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jamin Disraeli(1804 ~ 1881)
시와 정치

▲로버트 필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저작권=퍼블릭도메인)
▲로버트 필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저작권=퍼블릭도메인)

[이동희 오성연구소 이사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우리의 민주시민사회에서 미래의 다양한 꿈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또는 아직도 70여 년 동안 그대로 남아있는 휴전선에서 군대복무를 하고 있는 영원한 공인들에게 그리고 실제로 한국 정치현실에서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도 내가 존경하는 정치가의 한 인생교훈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우리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앞으로 위대한 정치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명재상 벤자민 디즈레일리(Bebjamin Disraeli)를 소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영국, 신사 정치의 멋을 찾아서〉라는 1993년도 나의 학술적인 영국순례의 기행문을 발췌하여 게재하고자 한다. (기자주)

(2)에 이어서…

시와 정치


사실 영국 민주정치의 시작은 부패선거로부터 시작되었다. 1832년 <The first reform Act> 선거법 제1차 개정은 바로 <Rotten Borough>라는 부패선거구를 없애기 시작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선거법을 통과시킨 휘크(Whig : 자유당의 전신)당의 John Russel은 1835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이 되어 강력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뛰는 자 위에 반드시 나는 자가 있다고 보수당의 새로운 지도자인 로터브 필(Robert Peel, 1788~1850)이 그 보호무역주의(The Corn Law : 곡물수입에 중세를 과하는 법)를 지지하면서 농촌신사의 호응을 얻어서 그 막강했던 자유당내각을 무너뜨리고 드디어 1841년 선거에서 5년 만에 보수당의 대승을 얻어냈다.

그러니 Peel 수상 앞에서는 야당은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고, 그의 뒤에 앉아있는 여당인 보수당 국회의원은 그 분만이 고맙고 위대하게 보여서 그저 말씀하시는 대로만 따라 가겠다고 우러러만 보고 있었다. 참으로 득의만면(得意滿面)의 시대였고 무소불위의 위력으로 영국정가에 군림하였다.

그는 큰 생산업자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재상으로 키워졌다. 그의 부친은 그가 5살 때부터 저녁을 먹고는 그 식탁위에 그를 세워놓고 수상의 시정연설을 듣는 것이 남다른 취미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를 재상으로 키운 셈이다. 그는 물론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서 20대에 입각을 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경찰제도를 만들고 내무장관으로서는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한 정치가였다.

그는 그 당시 외무부장관인 Canning과는 가장 친한 정치적인 동지였고 후배였고 솔직한 친구였다. 이 두 분의 쌍벽으로 영국 보수당은 국내외로 막강하였다. Peel은 오늘날의 경찰제도의 시조이고, Canning은 중남미 독립 국가들의 후원자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모시고 있던 Liverpool 수상이 1827년 작고하자 그 후계자로서 외상인 Canning이 선배로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랜 꿈이 이루어져서 그의 내각을 조직할 때 그가 제일 믿었던 Peel과 Wellington 장군이아일랜드의 청교도 대우 안에 대한 정견이 틀린다고 하면서 내각에서 사퇴해 버린 사건이 터졌다. 그래서 그 수상은 하도 그 동지들의 정치적 배반에 실망을 하다가 고민 끝에 수상이 된지 4개월 만에 화병이 나서 분사(憤死)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Canning은 우정에 배반당한데 대한 커다란 분함을 품고 마지막으로 그의 친구 Peel을 보고 읊으면서 죽은 시가 <솔직한 친구 : Candid friend>라는 제목의 시였다. 참으로 가슴 아픈 영국의 단종애사와 같은 스토리였다. 그러나 그 후에 Peel이 Canning의 뒤를 이어서 보수당을 주도하여 자유당의 Russel을 누르고 대승하여 수상이 되었다.

1841년 선거에서 곡물조례(The Corn Law)를 지지하여 대승을 한 Peel이 수상으로 정치를 하여보니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자유무역을 반대하니 런던의 빵 값이 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도시 노동자의 생활이 위협을 받았다. 그 때 당대의 경제학자 Copten, Bright 등의 자유무역 이론이 맞아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에게 Peel 수상은 설득이 되기 시작하였고, 자유당의 정견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대단하였다. 1845년 새로운 국회가 열렸다. 그는 의회에서 시정연설을 하였다. 도도하고, 오만하고, 거침이 없는 연설 스타일이었다. …참으로 아무나 까다로운 여왕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국제정세가 복잡하고, 런던의 빵 값도 오르기 시작하고…하니 수상도 이제는 당리당락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영국의 100년 대계(大計)를 생각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국도 이제는자유무역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려고 합니다하고 앉으니 양당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구 한 사람 반대하는 이가 없고, 여․야가 기가 죽어서 지당한 말씀이고 훌륭한 연설이라고 박수로 환영만을 하였다. 그때 그런 분위기속에서의장하고 손을 든 의원이 바로 디즈레일리였다.수상께서 당을 떠나 초당적으로 말씀하시니 본인도 각하를 위하여 솔직한 말씀을 드릴까합니다. 하고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오다가 핵심을 뚫으면서 날카롭게 말문을 열었다.

…각하는 마치 자유당사람들이 목욕을 하는데 몰래 들어가서 그들의 옷과 정강정책을 훔쳐 입고서 자유당의원들을 빨가벗겨 자유롭게 만들고 보수당은 그 옷을 입혀서 근엄하게 만드셨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박수가 나왔다. 어찌하여 보호무역을 찬성한다고 해서 당선된 보수당이 자유당의 자유무역의 정강정책을 지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Peel이 이 의회에 나와서 답변을 하면서 젊잖게 디즈레일리를 타일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시 한수를 읊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 솔직한 친구라는 시 구절이었다. Canning이 자기를 배반한 친구 Peel에게 써 놓고 죽은 그 한 맺힌 시를 바로 디즈레일리에게 읊은 것이었다. Peel은 물론 박수를 받고 앉았다.

과연 명문대학 출신이고 의회의 토론가로서 당시 천하제일의 정치가로서 이런 시를 인용할 만한 분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디즈레일리가 너무했다는 인상도 주었다. 감히 어느 앞인데 그런 비판을 했던가? 그러니 그 허물을 멋있는 시 한수로 타이른 수상 각하가 훌륭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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