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 이동찬·동양석판 손열호·동양화학 이회림·능률협회 송인상 회장

경제 발전기에 가진 것 전부를 던져 헌신한 창업세대 원로 기업인들을 만난 이야기를 엮었다. 회장, 명예회장들은 시국을 걱정하면서 틈틈이 분노를 드러내 ‘늙은 피가 끓는다오’라는 제목을 달았다.

명예회장님들은 후진들을 향해 할 말이 많지만 ‘잔소리’로 들릴까, ‘노욕으로 비칠까’ 입을 아낀다고 말한다. 다만 살아온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일제 식민생활, 8.15와 6.25의 혼란과 격변, 4.19와 5.16의 정치적 변고 등 참으로 모진 세월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경제를 발전시켜 배고픈 국민이 허리를 펴게 되고 국력이 뻗어 국위를 선양하게 됐으니 ‘기업이 곧 국가다’라는 평판이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인식이 너무나 곱지 못하니 고약한 세월 아니고 무엇인가.

월간지 경제풍월 제작과 관련, 때때로 면담했던 주요 기업인들과 일부 종교인, 국가안위를 걱정하는 군 출신 등 서른일곱 분을 모신 기록물로 엮었다. (기자주)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코오롱그룹 이동찬(李東燦) 명예회장
코오롱그룹 이동찬(李東燦) 명예회장

난, 마음 비워 노욕 없소이다


코오롱그룹 이동찬(李東燦) 명예회장이 월간 경제풍월 내용이 좋다고 종종 칭찬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출신 이도형 씨 발행 한국논단과 경제풍월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놓고 방문객들이 읽기를 권하기도 했다.

이 명예는 오랫동안 정든 무교동 빌딩을 떠나 효자동의 조그마한 사무실로 옮겨 비서 한명 데리고 바둑과 그림으로 소일하며 무엇이든 물으면 ‘난 몰라요’ 한마디뿐이다. “코로롱 경영은 과천 가서 물어보고 (코오롱그룹 본사 이웅렬 회장) 노사관계 문제는 경총회관 가서 물어보라”고 일러준다.

이 명예는 “명예회장이라면서 가만히 놔둬야 명예롭지 이런저런 것 물어놓고 또 노욕이냐고 비난할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명예는 “난 마음 비워 노욕 없어 세상만사와는 담 쌓고 산다”는 신조다.

그러면서 “행여 LG그룹 구자경 명예나 삼양사그룹 김상홍 명예회장 어찌 지내시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서로는 오랜 우정관계임이 재계에 널리 알려졌다.

영등포 바닥에서 통조림 깡통 매만지다가 동양석판을 일으켜 크게 성공한 손열호(孫烈鎬) 명예회장은 “팔순에 이르고 보니 살아온 세월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실로 손 명예가 걸어온 기업인생은 고생바가지의 눈물이다. 그러나 월남전 특수로부터 석판사업이 번창하고 지금은 선진국에 수출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모자람이 거의 없다.

손 명예는 박정희 경제시대 ‘국산화가 곧 애국’으로 칭송되던 그 세월의 감격, 감동을 회고하며 지금은 감사의 노후라고 말한 것이다.

개성상인 동양화학 이회림(李會林) 명예회장은 여든여섯에 개성공단 착공식 초청을 받아 “곧 내 고향 만월동에 가게 됐소”라며 뛸 듯이 좋아했다. 이 명예는 이런저런 옛 기록물을 보여주며 “내 고향 개성은 일제 때도, 8.15 후에도…”라며 회상의 늪으로 기자를 안내한다. 그리고 일본상인의 포목상, 잡화상 견습으로부터 개성상인으로 대성한 이야기도 아낌없이 털어놨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 명예는 생전에 고향 만월동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여든아홉의 송인상(宋仁相) 명예회장은 1957년 부흥부 장관으로 자유당 정부 각료 출신으로 유일한 생존, 증인이다. 송 명예는 박식한 이코노미스트로 미국 원조당국과도 소통이 잘돼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4.19 혁명 후 자유당 선거자금 모금 관련 구속,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 뒤 5.16 정부 때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제외교관, 금융기관장 등으로 발탁되어 경제 발전에 기여했고, 노후에는 한국능률협회 회장, 명예회장으로 많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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