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없는 시대의 이유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요즘엔 뭐가 유행하는지 모르겠더라.” 홈쇼핑 채널을 보던 아내는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어! 정말 그러네. 병원에서도 잘 모르겠더라.”

대학병원 직원인 아내는 매일 젊은 여성 직원 수 백 명을 본다. 그런 아내가 올 봄과 여름, 유행하는 패션을 못 느꼈다면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핫한 패션 아이템이 없는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유행의 본질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1858년 3월 1일~1918년 9월 28일)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1858년 3월 1일~1918년 9월 28일)

짐멜은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바우만은 이 심리를 좀 더 풀어서 “어떤 집단이나 집합체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과, 군중과 구별되어 개성과 독창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했다. 이들의 말은 지난 십여 년 간 목격 된 겨울 점퍼 대란을 보면 이해가 간다. 노스페이스 점퍼가 유행할 때는 거의 모든 십대 청소년들이 입길 원했고 브랜드는 레벨에 따라 가격을 차등시켰다. 그로인해 비싼 레벨을 입은 친구는 낮은 레벨의 노스페이스를 입은 친구 앞에서 으스댈 수 있었다. 롱패딩이 유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유행 추종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주강현의 <환동해문명사>를 보면 러시아 사냥꾼들은 유럽의 부자들을 위해 최상급 모피이던 검은담비를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였다고 한다. 하나의 숲에서 검은담비가 멸종되면 다른 숲으로 옮겨갔고 그 멸종의 여정이 결국엔 시베리아까지 다다라서 러시아의 동토 개척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유행에 돈을 쓰는 건, 짐멜이 지적했듯이 개별적 유행이 등장 할 때마다 그 유행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유행을 안 따르면 지금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도 불안해질 것 같은, 그야말로 느낌적인 느낌이 유행 전파와 추종의 힘인 것이다. 그러나 유행의 본래 성격이 엄청난 전파력과 함께 신속하고 철저한 소멸이기에 그 불안의 해소 대상은 다른 유행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대학 강사 노릇을 하던 십여 년 동안 이런 유행의 등장과 소멸을 반복해서 목격했다. 어느 해에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야상이 유행해서 예비군 훈련장 같은 강의실 풍경을 만들어 예비역 선배들이 질겁한 적도 있었다. 다른 해에는 빅백이 유행했었다. 기저귀 가방처럼 큰 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그 안에 집어넣는 것은 거의 없어서 형태가 자연스럽게 헐렁거리는 모양새를 갖고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친한 여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들여다봤었다. 큰 가방을 놔두고 전공책은 늘 품에 안고 오니 도대체 그 가방의 용도가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니 가방에 별 게 없네? 책은 왜 안 넣는 거야?”

“그러면 가방 모양이 망가져요.”

이게 바로 유행의 본질이다. 합심하여 다 같은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것. 유행이란 결국 모두 다르기 위해 뭔가를 사지만 결국은 같은 풍경을 만드는 카드섹션의 한 장의 카드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
영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2002)" 스틸 컷.

유행, 그 닮음과 다름 사이


<월E>, <이퀄리브리엄>, <아일랜드> 같은 영화에선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월E>에선 최후의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황폐해진 지구를 탈출해 우주를 떠도는 방주 같은 우주선에서, <이퀄리브리엄>에선 전쟁으로 인해 종말로 향하던 세계가 통일된 뒤 맞이한 전체주의 사회에서, <아일랜드>에선 부자들의 치료를 목적으로 복제 된 인간들이 사는, 인류 최후의 낙원으로 포장 된 거대한 실험실에서 말이다. 이곳에선 각기 다른 명분하에 공통적으로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음과 육체를 통제한다. 이를 위해 옷차림과 육체적 활동, 예술까지 검열한다. 이 영화들의 설정의 내면에는 국가, 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의지와 개성을 통제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과 유럽인들의 인식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미국과 유럽의 몇 몇 대도시의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는 시위도 그런 인식을 토대로 한 공권력과 통제에 대한 반발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위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미처 모르는 게 있다. 마스크로 개인의 개성이 사라지기 전에도 대중들은 유행의 흐름에 맞춰 스스로의 개성을 조율하며 살아 왔었다. 다만 유행은 스스로 선택했다는 착각을 기반으로 하고 마스크 착용은 법과 정책이라는 제도에 의해 강제된다는 선명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개인의 자유 의지와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시위는 백화점 앞에서 진즉에 일어났어야 했다.

유행 없는 시대의 이유


모두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요즘, 개성을 드러내는 유행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흰 색의 비슷한 마스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리는 것이 자신을 남과 다른 존재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구를 반감시켰는지도 모른다. 이미 비슷한 마스크를 한 탓에 다들 닮은꼴을 하고 있으니 누구를 닮고 싶은 욕구 또한 사라졌을 수 있다. 또 마스크 뒤로 얼굴과 표정을 적당히 감출 수 있으니 유행에 뒤쳐졌을 때 갖게 되는 근거 없는 초조함이나 민망함도 희미해졌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요즘 친구들 사이에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이 있듯이 얼굴 없는 옷차림만으로는 자기표현을 완성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이래저래 유행의 동력들이 약해질 만 하다. 그래서인지 립스틱 효과도 없어졌다. 얼굴을 보여줄 수 없으니 패션 시장뿐 아니라 화장품 시장도 불황인 것이다. 소비 심리적 한파로 유행의 물결이 그 상류 어딘 가에서 얼어붙은 탓이다.

유행 없는 시대, 우리 앞에 놓인 기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참으로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의 얼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는 결코 없으리라. 그대 현대인들이여! 누가 그대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일갈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요즘, 그래서 닮음과 다름, 개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유행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요즘, 니체의 말이 새롭게 읽힌다. 그로인해 가면(mask)같은 얼굴도 마스크로 가리고 다니는 요즘, 어떻게 세상에 나를 표현해야 좋은지에 대한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더 나아가 얼굴과 패션으로 애써 표현해 온 내가 정말 나인지, 왜 그렇게 표현하며 드러내며 살아내야만 했었는지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페이스북도, 틱톡도, 인스타그램도 결국 얼굴 자랑이다. 그 얼굴 없이 나를 소개하는 방법을 우린 이제야 배워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보여주는 것 없이 보여주는 법을 배우고, 진정 보여줘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더 나아가 타인과 사회에 뭔가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존재감 있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기회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상황이 끝나도 그 배움의 시간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