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맡은 역할

웨슬리 스나입스,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 1997)" 스킬 컷.
웨슬리 스나입스,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 1997)" 스킬 컷.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명절 때마다 수십 명의 식구들로 붐비던 처가에서 맏사위의 임무는 술상무였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친인척으로 복작대는 명절을 보낸 적도 없고, 억센 사투리 가득한 공간에 있어본 적도 없으니 몇 해는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다행히 장인이 흔한 말로 보리밭에만 가도 취하시는 분이라 술 좋아하는 친척 어른들의 술 상대 역할을 떠맡아 거실 한 귀퉁이에 나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은 명절을 느긋이, 조용히 술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물론 처남도 술을 제법 한다. 전형적인 덩치 좋은 경상도 사내인 처남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허튼 소리 안 하고 주사도 없어 나 같은 책상물림의 술친구로는 제격이다. 그러나 명절날의 장손은 제사와 차례의 주역이기에 그날만큼은 늘 정신이 맑아야 했다. 그런 책임감 강한 처남 대신 한량인 자형이 대신 떠안아 준 역할이 바로 장손 집안의 술 상무 역할이었던 것이다.

처남이 진 장손의 무게


해가 갈수록 그 처남이 진 장손의 무게가 느껴졌다. 장인은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는 처남이 안쓰러워 열 번이 넘던 제사도 두 번으로 줄였고 명절도 식구끼리 조촐히 지내기로 하셨다. 그래도 차릴 건 차려야 하니 처남은 장모를 모시고 장을 보고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신 장모를 도와 음식도 하기 시작했다. 누이인 내 아내도 처남을 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남이 진 장손의 짐을 나 같은 사위는 나눠 질 수가 없었다. 나보다 훨씬 돈을 잘 버니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뭐하고, 운전을 못하니 처남을 대신해서 장모님을 모시고 장을 보러 갈 수도 없다. 기껏해야 추석 몇 주 전, 예닐곱의 봉분이 있는 선산의 벌초를 도울 뿐이었다.

추석이 이른 해에는 산 속에도 더위는 남아 있곤 했다. 그 더위에도 처남은 예초기를 내게 양보하지 않은 채 홀로 짊어져 왔다. 과거 농촌에서 살았던 필자는 예초기가 닿지 않은 풀을 낫질로 베어내거나 예초기에 잘려 흩어진 풀들을 쇠스랑으로 걷어낼 뿐이었다. 처남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한 봉분의 벌초를 끝낸 후에는 준비한 음식과 술을 놓고 간단히 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 그렇게 절하는 처남의 등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곤 했다.

올해 추석이 다가오던 9월 마지막 주말, 조카와 진지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처남의 널찍한 그 등판을 보다가 문득 김훈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다. 그 글은 김지하 선생님의 출옥을 기다리시던 그분의 장모 박경리 선생님의 목격담이 담긴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다. 당시 기자였던 김훈 선생님은 그날 새벽 박경리 선생님을 보고 이전에 “없었던 따듯한 것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듯한 것들이 돋아”낫다고 쓰셨다. 어쩌면 선산의 어느 봉분 앞에서 절을 하는 처남의 등판을 보며 돋아난 감정도 이 따듯한 것과 닮은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따듯한 마음에 이름을 찾아준다면 연민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때가 되어야 찾아오는 감정, 연민


연민(憐愍)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걱정 근심이 생긴다는 뜻이다. 앞의 연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앞에 부수인 마음심이 갖고 있고 소리는 도깨비 불 린이 맡는다. 도깨비불은 원래 있던 불이거나 인위적으로 불을 질러서 생긴 것이 아니다. 느닷없이 한 밤에 나타나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이다. 어쩌면 사람이 연민을 갖게 된다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연민은 삶의 어느 순간에 타자를 향해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불이 느닷없이 켜진 후 좀처럼 꺼지지 않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환하고 따듯한 감정을 갖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연민을 갖고 사는 삶일 것이고, 삶 속에서 그 따듯함으로 나와 타자의 마음을 함께 데울 수 있는 감정이다. 그래서 결국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 마음을 품은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의 아픔을 치유하는, 그런 힘을 가진 감정이다.

