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소득증대, 농특사업서 발상

▲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들의 가난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모내기 를 하고 있는 박 대통령

[새마을과 박정희 대통령]


가난추방 눈물의 결정
농어촌소득증대, 농특사업서 발상
자발적 근면· 협동 동기유발로 성공


글/고병우 전 건설부장관(당시 농림부 농업개발과장, 농업개발국장)

새마을운동의 세계화가 추진되고 있을 때 새마을운동의 발상과 정책선포 과정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 나왔다. 고병우(高炳佑) 전 건설부장관이 농림부 농업개발과장, 농업개발국장 시절 겪은 새마을운동 관련 정책입안 및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보고과정을 자세히 증언한다. 고 전 장관은 지난 9월 1일,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선진화포럼 10주년 기념 대토론회에서 좌승희 교수의 ‘새마을운동의 학문적 연구’ 발표에 따른 토론의 요지를 메모 형식으로 경제풍월에 제공했다. (편집자)

農工倂進(농공병진) 정책과 농어촌개발공사

박정희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을 확인한 1967년도 연두교서에서 농

▲ 경기도 가평군 개곡리 새마을사업 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공병진(農工倂進) 정책을 선언했다. 이때 농어민소득 증대를 위해 농촌형 공장을 많이 짓자면 농어촌개발공사 설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새로운 기구설립에 관해 주무부처는 물론 농·수협과 학계의 반대가 많았다. 이에 박 대통령은 장관을 경질하면서 이를 추진할 의지를 표명하여 당시 필자는 실무과장으로 농어촌개발공사 설립안을 작성, 후임 장관의 결재를 받아 1968년 2월에 발족시켰다.
공사 설립 후 새마을공장과 농어민들을 연결시켜주는 사업으로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계획’을 기안하여 김영준(金榮俊) 장관에게 보고한 후 다음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대통령은 농어민들의 가난에 대한 한(恨)을 절감하여 즉석에서 소득증대 방안의 실천적 과제를 지시했다.

▲ 박정희 대통령이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하사용씨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첫째, 농림부 단독으로 농어민 소득증대 방안을 추진할 경우 사업규모가 적을 수밖에 없으니 내무부, 보사부, 경제기획원 등을 망라하여 사업계획을 확대하고 부처 간 지원협의회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지원협의회 의장은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를 지명했다.
둘째, 사업계획이 전적으로 정부의 지원사업만으로 계획되어 있으니 농어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농어민들도 다소나마 자기 돈이 들어가야 더욱 열심히 하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20% 가량을 자기부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자기부담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가족 노동력’을 평가하여 자기부담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대통령의 지시가 농특사업의 성공요인이자 그 후 새마을사업의 기초정신이다.
셋째, 선정되는 작물은 바로 시장에 나가면 팔릴 수 있도록 판로를 확실히 챙겨야 한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잠업, 양송이, 젖소, 비육우, 후지사과, 제주도의 키 작은 감귤 등 ‘현금작목’ 32개가 선정됐다. 이들 많은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성공을 거둔 사업이 비닐하우스 사업이다.
요즘 도시 근교에 나가면 즐비한 비닐하우스가 1968년까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때 일본 농촌의 비닐하우스 재배를 보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이를 보급했다고 자부한다.

머슴살이 7년 성공담에 대통령의 눈물

농특사업은 1968년 4월부터 착수하여 1년 뒤 1969년부터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농특사업

▲ 경기도 이천 중포리 갯마을 새마을사업 모습 (1972년)

성공사례 경진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충북 청원군의 하사용(河四容) 씨가 7년간 머슴살이로 매년 받은 새경을 모아 불모지 땅 200평을 매입하여 비닐하우스 영농으로 겨울철에 상추와 토마토 등 신선 야채류를 팔아 큰돈을 벌었다는 성공사례 발표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하 씨의 성공담 발표에 감동하여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준비해온 치사문을 제쳐놓고 즉석연설로 “하사용 씨와 같이 저토록 가난한 농민도 열심히 하니까 성공하지 않았습니까”라며 “우리 모두 해 봅시다”라고 제창했다. 이 말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CAN DO SPRIT’이다.
농특사업 초기에는 가난한 농어민들에게 희망이나 열정이 없어 참여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 군수들이 농촌 사랑방을 찾아 농민들의 일손을 끌어내고 성공사례 발표를 들은 다음에는 참여하겠다는 농민이 늘어 다음해부터 사업규모가 대폭 확대됐다.
농특사업을 추진하던 3년 기간 동안 박 대통령은 매월 두 번째 주 토요일 하오 2시부터 4시까지 청와대 별실에서 추진실적을 보고 받고 격려했다.
보고회는 주무 장관이 배석하기도 했지만 주무 과장과 국장이 대통령께 단독 보고한 경우도 있었다. 이때 대통령은 농어촌의 동향에 관해 많은 것을 질문했지만 단 한 번도 명령식으로 지시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보고 때는 “고 국장, 이제 농촌이 좀 움직이는 것 같소?”라고 물어 “농특사업지구 농민들이 즐겁게 일 하십니다”라고 보고하자 대통령은 너무나 흐뭇한 표정으로 즐거워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새마을운동이란 용어는 없었다.

