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없는 정전회담, 결사반대" (by 이승만 대통령)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서 함포 지원 사격이 개시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지상군 75,000명이 함선 261척으로 나누어 제주도 아래에서 서해로 북상, 인천해안의 3지점으로 상륙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에서 함포 지원 사격이 개시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지상군 75,000명이 함선 261척으로 나누어 제주도 아래에서 서해로 북상, 인천해안의 3지점으로 상륙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적치(敵治) 세월 중 우리 집에 자주 들린 낯익은 중년의 인민군은 소속이나 계급이 기억나지 않지만 비교적 솔직했다.

그는 김일성이 상주까지 다녀가면서 “곧 낙동강의 전면 도하작전이 이뤄지고 부산까지 해방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하작전 개시한 적이 언제인데 아직껏 대구 점령 못 했느냐”고 반문하자 그가 ‘작전상’ 지연전이라면서 대세가 불리한 측면을 다 숨기지 못했다.

낙동강 전선이 장기화하면서 전쟁물자 수송을 위한 야간 노력 동원이 강제되고 미군 조종사 포로를 새끼줄로 묶어 동네마다 순회하는 행패가 심해졌다. 이 와중에 식량 이동마저 통제하여 생업난이 극심했다. 몰래 쌀을 팔아 긴급 생필품을 조달하기도 어려워 몇몇 장정들로 조를 편성, 밤중에 장터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 무렵 아버님의 사랑채에서 몇몇 어른들이 밤중 밀회를 통해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이 패퇴하고 있다는 말씀을 나누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방축 아래 도랑으로 세수하러 가다가 논에 삐라가 있는 것을 주워 보니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선글라스와 콘 파이프의 맥아더 장군이 가위로 한반도 중간 허리를 싹둑 자르는 그림으로 기억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말한다. 급히 이를 아버님께 보여드렸더니 조용히 아무개 어른네들을 모시고 오라고 말씀해 비상 동네 모임이 벌어지고 “이제 살았구나”라고 모처럼 환성을 지를 수 있었다.

그 사이 인민군과 치안대는 흔적이 없어졌다. 며칠 뒤 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전투경찰이 주재소 회복을 위해 카빈총을 앞세워 진주할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감동·감격했다. 

이날 초저녁 마을 유지 몇 분이 사랑채에서 환담하고 있을 때면 치안대장(임 대장)이 은밀히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차 오신다고 연락이 왔다. 적 치하에서 우리 동네 반동 셋을 살려준 은인이었지만 다시 세상이 바뀌었으니 공개적으로 만나기가 위험한 시각이었다. 

아버님께서 신세를 졌지만 손을 쓸 방도가 있을 리 없다. 그날 밤 임 대장이 뒷산 계곡을 통해 북상하려다경찰 추격팀에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 변까지 도달했다는 소식에 곧 통일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4 후퇴로 수도 서울이 다시 적 치하로 넘어갔다가 정전회담이 한창일 때 전선의 일진일퇴로 피아간 희생이 엄청 많았다. 

북진 통일 국민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남학생들이 스크럼(scrum)을 짜고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북진 통일 국민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남학생들이 스크럼(scrum)을 짜고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 없는 정전회담, 결사반대” 방침에 따라 반 정전 시위에 몇 차례 참가했다.
이때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결단이 유엔을 경악시킬 만큼 큰 충격뉴스가 됐다. 곧이어 반공포로들을 각 마을에서 당분간 보살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우리 동네에 세 명이 배정됐다. 당시 정부 재정 상태는 전쟁터의 국군도 제대로 보살펴 줄 형편이 못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원조에 거의 의존하는 형편으로 반공포로들을 석방하고도 먹여줄 능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면 단위로 몇 명씩 숙식 책임을 배정했다. 우리 마을에 배정된 분들 셋이 한집에 머물기를 희망하여 머슴이 사라지고 텅 빈 방이 남아 있는 우리 집으로 모셨다. 북한 억양의 반공포로 셋과 내가 친구 사이가 됐다. 감천 냇가 물고기잡이 같이 가고, 풋감도 따다 난생처음 숯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반공포로들로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이 위대한 세계적 지도자라는 평가를 들었다. 또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아마도 공부를 많이 한 지식층이었을 것이다. 그들 반공포로 셋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인도로 갔을까, 남미로 갔을까… 그들이 자유를 찾아 반공 편에 목숨을 걸었음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회고록 '배병휴 경제기자 일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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