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포로 2세의 초등학교시절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추억
반공포로 2세의 초등학교시절


글/ 金大成 (김대성 평택거주, 45세)

▲ 1970년대 새마을운동 모습. <사진=새마을운동 홍보관 사이트 동영상 캡쳐>

초등학교 시절 새마을운동에 동원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김대성(金大成) 씨가 깨알 같은 글씨로 장문의 ‘새마을운동의 추억’을 보내왔다. 김 씨는 반공포로의 외아들로 가난하게 자라 열심히 생활하다 교통사고로 장애를 겪고 있으면서도 반공과 애국충정을 대물림 받아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새마을운동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한다. (편집자)

지붕개량, 마을길 넓히기 추억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아침저녁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
지붕개량 사업이 특히 가슴에 닿는다.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어연 1리 마을엔 70년대 중반까지 초가지붕이었다가 새마을운동으로 기와나 스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됐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120여 가구 마을이 모두 지붕개량으로 바꿨지만 우리 집만 초가집 그대로 남아있었다. 더러 2층집도 들어섰다.
반공포로 출신인 아버님은 오랜 병환 중이고 누나도 장애를 겪고 있었다. 1990년 11월 이사할 때까지 초가집에 홀로 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을길을 넓히고 콘크리트로 포장한 새마을운동은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구불구불한 비포장 좁은 도로에 비가 오면 질퍽해져 신발과 바지가 흙탕물 신세를 지다가 1970년 말경 길을 넓히고 콘크리트 포장하니 실로 새마을이 되었다.
마을길 포장 공사 때는 이장 댁에서 마을방송을 통해 “한분도 빠짐없이 참가해 달라”고 독촉하니 몸이 불편한 부모님도 삽과 곡괭이를 들고 공사에 참가했었다.
마을길이 포장되자 싸리나무로 엮은 담장이 없어지고 콘크리트로 바뀌고 담장 꼭대기에는 도둑을 막기 위해 가시철조망이 씌워졌다.

퇴비증산왕 경쟁, 새끼꼬기 등

▲ 새마을운동 지붕개량 사업. <사진=새마을운동 홍보관 사이트 동영상 캡쳐>

학교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퇴비증산 운동의 일환으로 풀을 베어오라고 지시하여 교내 두엄장에 쌓아 썩혔다가 학교 농장에 거름으로 이용했다.
마을에서는 퇴비증산왕 경쟁이 벌어져 이웃 박씨네, 정씨네, 최씨네 세 집이 다투었다. 풀을 베어 오기 위해 경운기와 소달구지를 동원하여 어느 집이 퇴비증산왕에 뽑힐까 관심이었는데 끝내 박씨네가 청북면에서 최고 기록을 세웠다.
농가 소득증대 사업의 하나로 짚 새끼를 꼬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이웃 최씨네가 새끼기계를 도입하여 구경거리가 되어 놀러 갔다가 잡일을 도와주면 과자나 요구르트를 나눠 주어 맛있게 먹었다.
집집마다 양계와 토끼사육도 인기였다. 외삼촌댁도 앙골라 토끼를 길러 털을 깎아 시장에 팔아 재미를 봤다. 곧이어 젖소 사육 등도 번져 새마을운동이 농촌 소득증대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이 무렵 어머니와 외숙모님은 머리를 길렀다가 잘라 신문지에 싸서 가발공장에 파는 것이 유일한 새마을 사업이었다. 초등학교 잡역 일을 맡고 있던 김씨 아저씨 부인은 재봉 솜씨가 좋아 체육복이나 운동회에 입고 나갈 마스게임 복 등으로 돈을 벌었다고 들었다. 김씨 부부는 지금 아흔을 바라보는 성공한 새마을 운동가로 꼽힌다.

송충이잡기, 쥐잡기, 벼이삭줍기 운동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지도하에 송충이 잡기운동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산림녹화 후

▲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 <사진=새마을운동 홍보관 사이트 동영상 캡쳐>

에 송충이가 번식하자 학교에서는 1인당 20마리씩 송충이를 잡아 오도록 숙제를 냈다.
유실수 심기운동도 소득증대 사업의 일환으로 권장되어 곳곳에 밤나무 등을 많이 심었다.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라 보리 혼식을 권장하면서 쥐잡기 운동을 벌여 흑백TV에서 ‘내일은 쥐 잡는 날’이라고 방송했다. 그렇지만 우리 집에는 TV가 없어 나중에 귀동냥으로 들었다.
가을 추수기에는 벼이삭 줍기 운동도 있었다. 전교생에게 1인당 편지봉투 1개 이상씩 이삭을 주워오도록 하여 실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는 ‘선행상’을 주었다. 잔디씨를 모아 오라는 숙제도 주어졌다. 잔디씨를 어디에 사용할까 궁금했지만 학교에서 지시하니 열심히 뜯어 모았었다.
당시 마을 청년들은 4H 클럽을 조직하여 지(知) 덕(德) 노(勞) 체(體) 활동으로 새마을운동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978년에는 청년회가 마을 도서관을 설치하여 영농교육을 지원하기도 했다.

▲ 반공포로 고 김명근씨의아들 김대성 씨.

마을 대청소도 연 3~4회씩 공동 작업으로 시행됐다. 새마을운동으로 달라진 마을모습이 대청소를 통해 말끔해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그 시절 새마을운동을 추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TV를 지켜보니 박근혜 대통령이 UN 외교무대에 나가 반기문 사무총장과 함께 한국형 새마을 운동을 개도국으로 전파하는 세계화 프로그램을 펼쳐보였다. 필자는 반공포로의 아들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새마을운동이 조국 근대화의 동력으로 국가발전에 공헌한 사실에 너무나 감명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 체험했던 새마을운동에 관한 추억을 밤새워 기록해 보았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5호 (2015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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