시멘트 재고처리와 새마을가꾸기사업

1970년 말경 대한양회협회 김성곤(金成坤) 회장이 박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시멘트 재고가 넘쳐 업계가 도산할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박 대통령이 김현옥(金玄玉) 내무부 장관에게 남아도는 시멘트를 내무부가 구입하여 농어촌에 지원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 1970년대 강원도 양양군 선양면의 말끔한 모습. 초가지붕이 없어지고 스레트지붕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실제로 내무부가 시멘트를 대량 구매하여 전국 3만4,000개 자연부락에 골고루 나눠 주면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당시 새마을사업은 마을길 넓히기, 교량건설, 공동 빨래터, 우물개량 등 10개 시범사업을 예시했지만 구체적인 지시 없이 시멘트 200포대와 철근 0.5톤씩 분배했다.
그 뒤 농한기(農閑期)가 지나 내각 기획조정실 소속 평가교수단 50명에게 시멘트 사용성과 평가를 부탁했더니 “내무부가 대통령으로부터 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전국 3만4,000개 마을 가운데 1만8,000개 마을은 마을길 넓히기, 다리 놓기, 우물개량 등으로 새마을을 꾸몄지만 나머지 1만6,000개 마을은 시멘트와 철근을 부락민들이 나눠가져 집안 아궁이나 고치고 마을 공동사업 성과는 별로 없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1만8,000개 마을이 잘 했으니 다음번에는 자조(自助)하는 마을에만 추가로 지원토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1만8,000개 자조마을과 추가지원을 받아 자립한 마을들은 부촌(富村)으로 탈바꿈했다. 반면에 시멘트를 나눠가진 마을들은 내부다툼을 겪은 다음 새마을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자조마을로 올라서기도 했다.
농어민 소득증대 사업이나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나 마을 지도자가 성패를 좌우했다. 나이가 들어 경륜이 쌓인 이장이나 제대군인이 마을 지도자를 맡은 경우 새마을사업이 잘 추진됐다. 이들 새마을 지도자들은 서삼릉에 있는 농협교육원에 2주일간 입소, 영농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박 대통령은 이 농협교육원 과정에 몰래 뒷자리에 참석하여 전 과정을 들은 후 원장에게 보완점을 지시했다.
그 뒤 수원 신갈에 새마을연수원을 짓고 김준(金準) 씨를 연수원장으로 지명했다.

빈곤퇴치 영웅이 남긴 ‘대통령의 메모’

농특사업은 1968년부터 4년 계획으로 추진되어 농어촌 가구당 평균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의 70% 수준에서 계획기간이 끝난 뒤에는 120%로 높아졌다.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성과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임자, 다른 나라에도 이 같은 농촌발전 운동을 하는 나라가 있느냐”고 물어 덴마크 등의 사례를 보고했다.
“덴마크에는 ‘그룬트비’라는 지도자가 노래를 부르며 청소년들을 이끌어 세계 제1의 낙농국가를 만들었고 이스라엘은 ‘모샤브 기브쓰’를 만들어 모래밖에 없는 나라에 흙을 외국에서 사다 심어 부유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 패전 후의 일본도 ‘아타라시이 무라쓰쿠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고 왔습니다.”
이때 박 대통령은 “일본도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구나”라고 말씀했다.
제3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72년 초, 박 대통령은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同)의 새마을운동 내용을 A4용지 12매에 요약 정리한 ‘대통령의 메모’를 남겼다. 이를 1972년 4월 22일,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새마을운동 선포식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4월 22일을 ‘새마을 날’로 제정한 것이 바로 이날 새마을운동 선포식을 기념하려는 의미다.
‘대통령의 메모’에는 새마을운동이 점화되어 “이제는 농촌이고 도시고, 기업이고 전 국민이 새마을정신으로 협동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명령이나 행정지도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부락 단위의 자유의사에 따라 스스로 하는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로부터 농촌에서 도시로, 공장에서 학교로 새마을운동이 확산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새마을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새마을운동의 매개체라면 유일하게 새마을중앙연수원에서 각급 지도자들을 1주일씩 입소 연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반드시 소득증대와 직결되어야만 영속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새마을사업의 추진과정에서 정책 실무자로서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박 대통령이야말로 빈곤을 퇴치하고 후진국을 근대화시킨 이론과 지도력을 겸비한 시대적 영웅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세계의 가난한 나라로 새마을확산바람

앞으로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발전해 갈 수 있을까. 필자는 세계만방의 가난한 나라를 찾아가는 새마을운동의 세계화가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재무부 재정차관보 시절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재무부 장관이 방문하여 새마을운동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내무부의 추천을 받아 서울 근교에 있는 우수 새마을로 안내하여 부락민이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마을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사업을 선정함으로써 서로 협동하면 잘 사는 마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새마을 精神’

이 과정에 관이 개입하여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마하티르 장관은 귀국 후 ‘Look East Policy’를 제창하더니 수상이 되어 말레이시아를 크게 발전시켰다.
중국의 덩샤오핑 지도자도 김정렴(金正濂)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두 번이나 초청하여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새마을운동에 관해 특강했다. 그 뒤 중국은 공무원들을 한국에 보내 새마을교육을 받게 했으며 지금도 지방행정공무원 연수원에 중국 공무원들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 베트남, 몽골 등 동남아 각국과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 지도자들도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가 주최한 Asian Leadership Conference에 참가한 콜럼비아대 제프리 삭스 교수가 “나는 아프리카에 가서 KOICA 요원들과 함께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효과가 좋아 앞으로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청년실업이 문제이고 일자리 창출이 정책과제이지만 세계 곳곳에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만 좋은 일자리인가. 외국인들은 방한하여 1개월간이나 새마을교육을 받고 귀국하지만 한국의 청년들은 1주일 연수만으로 글로벌 새마을운동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에 관해 국내 지도자들이나 언론은 사실 확인 없이 선동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니 ‘거짓말 안하기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김준 전 새마을연수원장은 새마을정신을 농심(農心)으로 정의하여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거짓 없는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5호 (2015년 11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