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세 윤경호씨, 장사상륙작전 회고

▲ 윤경호 씨는 중학교 3학년 미성년자로 학도병에 자원, 동해안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유격대·남파간첩·국군복귀
16세 학도병의 절규
81세 윤경호씨, 장사상륙작전 회고
생존 ‘학생유격병’ 31명함께 울부짖다

한국사 교과서 이념편향 논란이 국론분열을 가져오고 있을 때 6.25 참전 ‘16세 학도병의 절규’가 우리네 귓전을 울리며 같은 시기를 살았던 세대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16세 학도병 유경호 씨는 이미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한국사 교과서가 6.25 전쟁에 관해 남북 양측이 책임이 있는 것처럼 왜곡 서술한 대목에 관해 분노를 이길 수 없다.

65년전 유격동지 생존자 31명

▲ 윤경호씨의 참전기 ‘16세 학도병의 절규’

1934년 경북 최서남단 가야산 앞, 낙동강 수변 고령읍에서 태어난 윤경호 씨는 중학교 3학년 미성년자로 학도병에 자원, 동해안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용사로 사선(死線)을 수없이 넘어온 파란만장한 참전기를 전후세대에게 6.25 전쟁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구술로 집필했다.
이 참전기는 ‘장사상륙참전 유격동지회’(회장 류병추)가 2008년 초판을 발행한 후 금년 8월 증보판으로 다시 출간했다.
경북 영덕군 장사리 해안 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하루전날, 양동작전으로 나이 어린 학도병들을 유격대로 출전시켰다. 영덕군 장사리 해안에는 장사상륙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충혼비가 세워져 매년 추모제가 열리고 당시 학도병들을 싣고 와 좌초됐던 LST 문산호는 모형으로 건조되어 전시되어 있다.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는 1980년에 결성되었으나 지금은 16세 학도병 윤경호 씨 등 겨우 31명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저자는 무명의 학도병을 거쳐 육군에 편성되어 3년 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19세에 제대했다. 그 뒤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방공무원 행정직 15년 근속 후 자영업, 농업으로 노후를 보내면서 고령군 상이군경 지회장을 맡고 있다.

10대 학도병으로 제1유격대 출정

저자 윤 씨는 6.25 발발 석 달 만에 대구 피난지에서 마을 친구와 함께 대구역 학도병 모집소에 지원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병관이 돌려보내려하자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고 우겨 허락을 받았다. 지원생들은 16세에서 18세까지 전국에서 몰려든 학도병들이었다.
당시 팔공산에 침투한 인민군들의 포탄이 대구 칠성동에 떨어져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진 시기였지만 지원 학도병들은 방학 중인 여학생들의 태극깃발 환영을 받으며 화물기차 편으로 출정했다. 기차가 밀양역에 도착하여 농협창고에서 숙식하며 부대가 편성됐다.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로 폭염 속에 맨손으로 기초 군사훈련 받고 다시 기차 편으로 부산진역에 도착하여 육군본부 청사 광장에서 10여일 훈련을 받았다. 인민군 복장에 노획한 소련제 총기류를 메고 정일권 참모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유격대 출정식을 가졌다. 출정에 앞서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잘라 봉투 속에 담아 보관한 후 부산 4부두를 통해 동해로 출발했다.

LST 좌초속 상륙작전 감행 피해막심

▲ 1950년 비운의 전차상륙함 '문산호'-USS LST120.(1950.09)

난생 처음 보는 2700톤 급 LST 문산호가 망망대해로 접어들자 파도가 치고 멀미와 구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소대장한테 물어봐도 어디로 출정하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참 만에 소대장으로부터 상륙지시가 내려졌다. 때마침 태풍 케인지호로 LST가 뒤집힐 지경인데 장사리 해변 고지로부터 인민군 기관총 사격이 날라 오고 LST가 모래밭에 좌초하고 말았다.
이때 갑판문이 열리고 1중대 1소대원들이 바다로 뛰어 들었지만 순식간에 수장된 모습이었다. 미군 선원 한 명이 몸에 밧줄을 메고 헤엄쳐 모래밭 건너 소나무에 동여매자 후속 대원들이 뛰어들었다. 소련제 장총에 실탄 100여발과 수류탄으로 무장하여 밧줄에 생명을 걸고 상륙해야만 했다. 그사이 인민군들이 후퇴했는지 전면 200고지의 기관총 소리가 멎었다.
유격대원들이 국도의 교량을 파괴하고 물자수송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후속 보급도 없이 3일 작전이 종료됐지만 LST의 좌초로 퇴로가 막혀 진퇴양난이었다. 미군 헬기가 날아와 생존 유격대원들이 부산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나중에 기록을 보니 상륙작전 전사자 139명, 부상자 92명에 행방불명도 다수였다.

