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지난 2012년도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몽끌라르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 (사진=국방부 블로그)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2년도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몽끌라르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 (사진=국방부 블로그)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몽끌라르 장군의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레(Magrin Vernerey)이며, 헝가리 이민출신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 출생하였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생시르(Saint-Cyr)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세계 제 1, 2차 대전의 각종 전투에 참전해서 20여개의 각종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914년 8월 5일 장군은 보병 제60연대에 배치되었으며 이 연대와 함께 전투를 하였고, 대위계급으로 프랑스 최고무공훈장 레지옹도뇌르(Légion d'Honneur)의 기사장과 11개의 훈․표창을 수상하면서 전쟁을 끝냈다.

7번 부상을 당하여 상이군인연금 등급 90%에 도달하였고 총탄에 의한 엉덩이 파손, 수류탄 폭발에 의한 오른팔 골절, 2회의 중요한 두부 개두술(천두술), 가스에 의한 두 눈의 화상치료와 수술을 받았던 1급 상이용사였다.

제2차 세계 대전당시 1940년 5월 13일 노르웨이의 비제르비크(Bjervik)전투에서 그 유명한 제13외인연대를 지휘해 적을 공격하여 수많은 연합군 포로들을 구출하였고 동시에 10대의 쌍발비행기를 비롯하여 자동화기와 수많은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또한 5월 28 ­6월 2일간의 나르비크(Narvik)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대독일전에서 유일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60여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구출하고 400명이 넘는 독일군 포로, 10문의 대포, 중요한 전쟁물자들을 노획하여서 그 공로로 십자 대 훈장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군부와 갈등이 생기자 런던으로 가서 이름을 프랑스 중서부 뚤루즈(Toulouse)지역 조상들의 본고장 지명인 몽끌라르로 바꿨다.

그는 외인부대장으로 재직하면서 이탈리아 해군대장을 포함해 1만4천명의 적군을 생포하고, 마사우아(Massaoua)항을 점령해 에리뜨레(Erythree) 전투를 종결지었다. 프랑스 파병문제를 논의하는 광정에서 그 규모가 대대급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몽끌라르 장군은 파병부대의 지휘관을 자청했다.

이에 르죈느 국방부차관은 몽끌라르 장군에게 "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몽끌라르 장군은 "저는 육군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로써 몽끌라르 장군은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초대 지휘관(1950.11.29.-1951.11.30)을 역임했다. 몽끌라르 장군은 이 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4성 장군(프랑스는 준장 2성, 소장 3성, 중장은 4성, 대장은 5성임)의 계급장을 포기하고 3개의 금색과 2개의 은색 줄무늬로 혼합된 중령계급장을 달았다. 당시 계급이 육군중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 파병되는 대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하고자 스스로 장군계급과 직을 버리고 중령계급장을 달 만큼 군인정신이 충일했다. 한마디로 그는 백전노장이었다.

필자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필자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한국전쟁 참전 1년 후 계급정년으로 귀국하였으며, 전역 후 10년 뒤인 1962년에 파리의 앵발리드(Invalides) 관리를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임기 5년의 관리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2년 뒤 1964년 6월 3일 72세 때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관례상 관리사령관으로 재직 중에 사망할 경우에는 앵발리드 내의 성 루이(Saint Louis) 성당 지하 납골당에 그 유해를 안치하게 되어있기에 장군은 그곳에 영면하고 있다.

당시의 프랑스 샤를르 드골(Charles de Gaulle)대통령은 군사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Invalides)의 생 루이(Saint-Louis) 성당에서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는 등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영국런던 자유프랑스 망명정부시절부터 적극적으로 그를 보좌해오던 부하장군의 위국헌신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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