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 가까이 미뤄졌던 인천상륙작전 개시

대한민국에 있어서, 6월은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호국·보훈의 달'로 불린다. 6일 현충일에 이어, 10일 민주항쟁 기념일,  25일 6.25 한국전쟁, 29일 연평해전이 모두 6월에 있다. 이러한 6월을 기리기 위해 이톡뉴스가 기획 시리즈로 '나라사랑' 기획을 선보인다. 

68주년이었던 지난해, 6.25 한국전쟁 기획으로 이톡뉴스가 6.25전쟁 개전 초기 11일을 중심으로 그날의 전개 상황을 기록한 바 있다. 올해는 그에 이어 인천상륙작전(1950.9.15)과 서울 수복(1950.9.28), 그리고 10월 1일 북진의 개시 전개 상황의 기록을 훑어보았다. (편집자 주)

▲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서 함포 지원 사격이 개시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지상군 75,000명이 함선 261척으로 나누어 제주도 아래에서 서해로 북상, 인천해안의 3지점으로 상륙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안경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 암호 '폭풍'이 북한 전군에 하달되면서, 북한의 선두 부대는 38도선의 11개 지점에서 지상군 4~5만 명이 전차 94대를 이끌고 전면 남침했다. 이후 3일 만인, 6월 28일에 북한군은 개성, 문산 및 동두천, 포천을 거쳐 서울 시내까지 진입했다. 

6월 27일, 수도가 대전으로 천도했고, 유엔한국위원회는 일본 도쿄로 이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윽고 맥아더 원수가 한국작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됐다. 

7월 20일, 대전·전주 함락, 23일 광주 함락, 26일 여수 함락에 이어 9월 초 전선은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왔다.

1950년 9월 15일(금, 비·흐림, 83일 차); 인천상륙작전


9월 22일, 포항 탈환
9월 27일, 울진 탈환
9월 28일, 대전 탈환
9월 29일, 광주 탈환
9월 28일, 서울 수복
9월 30일, 천안 탈환
9월 30일, 강릉 탈환
<참고자료 '6.25 전쟁 1129일'(이중근 편저), 나무위키>


▲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유엔군 해병대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2개월 가까이 미뤄졌던 인천상륙작전이 유엔과 국군 해병대의 상륙으로 개시되었다. 맥아더 사령관과 도일 소장의 지휘하에 월미도가 탈환되고 주력공격은 오후 5시 30분에 개화되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월미도 상륙을 주력부대는 미 제10군단이 맡았다. 양동 협력작전으로 국군은 동쪽 해안인 영덕 남방 장사동에 상륙했다.

유엔군 병력은 약 7.5만 명에 전함은 261 척이 공군의 지원하에 상륙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9월 22일. 국민 해병대는 서울 서대문으로 돌입 수도 탈환의 기반을 가졌다. 23일,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총후회 명령을 하달한다. 29일이 서울이 수복되고,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 요청을 결정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항공편으로 서울에 입성했다.

10월 1일(일, 아주 맑음), 38선 북으로 돌파


10월 1일, 국군 북진 개시
10월 7일, 미군 개성 점령
10월 10일, 국군 원산 점령
10월 16일, 중국 인민지원군 선발대 압록강 첫 도하
10월 17일, 국군 사리원·함흥 점령
10월 19일, 중공군 압록강 도하
10월 19일, 한미군 평양 점령
10월 26일, 한미군 초산 점령
11월 6일, 국군 길주 점령
11월 21일, 미군 혜산 점령
11월 26일, 국군 청진 점령, 장진호 전투


9월 29일, 미국은 유엔의 북진계획을 승인했다. 영국의 외무장관은 38선 돌파를 주장했다.

맥아더는 김일성에서 항복을 요구했고, 김일성은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에서 파병을 요청한 1950년 10월 1일(일요일), 그날은 매우 맑은 날이었다. 국군 제3사단(23연대)과 수도사단은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의 명령에 의거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10월 7일 오후 5시 14분, 미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넘었고, 미 제1기병사단이 개성을 점령했다. UN군의 본격적인 북진은 10월 9일부터였다. 인도의 네루 수상은 당시 유엔군의 38선 북진에 반대했다.

한미군의 북진 속도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남진 속도보다 빨랐다. 북진의 속도는 일일 평균 26km의 속도로 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북한의 수도인 평양 점령은 10월 19일로 미 제1군단과 국군 제2군단의 몫이었다.

▲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중공(中華人民共和國)의 마오쩌둥(毛澤東. 오른쪽)과 린뱌오(林彪. 왼쪽) 중공인민군 사령관. <사진=국가기록원>

이 때까지만 해도 통일을 향한 전승의 분위기로 흘러갔었다. 10월 16일, 중국 인민지원군 선발대가 압록강에서 첫 도하를 개시한 이후 중공군의 지원군은 10월 19일, 6개군 18개 사단의 약 18만 명이 도하를 시작했고, 3개군 12개 시단의 약 12만 명이 이어 11월 초에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마오쩌둥의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의 양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 북진 통일 국민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남학생들이 스크럼(scrum)을 짜고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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