻에 따라 친정으로 복귀하여 부사장을 맡았다가 곧이어 사장과 회장으로 장기 연임함으로써 최장수 유한맨의 일생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재라 씨는 “아버님의 경영이념을 가장 잘 학습하셨으니 복귀하시면 지하에 계시는 아버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라며 당부했다고 하니 유가족 측에서도 창업주의 경영이념을 승계할 사원대표로 연 고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 회장 시절 창업이념을 제도화

1988년 연만희 사장의 취임은 27년 만의 최고경영자로 창업주로부터 직접 제약사업의 목적과 이념을 전수받아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연 사장의 6년 경영은 사원대표에 의한 유한인들의 총화가 약동하여 신약개발과 판매촉진으로 매출이 늘고 이익률도 향상됐다.

▲ 제10회 대한민국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선정된 유한양행 연만희 고문. <사진=유한양행>

연 사장은 취임 첫해부터 매년 구호를 바꿔가며 ‘총력 새 유한’, ‘도약 유한’, ‘전진 유한’, ‘혁신 유한’, ‘총화약진 유한’ 등의 행동강령을 앞세워 총화의 시너지를 창출했다.
또 종업원이 주인된 제약회사로 ‘노노협의회’, ‘사원운영위원회’, ‘영업협의회’, ‘간부회의’ 등 각종 사내 소통기구를 가동시켜 애사심으로 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
고위직의 ‘직급 정년제’를 도입하여 사원대표 자리의 정체와 나태를 방지한 것도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가령 상무이사로 승진하여 6년 연임 후 더 이상 승진기회를 잡지 못하면 1급 사원으로 직위를 낮추는 방식이었다. 사장직의 경우도 한 차례 연임하면 후진을 위해 물러나도록 규정했다.
이처럼 창업주 혈통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사원회사의 첫 인사모델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창업주의 경영이념을 승계했다는 정통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연 사장이 임기를 마치고 회장으로 승진한 것도 일종의 특례에 속한다. 또 회장임기를 끝내고도 다시 유한재단 이사장을 맡고 지금껏 상임고문으로 사원회사의 상징적인 병풍역을 맡고 있는 것도 유일하다. 이 같은 특례가 모두 오너가 있어 지명된 경우가 아니고 후진들의 뜻이 모아진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창업주의 혈맥은 모두 미국에…

오늘의 유한양생에서 창업주 혈맥은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유일한 박사 생존 시에 잠시 불러들였던 외아들 유일선(柳逸善) 씨는 미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 씨는 1966년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여 한때 부사장직을 맡았지만 선친의 경영은퇴 직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창업주의 동생 유명한(柳明韓) 사장과 유특한(柳特韓) 사장이 2대와 6대 사장을 맡았지만 임기를 마친 후 완전 퇴사하고 후계를 남기지 않았다. 유 박사의 유언장에 의해 ‘유한동산’을 맡았던 딸 유재라(柳載羅) 씨도 남은 재산을 몽땅 사회로 환원한 후 ‘유재라봉사상’만 남기고 별세했다. 손녀 유일정 씨는 유 박사가 별세할 때 겨우 7살로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받아 지금도 50대의 중년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럴 때 유한양행과 창업주의 기업정신을 취재하자면 연만희 고문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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