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결정 주역: 육군참모총장 블랑(Blanc)장군과 몽끌라르(Monclar) 장군
장교 39명, 부사관 172명, 병사 800명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2년도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몽끌라르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 (사진=국방부 블로그)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2년도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몽끌라르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 (사진=국방부 블로그)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는 제4공화국으로 내각이 빈번하게 교체되면서 정국이 불안정한 시기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후 복구 작업, NATO가입, 인도차이나전쟁 등 국내․외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군대를 파병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12명의 고위급 장교들을 시찰단으로 파견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유엔군사령부는 프랑스의 시찰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거절하였으며, 반면 프랑스내의 많은 시민과 군인들은 건제유지의 군대파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병결정권을 쥐고 있는 프랑스 국방부차관 막스 르죈느(le Jeune)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블랑장군과 몽끌라르 장군이 이를 설득하고 나섰다. 블랑장군은기존부대와 관계가 없는 특별부대를 편성하고, 현역과 예비역에서 지원병을 받아 미국씩 보병대대로 편성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르죈느 차관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단시일 내에 창설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거절했다. 이에 블랑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중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한다면 가능하다"고 말했고, 외인부대 감찰감 랄프 몽끌라르(Ralph Monclar) 장군도 이에 덧붙여 "만약 부대가 창설되면 제가 그 부대의 대장직을 맡겠습니다"라며 르죈느 차관의 결심을 촉구하였으며, 르제느 차관도 마침내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6․25 한국전쟁에 프랑스군을 파병하기로 발표한지 약 1개월 뒤인 1950년 8월 24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예비역과 현역 지원병으로 편성되는 유엔군 프랑스 대대 창설을 결정하였고, 1950년 8월 25일 유엔군의 깃발 아래에서 싸우게 될 프랑스군 대대의 창설을 공식 발표하였으며, 10월 1일 파리 서남쪽 르망(Le Mans)시 교외의 오부르 병영(Camp d'Auvours)에 공식적으로 유엔군 프랑스 대대를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8월말에 이뤄진 파병결정에 따라 구성된 지원병들은 르망 교외의 오부르 병영기지에 집결했다. 지원 병력은 유엔군 프랑스 지상군부대를 편성하기에 충분했다. 파병부대 규모는 대대급으로 전투 병력은 장교 39명, 부사관 172명, 병사 800명이었다. 지원병들은 모두 현역과 예비역으로 구성됐다. 현역과 예비역의 비율은 장교의 경우 5 : 5였고, 부사관은 7 : 3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1 : 9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 육군의 현역부족현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필자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필자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프랑스대대는 그 성격이 매우 특이했다. 프랑스군 역사상 그런 부대는 없었다. 종전의 프랑스군 부대와 달리 이 부대는 역사도 없었고, 전통도 없었다. 부대기에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표시도 아로 새겨져 있지 않았다. 부대원들은 그 누구의 후계자도 아니었다.

프랑스 대대는 단순히 국가적 이익의 차원을 넘어 똑 같은 목표와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였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전통과 모범을 보여야했다. 따라서 그들은 많은 임무를 부여받고자 했으며, 그들은 모든 것을 받칠 태세가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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