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5·16 정부의 경제 제1주의 시책으로 급속 확장 성장세를 보인 대기업의 멋과 맛이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기업별 사업 특징과 오너의 지배, 군림행보 관련 잡보(雜報)가 속출했다. 아직 합판과 신발산업에다 흑백 TV 시절이지만 ‘기업문화’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이런저런 소재로 기업의 멋과 맛을 비교한 것이다.  

수출실적이 최고의 자랑이었다. 국내 최초와 최고 기록이 자찬거리였다. 그러나 다소 과찬이 많았다. 1981년도 미국 포춘지 500대 기업에 국내 기업 10여 개가 랭크됐다. 현대그룹 51위, 삼성그룹 93위, 대한석유공사 129위에 이어 쌍용그룹, 포철, 효성, 선경, 한국화약그룹 등이 뒷순위에 올랐다.  

정부 포상법에 의한 최고 영광은 금탑산업훈장이었다. 금탑을 받고 다시 더 많은 실적을 쌓은 수출 상사들을 격려코자 고심 끝에 ‘억불탑’을 제정했다. 1977년 총수출이 100억 불을 달성하기까지 억불탑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무렵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을 매년 우리나라가 휩쓸었다. 기능공 양성, 훈련이 수출촉진 역할을 하면서 금메달도 양산한 것이다. 국제발명전시회 출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 실적들도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신성장산업으로 최고의 각광을 받고 있는 전자산업은 매년 ‘한국전자산업전시회’를 통해 수많은 수상자를 발굴해냈다. 이 전시회는 거의 매년 박정희 대통령이 참관,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당시 금성사 사장으로 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아 전시회를 주관한 박승찬 사장은 각종 명예회장 감투가 40여 개에 달했다.  
정주영 회장은 50여 개에 이른 것으로 취재됐다. 이들 명예감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렁주렁 달았다. 명예감투에 따른 비용지출이 무겁기 때문에 사양하기 마련이지만 정·관계를 통한 압력으로 덮어쓴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 시책에 관치(官治)금융 시대라 관변이 민간부문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꼴이었다. 여기에 수출과 건설 실적은 ‘청와대의 예우’를 받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故 박승찬 금성사 4대 사장
故 박승찬 금성사 4대 사장

금성사 박승찬 사장실에 가면 박 대통령과 통화하는 장면을 취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박 사장이 “예예 각하”하며 대통령과 전화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무슨 야단이라도 맞으셨습니까”라고 물으니 “야단이라니, 각하께서 전자수출 실적 보고를 받고 즐거워 전화를 주셨다”고 자랑했다. 이어 대통령이 “목표를 좀 더 초과달성할 수 없겠느냐”고 묻기에 “수출금융 좀 늘려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니 그렇게 좋아하시더라는 내용이었다. 

경제 제1주의, 수출입국 등 정책구호 아래 국가 차원에서 ‘전 산업의 수출화’, ‘전 세계의 시장화’를 밀어붙인 시절이었다. (『졸부대행진』(1984, 猝富大行進) 일부 발췌)

故 박승찬 금성사 사장(1926~1979)

고 박승찬 사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유엔한국부흥단(UNKRA)으로부터 출발하여 락희화학(樂喜化學)공업 창업자인 구인회(具仁會) 회장의 권유로 럭키금성그룹에 참여하여 스타 전문 경영인 명성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1979년 6월 6일, 부인과 함께 주말농장에 다녀오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고인은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전용 운전사를 쉬게 하고 직접 운전하기를 좋아했다.
고인의 갑작스런 별세소식에 정부 고위층에서부터 정관계·경제·문화계 등 각계각층의 각별한 애도가 운집했던 조문행렬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고인이 각급 임원을 거쳐 CEO로 일생을 마친 금성사(Goldstar)는 오늘의 LG전자로 변모했지만 기업발전사의 중요 대목마다 고인의 채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들었다.

고인은 영어에 능통하여 대외 협상력이 뛰어나고 재치와 감각으로 경쟁사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우의와 협력을 잃지 않았다. 당시 럭키금성 그룹 구자경 회장은 고인에게 전폭적인 신뢰로 창의성을 발휘토록 성원하여 대외적인 활동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었다. 국내 전자산업이 금성사·대한전선·삼성전자 등 가전 3사 시대로 개편되어 눈부시게 발전할 때 고인은 전자공업협동조합, 전자공업진흥회 회장 등 업계 대표로 한국전자전시회를 주최하고 수출목표를 독려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다.
이 무렵 박 사장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다가 청와대 전화를 받고 수출목표 달성을 약속하면서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례도 목격할 수 있었다.
저자는 고인을 한국 최초의 전문 경영인이라고 칭송한다. 동시대를 옆에서 지켜본 편집자의 눈에도 그렇게 비친다. 오늘의 LG전자의 발전을 보면서 고인의 공적이 헛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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