나름의 무게를 지닌 삶들


평생 큰 책임을 져본 적이 없다. 큰 기업에 들어가 체계적인 조직 생활을 해 본적도 없고 군대도 그야말로 마지막 방위로 집에서 왔다 갔다 했다. 서른이 다 되도록 밥벌이를 못해 새로운 인생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시는 어머니에게 노잣돈을 보태드리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몇 백 만원을 얻어 부산에 내려와야 했다. 취직 이후에도 카피라이터가 박힌 명함을 자랑스러워하는데 정신이 팔려 넉넉히 벌지 못하는 처지는 신경도 안 쓰였고, 가벼운 통장 탓에 어머니에게 용돈 한번 부쳐 드린 적 없다.

그렇게 장남, 오빠, 맏사위의 책임은 고사하고 그 노릇도 제대로 못한 채 나이를 먹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처남이 지고 있는 저 장손의 무게는 물론이고, 장인이 평생 짊어져 온 7남매의 장남이자 선산을 떠안은 장손의 무게도 가늠할 수 없었다. 집안의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병원에 취직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 온 아내가 품은 장녀의 의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도 가늠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연민할 뿐이다.

그렇다. 어쩌면 연민은 타자의 삶의 무게가 절대적으로 측량 될 수 없음을 알고 난 후, 함부로 누구의 삶이 더 가볍다고 폄하하거나 무겁다고 막연히 떠받들어 존경하지 않으면서 그저 그 개별의 살아냄이 모두 힘겨운 것임을 인지하기 시작한 후에야 생기는 것 아닐까?

여름 저녁, 맥주 사러 가는 길이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401호 아저씨와 마주쳤다. 무심결에 “더운 날,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아내에게 건너 듣기로는 그 형님은 성인이 된 후 공사판을 전전하며 건설 일을 배우셨고 현재는 조그만 건설사를 차리셔서 나름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이십대의 딸에겐 하얀색 중형차를 사주신 양반이 정작 본인은 흔하디흔한, 족히 십 몇 년은 됐음직한 파란색 포터를 몰고 다니신다. 아마 차가 수명이 다할 때마다 같은 차로 바꿔 타신 차종일 것이다. 그 형님의 벗겨진 머리와 볼록 나온 배, 그 배를 위태롭게 감싸고 있는 땀 젖은 셔츠와 마주칠 때마다 감히 가늠도 안 되는, 그가 수십 년 책임져 왔을 현장의 인부들과 그 딸린 가족의 무게를 짐작해 본다. 어쩌면 연민과 함께 이어지는 한 사람에 대한 존경 또한 그렇게 한 사람이 책임진 무게에 대한 어림짐작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어린 처남과 아내에 대한 존경 또한 그들이 짊어져 온 그 고유의 삶과 책임의 무게를 짐작하면서 시작됐을 것이고 말이다.

연민 뒤에 오는 보시의 심정


카피라이터로 밥 먹으면서 영화 <원 나잇 스탠드>의 주인공 맥스처럼 피클 광고보다 명품 광고를 하고 싶은 욕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밥벌이와 생의 무게를 견디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연민이 마음에 정착한 이후 찜질방이든 국밥집이든, 치킨집이든 낙지 볶음집이든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그 생계의 공간에 밥줄을 걸고 있는 식구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면 가벼이 쓸 수 있는 카피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직업의식이라면 의식을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에는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친구들도 “따듯한 뭔가”가 돋아난 후에야 내가 당부했던 말들이 새삼 떠오를 것이다. 나 또한 그 마음이 돋아난 후에서야 개업 전단지의 카피 한 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모든 이의 삶에 연민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보시의 실천이라면 내 나름의 공들인 카피 또한 보시의 하나가 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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