魚世謙(어세겸), 世恭(세공) 동방급제 기록

[이코노미톡뉴스=최종인 칼럼] 조선왕조 초기에 몰아쳤던 정치적 격변사태는 태종의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세종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질서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갔다. 안으로는 국가의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사회기강이 잡혀가면서 민생이 개선되었으며, 밖으로는 대마도정벌을 계기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이 거의 사그라졌다. 바야흐로 새로운 왕조, 조선은 국가 흥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국력이 신장되고 문화가 융성할 때는 출중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 마련이 듯, 세종에서 성종연간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기라성같이 등장하여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다. 특히 불교사상이 퇴조를 이루고 유교의 성리학 사상이 조선사회를 지배하면서 배불숭유정책을 강력히 주창하여 풍속을 순화하고 민심을 교화하기 위해 풍수설과 무속신앙을 강력히 규제하는 정책을 펴고, 국방과 외교에 국가적 위신을 지켜내기 위해 활약을 한 인물이 조(祖)·부(父)·손(孫) 삼대에 걸쳐 배출된 가문이 있으니 바로 함종어씨 문중이다.

▲ 면곡 어변갑 유묵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문집, 함종세고

대체로 문집은 한 개인의 시문(詩文) · 문장(文章) · 소(疏) 등을 정리하여 후손이나 후학들이 선현의 업적을 남기고자 묶어 내는 책이다. 대표적인 문집으로는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인물들로서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 이숭인의 도은집, 정도전의 삼봉집, 권근의 양촌집, 성석린의 독곡집 등을 예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문중의 특출한 몇 인물을 선정하여 그 분들의 기록물을 함께 묶는 일은 그리 흔치가 않다. 함종세고(咸從世稿)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조선 전기 인물인 어변갑(魚變甲), 어효첨(魚孝瞻), 어세겸(魚世謙)으로 이어지는 함종어씨 삼세(三世)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문학적 업적을 정리하여 외손인 경상도 관찰사 윤금손(尹金孫)이 문집을 펴낸 것이다.
면곡(綿谷) 어변갑은 춘추관기주관으로서 태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으며 대부분의 문신들이 그러하듯 사간원과 집현전 등의 여러 직책을 거쳤으나, 그의 업적은 두 개의 글에서 단연 돋보인다. 대마도 정벌의 당위성을 역설한 교서와 숭유억불의 국가이념화를 위한 주장이 담긴 내용이다.
첫째로, 흔히들 당나라에서 문명을 날렸던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아는 사람들은 많으나, 어변갑이 지은「征對馬島 敎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軍民等書(정대마도 교중외대소신료한량기로군민등서)」라는 격문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역사상 드문 해외정벌 중 하나로 세종 때 이종무장군의 대마도정벌 당시 국론을 모으기 위해 반포한 교서가 바로 이 글이다. 전쟁을 위해서는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이 합심해야 하므로 대마도는 원래 우리 땅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하여 왜구의 노략질에 의한 폐해를 적시하고 정벌의 명분을 역설한 격문(檄文)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징표를 지금 시대에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숭유억불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기는 하였으나 세종시대만 해도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미련과 왕실조차 궁궐 내에 불당을 짓는 등 불교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어변갑은 「벽불소(闢佛疏)」를 지어 올려 유교윤리를 정치이념화 하도록 지도층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였다.
구천(龜川) 어효첨은 아버지에 이어 태종8년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조정에 발탁된 후, 뛰어난 학문과 높은 지조로 당대의 존경과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소싯적에 복숭아를 따먹기 위해 이웃 정승 집 담장을 뛰어넘었다가 들켜 벌로 시 한 수를 짓고 결국 그 댁 사위가 된 일화가 유명하다. 원로대신으로서 좌의정인 조은(釣隱) 박은(朴)대감이 바로 그의 장인이다.
문효공 어효첨은 유가(儒家)의 가풍을 이어 유교이념에 배치되는 풍수(風水)나 무속(巫俗)을 억제하는 주장을 펴면서, 세종20년 집현전교리로 있을 때 「논풍수소(論風水疏)」를 지어 길흉화복은 천명과 인심에 달려있지 결코 풍수지리나 음양잡서 따위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설파하였다. 특히 도읍지에 관한 논란에 대해 “천명(天命)으로 주맥(主脈)을 잡고 민심(民心)으로 안대(案對)를 삼으라”는 말로 사설(邪說)들을 제압하였다.

▲ 함종세고 목판본(1723)

동방급제(同榜及第)한 형제

조선시대의 유일한 인재 선발시험인 과거(科擧)에 급제한다는 사실이 개인은 물론 가문의 광영이었다. 아마도 오늘날의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예로운 관문을 한 집안에서 두 아들이 함께 통과하였으니 그 감격이야 말로 어떻게 형언할 수 있었을까. 일찍이 할아버지 어변갑이 아들 어효첨의 등과(登科) 소식을 듣고서 ‘一家將見二龍頭’라고 시를 한 수 썼는데, 뒷날 정말로 손자인 어세겸·세공 형제가 ‘한 집안에서 두 용머리를 볼 것이다’라는 예언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 세겸 · 세공 두 형제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듯 세상의 부러움을 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관직에 진출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충실한 업적을 남겼다.

▲ 문효공 어효첨 묘역

서천(西川) 어세겸은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봉상시 녹사를 거쳐 이조정랑 ·종부시정·예문관직제학·우부승지를 지낸 후, 강순·남이 옥으로 익대공신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관찰사·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을 때 당시 아우 어세공이 병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어 상피법(相避法) 때문에 한때 한성부좌윤으로 옮긴 일도 있었다. 이후, 한성판윤과 호·형·공·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양관 대제학으로 문형을 맡았으며 우찬성이 되었다가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지성균관사·영경연사를 겸하고 좌의정에 올랐다. 한때 무오사화로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궤장을 하사받고 부원군에 진봉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치를 능률적으로 하며 문무를 겸하여 내·외치에 업적이 많을 뿐 아니라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으로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다양한 시문(詩文) 중 독특한 형태인 보탑시(寶塔詩) 한 부분을 소개한다.
시의 제목은 <詠菊一字至十字效文與可詠竹>으로 한 자에서 열 자까지 늘이면서 국화와 더불어 대나무를 읊는다는 시 형식이다.

菊 국화와
菊 국화는
兄松 소나무의 형이요
弟竹 대나무의 아우로
角露 저녁 이슬에 젖고
承朝旭 아침 햇볕 받아가며
粲粲英英 울긋불긋 아름답고
芬芬郁郁 고운 향기 드높네
… … … 이하 생략

서(松西) 어세공(魚世恭)은 식년문과에 형과 동방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 박사·한성부 참군·공조와 병조좌랑을 거쳐 성균 사예와 좌승지를 역임했다.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2등으로 아성군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를 지낸 다음 명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지중추부사·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좌빈객을 겸했으며, 병·형·공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경학에 능하여 특진관을 겸했고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하세하였을 때,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영민하여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였고 무격(巫覡)·부도(浮屠)·지리(地理)의 구기(拘忌)에 대해 일체 거론하지 않았으며, 늘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일을 일삼으니 그 효성에 감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자료 도움을 주신 분 : 전 성균관장 어윤경, 대종손 어흥규, 함종어씨중앙종친회장 어창선, 문정공파종회장 어경찬, 양숙공파종회장 어수충, 이사 어민, 총무이사 어강)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