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야권에서는 포철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장기집권을 배경으로 ‘독야청청’ 식으로 군림하려 드니 ‘손 좀 봐야겠다’는 분노처럼 들렸다.  
그러나 맨입으로 호통쳐 봐야 눈도 깜짝 않는 철벽이니 “포철을 여러 번 취재한 선배님이 ‘한 건’만 메모해 주세요” 식이다. 

거절할 까닭이 없는 요청이었다. 당시 포철 관련 정치권 루머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야권 맹장으로 명성 높은 대학 직계 후배에게 여러 건 메모를 건네주면서 감사 결과 보고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가 “곧 박태준 박살 내고 오겠다”며 자신만만하게 포항으로 내려갔다가 얼마 뒤 서울 와 충무로 뒷골목서 한 모금 사면서 “포철은 박태준의 워크화 문화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너무 뜻밖이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기공식에서 기공 버튼을 누르는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왼쪽부터). (사진=포스코)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기공식에서 기공 버튼을 누르는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왼쪽부터). (사진=포스코)

그의 극구칭찬 내막을 짐작하면서도 “술 얻어 마시고 돈 봉투 받고 왔소”라고 농을 건넸더니 “포철 건설 과정의 박정희와 박태준을 너무 몰랐다”고 고백했다. 뒷날 정권교체 혼돈 속에 박 회장이 정계로 진출하면서 “포철을 정치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병풍막이 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YS와 DJ 집권시절 포철은 박태준과 박정희 이미지 때문에 정치적 학대를 받았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착공식 후 건설 현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 김학렬 부총리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착공식 후 건설 현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 김학렬 부총리

YS는 노태우 시절 3당 합당으로 집권 채비하며 당초 약속한 내각제 포기 각서 뒤집기로 민자당계인 박 회장을 밀어냈다. 그 뒤 세무사찰을 통한 탈세혐의 등으로 압박하자 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봉투로 매입한 아현동 자택을 매각, 여기저기 기부하고 망명자 신분으로 일본에 은거했다. 이 무렵 조선일보 논설위원 출신 한국논단 이도형 발행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렵게 박 회장 인터뷰에 성공하여 소식을 알게 됐다. 

그해 연말 ‘서울 남대문 경제신문사 배 위원’이란 엉성한 주소로 박태준 회장의 연하장을 받았다. 박 회장 글씨는 명필 수준의 달필이었다. 그로부터 직간접으로 통신하다가 DJ 집권시절에는 국무총리를 맡았으니 명예회복 할 수 있는 경사에 속했다. 그렇지만 DJ 시절도 포철은 상당한 정치적 압력으로 학대받았다. 

박 총리는 어느 날 출근길 카 라디오 편에 “막대한 부동산 재산을 차명 관리하고 있다”는 청천벽력 뉴스를 들었다.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DJ 친정체제가 굳혀질 무렵 측근들의 중상모략이 시작된 것이다. 박 총리는 미련 없이 사표 쓰고 DJ의 ‘간곡한 만류’에도 빈손으로 귀가했다. 

한참 뒤 월간 '경제풍월(現 이코노미톡뉴스)' 특별인터뷰 간청 끝에 승낙을 받아 한남동 출가한 딸 집에 기거 중인 박 회장을 방문하니 정장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YS와 DJ와 민감한 사안들, JP와 미운 정 고운 정을 거의 다 털어놨다. 

1997년 12월 3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종필, 박태준 총재의 오찬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997년 12월 3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종필, 박태준 총재의 오찬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경제기자 시절 취재에다 YS와 DJ와의 관계를 합치면 상당한 비화 스토리로 월간지가 팔릴 것 같다는 기분이었다. 

자가운전 자동차가 신라호텔을 지나올 무렵, 박 회장께서 전화를 주셔서 받아 보니 “인터뷰 내용 중 코드 1번(YS와 DJ 관계)은 없었던 일로 처리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결국 YS의 비인간적인 모멸, DJ의 야비한 정치 꼼수 등은 언론에 발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박태준 포스코 창업 회장, 전 국무총리 관련 회고 사연이 내 기억 속에 수북이 쌓여 있다. 이를 끄집어 기록할 공간이 없다. 박 회장 말년에 청암회(靑巖會) 회원으로 초청을 받아 별세하실 때까지 종종 뵈었다. 정치권에 진출한 후 측근들, 자민련 시절 국회의원 등 30여 명으로 구성됐다. 비정치인 2명을 청암께서 연필로 적어주셨다고 했다. 매경기자 출신 배 아무개와 육사 19기 출신 육군 대장 김진선이었다. (배병휴의 경제기자 일생 회고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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