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4일, 경북 김천역광장에서 열린 공화당 김종필 대선후보의 선거 유세 현장. (사진=연합뉴스)
1987년 12월 4일, 경북 김천역광장에서 열린 공화당 김종필 대선후보의 선거 유세 현장. (사진=연합뉴스)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내 고향 김천(金泉)은 경북 최북단에 위치한 인구 14만의 소도시지만 요긴한 쓸모로 ‘TK(대구·경북)의 보석’이라 불린다. 옛적 경상도는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였지만 경부선 기찻길이 열린 후에는 “김천 없었다면 TK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행여 보잘것없는 시골 도시쯤으로 오해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김천은 서울-부산 정 중간 추풍령 고개 아래에 있는 도농 복합형으로 영·호남 및 충청 등 3도의 인심과 풍물을 중계하는 4통 8달의 교통요충지다. 지리적으로 연중 내내 추풍령 고개 세찬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낙동강 상류 각 지천 범람하는 자연재해와 맞서 끈질긴 생존력을 쌓아왔다. 

여기서 김천사람 특유의 오기와 개성이 생겨났다. 처음 만났을 때 ‘김천 텃새’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김천사람 성깔이 독보적인 자존심일지언정 배척하려는 독선은 결코 아니다.  

조선조 이래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 위주 시절,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갈 때 추풍령 고갯길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에 불길함을 느껴 멀고 먼 험로인 문경새재 길로 돌아 ‘장원급제 길’로 상경했노라고 전해온다. 

경부선이 1905년 개통됐으니 김천시 역할이 이미 110년을 훨씬 넘겼다. 그리고 김천이 시로 승격된 것이 1948년 8월이니 벌써 회갑을 지나 일흔 살 고령이다. 그동안 김천역은 망국 시절부터 조국 근대화 시절까지 온갖 울분과 환희를 증언해 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하에 먹을 것 없고 의지할 언덕마저 없을 때 ‘간도로 가자’는 피난민들이 기차표를 구하고자 김천역에 무작정 노숙했다는 옛 신문기사가 있었다. 8·15 해방공간에서는 일본 관리와 일본 상인들이 일본 헌병들의 호위 아래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기차 타고 돌아 갔다고 들었다. 

6·25 때는 낙동강 도강에 실패한 전국의 피난민들이 집단 노숙했고, 인민군 치하에서 일부 인민재판이 김천역 광장에서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국군이 북진한 뒤에는 서울 가는 피난민들의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곳 김천역에 이처럼 기록된 근대사의 얼룩이 바로 우리 민족이 겪어낸 울분 아니고 무엇인가. 

김천 땅 지세는 해발 1100m의 황악산이 말해 주고, 물길은 낙동강 500리가 전해 준다. 황악산 기슭의 직지사는 조선조 8대 사찰 중의 하나로 기록된 대 명찰이다. 김천은 이름 그대로 맑은 물맛이 자랑이다. 김천시 남산동의 과하주(過夏酒) 우물은 임진왜란 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마셔보고 중국의 “금릉(金陵) 과하천 물맛과 같다”고 평가했다는 전설이 있다. 

김천 중고교의 전신 ‘김천 고등보통학교’는 최송설당(崔松雪堂)이 설립한 민족교로 너무 유명하다. 최송설당은 조선여성운동사와 여성문학사에 오른 사회사업가로 평양 백선행(白善行) 여사와 쌍벽을 이룬다. 최송설당이 1931년 일제 총독부와 맞서 끈질긴 교섭 끝에 인문계 고보를 설립하자 당대 명사들이 모두 축사를 보내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극찬하기도 했다. 

최근 촛불 정권 아래 내 고향 김천이 정치적으로 외톨이 신세가 아닐까 싶어 울적하다. 촛불 정권하에 지방선거를 통해 TK 지역을 뺀 나머지 전역 지방 권력을 민주당이 싹쓸이했으니 마치 ‘풍전등화’ 꼴이 아니냐 싶다. 촛불세력이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홍위병처럼 난동질이다. 대북정책에서는 김일성 3대 세습 독재를 지원하는 종북 주사파형으로 대북무장마저 해제하고 있으니 너무나 불안하고 불길한 예감이다. 
이 때문에 매주 주말에는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태극기 집회 함성이 울리고 있어 다소나마 위안으로 삼는 처지다.  

김천이 TK의 보석이듯 TK가 대한민국의 보석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TK는 조국 근대화의 중심세력으로 역할 한 바 있지만 다시 TK가 앞장서서 구국의 깃발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김천역. (사진=이톡뉴스)
김천역. (사진=이톡뉴스)

‘경상도 사투리’ 무죄… 고향 토종 역사문화


나이 여든 고개에 헤아려 보니 고향 버리고 떠나온 지 60년 세월이다. 태어나 자란 고향보다 서울서 지낸 세월이 몇 배다. 그래도 서울은 타향(他鄕), 고향산천은 영원한 모태(母胎) 불변이다. 

서울서 고향 사람끼리 만나자고 1989년 재경 김천향우회를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언론 지성이자 대한민국 논객(論客)으로 추앙받는 최석채 전 신문편집인협회장께서 회장을 수락했다. 필자에게는 ‘고향 후배 신문기자’라면서 새파란 나이인데도 부회장으로 지명해 주셨다. 

최 회장에 이어 2대 회장 10·26 밤의 육참총장 정승화 장군, 3대 회장 노태우 대통령비서실장·법무부 장관 정해창 선배님, 4대 회장은 ‘최씨고집’으로 소문 난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이 추대, 취임했다. 

2006년 4월, 최 회장 시절, 김천 고을 향토사와 전·현직 향토 얼굴들을 엮은 '서울의 김천사람들'이 출간됐다. 오랫동안 향우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상근 부회장으로 계시던 김달원 님께서 기획, 편집, 출판을 주관했다. 이 책 발간에 대해 당시 박팔용 김천시장은 ‘김천사람들의 경사(慶事)’라고 축하했고, 필자는 당시 경제풍월 발행인 명의로 “김천 고향사람들 사이는 잊을 수 없고 헤어질 수 없는 평생 인연”이라는 소감을 썼다. 

향우회 날은 모처럼 눈치 보지 않고 터놓고 왁자지껄해도 탈이 없는 ‘좋은 날’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눈치 보느라고 기죽어 숨어 지낸 내 고향 경상도 사투리가 되살아나 한판 모임을 벌이는 날”이니 좋은 날 아니고 무엇인가. 
내 고향 사투리 말씨는 지리상 온갖 외풍에 시달리며 사는 삶이었지만 타고난 성깔 그대로 살고파 목청 높이며 굳어진 억양이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떠들게 되면 서울 표준말 양반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반면에 우리끼리는 거침없고 막힘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지 말할 필요가 없다. (회고록 '배병휴 경제기자 일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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