인민군 패잔병 추격중 중공군에 포로

윤경호 학병 등은 김해로 이동한 다음날 추석을 보내고 영천으로 이동하라는 명을 받고 대구를 거쳐 경북 내륙지방으로 인민군 패잔병을 추격하여 경기 북부와 강원도 일대 소탕전에 나섰다. 이 무렵 육본 직할부대인데도 차량 지원이나 보급이 없어 도보행군에다가 민가에 들러 허기를 메웠다.
양평에 이르러 강변에 쌓인 군경가족들의 처참한 피살현장을 목격하고 적군들의 시신도 수없이 보았다. 포천을 지나 가평군의 화악산 중턱에 포진하고 추위와 허기와 싸우면서 중공군 방어전을 펴고 있다가 포위작전에 걸려 부대가 분산하고 말았다. 장교와 사병 구분 없이 목욕 이발도 하지 못한 몰골에 중공군 포로 신세로 임시수용소로 끌려 다니다가 인민군에게 인계됐다.
인민군 군관이 소원서를 쓰면 남조선으로 돌려 보내준다고 했지만 포로신세 60여일 만에 모두 인민군에 강제 입대했다. 인민군 전사 견장에 군인증이라는 빨간 수첩을 받고 인민군 12사단 예비연대로 편입됐다. ‘해방전사’라는 이름으로 평양까지 이동하고 보니 윤경호 전사는 어느새 ‘불순분자’로 분류되어 파송소에 입소했다.
사회안전성 심사를 받을 때 윤 전사는 부친은 공무원, 형은 조합근무, 자신은 중학교 3년생으로 학도병에 자원했다고 있는 그대로 답변했다. 바로 ‘불순분자’ 성분임을 스스로 고백한 꼴이다. 인민군 군관이 “강제징집이 아니고 자원 학도병이라고 솔직하게 답변하느냐”며 오히려 칭찬했다.

간첩교육 받고 까칠봉 미군에 귀순

이 때문인지 평양 대동강 안 중다리로 안내되어 어느 기와집에 묵었다. 여맹위원장 한경숙 씨 집으로 남편은 대학교수에다 인민군 중좌로 중국에 가고 없었다. 평양시가 구경을 시켜주고 냉면 맛도 보여주더니 소감문을 쓰라고 해서 무엇이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썼다.
사회안전성 제8부 부장(준장) 최종 심사에서 합격 판정을 받아 간첩교육을 받았다. 그 뒤 인솔자 대위가 한 명 따라 붙고 군복과 특무장 계급을 부여한 후 남파 됐다가 재입북시 사용할 암호도 받았다. 인솔자와 함께 원산을 거쳐 인민군 제2군 사령부가 위치한 금강산 유점사에 들렀다가 사단·연대를 거쳐 대대 전초기지에 도착하여 침투로를 결정했다.
북한강을 건너는 코스를 포기하고 까칠봉을 마주보는 김일성 고지를 통해 미군부대로 접근키로 했다. 안내자가 미군을 만나면 ‘할로할로’라 부른 뒤 “나는 남한군인이다”(I am south Army)라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실제로 미군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놀다가 금방 기관총을 잡더니 ‘남한군인’이란 말을 듣고 ‘오케이’하며 손짓하더니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곧이어 일본인 2세 통역관을 데려와 ‘스파이’라는 말에 포로로 분류하여 영등포 포로수용소로 넘어 갔다가 대구지구 특무대의 심사를 받았다. 대구 경찰서 맞은 편 2층 건물에 있는 특무대 심사관은 노련한 형사출신으로 솔직한 대답을 이모저모로 심사한 후 간첩죄로 고등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군법회의에서는 그동안의 진술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강조하자 ‘원대복귀명령’으로 판결했다.

지금껏 전우들의 울부짖음이 귓전에…

▲ 생존한 30여명의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 대원들과 함께…

윤 중사로 복귀명령을 받아 대구 보충대로 이송됐다가 수도사단 기갑연대 1대대 4중대로 배치됐다. 중대라야 장교 1명에 지나지 않는 부대로 적과의 연일 박격포전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윤 중사도 박격포탄 화상으로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제15육군병원, 부산 보충대를 거쳐 육본 고급 부관실로 파견됐다. 중학교 3년생에다 글씨를 잘 쓴다고 육본으로 배치된 것이다.
1953년 10월 일제 신체검사시 윤 중사는 병종으로 판정되어 대구 제1육군병원 입원 두 달 만에 명예 재대했다. 16세에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3년 4개월이 지나 19세로 제대했으니 온갖 고비와 곡절을 다 겪은 학도병의 절규가 오죽 하겠는가.
올해로 여든한 살의 윤 학도병은 천운으로 살아 겨우 30여명의 장사상륙 유격대원들과 함께 그때 그 절박했던 순간들을 회고하지만 장사해변 모래톱과 바다 속에 수장된 수많은 전우들과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통탄한다.
그사이 나라가 발전하여 경제대국이 되어 북한 공산집단에 비해 월등한 국력을 자랑하면서도 미귀환 국군 포로들을 그냥 두고 있으니 말이 되느냐고 한탄한다. 더구나 최근의 한국사 교과서 논란을 보고 듣고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촛불을 켜들고 거리에 나선 투사들을 보며 “나라가 있고 나서 민주화가 있지 않느냐”고 울부짖는다.
16세 소년이 여든에 이르러 절규하는 이 목소리가 우리네에게는 서울 동작동과 대전 국립현충원에 잠들고 있는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호소와 절규로 들린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6호 (2015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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