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스 전에 블링블링이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뢰데르社(Louis Roederer)의 '크리스탈 샴페인. (사진=연합뉴스)
프랑스의 루이 뢰데르社(Louis Roederer)의 '크리스탈 샴페인. (사진=연합뉴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90년대 후반 미국의 힙합 씬은 닥터 드레와 Nas, Jay-Z 같은 대형 아티스트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의 뮤직비디오에는 늘 같은 자동차, 같은 샴페인이 등장하곤 했는데 자동차는 캐딜락의 대형 SUV인 에스컬레이드, 샴페인은 루이 뢰더러(Louis Roederer)의 크리스탈이었다.

이들은 화려하게 돌아가는 에스컬레이드의 휠 앞에서 굵직하고 눈부신 금붙이를 번쩍이며 랩을 했고 크리스탈 샴페인을 수영장에 들이 붙거나 병나발을 불며 돈 자랑을 했다. 이 때문에 돈 좀 번다 하는 흑인들에게 에스컬레이드와 크리스탈 샴페인은 부의 상징이 됐고 힙합 아티스트들이 운영하는 클럽에서는 밤마다 수 백병 씩 크리스탈 샴페인이 팔려 나갔다.

이 현상이 카피라이터나 마케터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6년의 사건 때문이다. 당시 루이 뢰더러의 7대 사장이었던 프레데릭 루조(Frédéric Rouzaud)는 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도중 기자는 고급 샴페인의 브랜드 이미지 손상을 우려하지 않느냐며 물었고 프레데릭 루조는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사는 걸 말릴 수는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어서 “힙합 아티스트들이 우리 샴페인을 사랑하는 걸 알고 있다. 그건 경쟁사인 돔페리뇽이나 크룩이 좋아할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 인터뷰는 “Bubbles and bling.”이라는 타이틀로 기사화 됐고, 이 기사를 보고 인종차별이라며 분노한 Jay-Z는 크리스탈 샴페인을 자신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퇴출시키고 당시 미국 시장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브리냑 샴페인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17 서울모터쇼 미디어데이에서 공개된 캐딜락 대형 프레스티지 SUV 에스컬레이드. (사진=연합뉴스)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17 서울모터쇼 미디어데이에서 공개된 캐딜락 대형 프레스티지 SUV 에스컬레이드. (사진=연합뉴스)

경계를 넘어선 플렉스


카피라이터에게 2019년의 단어는 플렉스다. 플렉스는 쉽게 말하면 자랑“질”이다. 미국의 신조어를 설명하는 Urban Dictionary에는 이 플렉스라는 단어가 2017년 7월에 올라 왔는데 그 뜻을 “Showing off your valuables in a non-humble way.”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일말의 겸손함도 없이 네 귀중품을 과시하는 짓.”쯤 될까? 이 자랑“질”은, 앞서 말했듯이 세기말부터 21세기 힙합 아티스트들의 전통이자 전유물이었고 흑인 프로 운동선수, 배우 등 소위 유명인을 중심으로 SNS의 파급력에 힘입어 그 유행 범위를 넓혀 왔다.

문제는 이런 자랑“질”이 SNS와 각종 미디어를 통해 국경과 세대를 넘나들면서 모두의 트렌드가 되어 경제적 능력을 넘어서는 과소비로 변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 몇 신문에서는 칼럼과 심층 보도를 통해 십 대들의 명품 사랑을 보도하고 있다. 아시아경제의 <허미담의 청춘보고서>에서는 “10대 플렉스에 허리 휘는 부모”라는 제목으로 이 실태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고, 한국일보 <뷰엔>에서는 “지갑 60만원, 운동화 70만원, 명품에 빠진 십대들.”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한 제품 사진과 함께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플렉스, 그 진짜와 가짜?


플렉스를 자랑“질”의 의미로 쓴 원조는 보디빌딩이다. 애초 이 단어는 보디빌더들이 근육을 힘껏 부풀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운동성과를 확인하거나 대회에서 관객이나 심사위원에게 보여주는 행위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플렉스는 애초에 운동한 성과를 스스로 확인하고 타인에게 평가받는 의미였다. 세기말의 힙합 아티스트들의 플렉스 또한 자신들의 음악으로 성취한 부와 명예를 확인함으로써 스스로를 격려하려는 의도가 먼저였고 타인에게 자랑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의 일부 청춘들이 자신의 돈이 아닌 부모를 졸라 산 것, 심지어 대출을 받아 구매한 럭셔리 카를 자랑하는 것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플렉스라 보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분수를 넘어서는 자랑질인 플렉스는 어떤 의미일까? 1984년 루이비통이 한국에 처음 등장하고, 그 후 십년 뒤 이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가 명품이라는 단어를 이 사회에 정착 시킨 후 대략 2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마케터와 카피라이터들은 명시적인 계급이 없어진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부와 지위를 드러내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을 교묘히, 때로는 대놓고 이용해 왔다. 그 상술에 소비자들은 충실히 호응해줬고 그렇게 성장한 소비자들의 다음 세대들이 지금의 플렉스 세대를 형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유행과 플렉스에서 빠져 나오기


사전적으로는 휘어짐을 뜻하는 플렉스는 생리학에선 반사 작용이라는 뜻으로 사용 되고 물리학, 광학 등에서는 reflectivity, 즉 반사율로 쓰인다. 말 그대로 힘을 받아 휘어진 것은 탄성이 있기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 할 테고, 쏘아진 빛은 빛이 흡수되지 않는 면을 만나면 반사가 되고, 그 반사 되는 면 앞에 상이 머물면 비춰지게(reflect) 된다. 그리고 그 면이 매끈할수록 이 비춰짐, 반사율은 높아진다.

지금, 우리의 플렉스도 이런 생리학적 물리적 현상과 유사할지 모른다. 시장이 보내는 자극에 젊은 소비자들이 즉각 반응하여 유행이라는 동력이 담긴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흐름, 즉 플렉스의 만연함은 거기에 참여한 소비자를 서로를 비춰주는 매끄러운 표면,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그 다름을 수정할 있는 거울이 되게 한다. 마치 화장을 고치듯이 말이다. 그 결과, 매끈한 표면을 강조하는 제프 쿤스의 예술에 대해 한병철이 얘기한 것처럼, “타자 혹은 낯선 자의 비동일성 혹은 부정성은 완전히 제거”되게 된다.

결국 플렉스는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대한 거울 만들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비싼 걸 사도 다다를 수 없는 스타를 닮기 위해 그 스타의 수고와 노력을 건너 뛰어 그가 수확한 표상을 흉내 내어 “그”와 같아지기 위해 과소비하는 것이고, 그 동일한 과한 소비가 너와 나의 차이를 없애 결국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매끈한 거울이 되어 너와 나를 구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스타는 트리클다운 이론처럼 아무도 구매한적 없는 표상을 가장 먼저 구매해 새로운 플렉스 게임의 시작을 SNS를 통해 알린다. 이것의 무한 반복은, 이진경의 표현을 빌리면, 동일성의 권력을 더 강화 시킨다. 그 권력은 질서와 조화의 이름으로 강요되고, 근본적인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환영이 된다.

타자의 거울이 되길 거부하는 것. 그래서 타자조차 나와 마주칠 때 자신이 나와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진짜 플렉스일지 모른다. 잔뜩 부풀린 겉근육을 자랑하는 플렉스가 아니라 세상이 요구하는 매끈한 표면을 거부할 수 있는, 세상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속근육을 만들어 더 이상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려움 속에 두리번거리며 살지 않는 것이 진짜 플렉스일지 모른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키워드

#플렉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