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영양식 라면개발, 애국산업

우지파동기의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 (사진=삼양식품)
우지파동기의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 (사진=삼양식품)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전 국민이 배고픈 시절, 10원짜리 삼양라면이 신통한 국민 영양식으로 탄생했다. 창업주 전중윤 사장은 일제하에 속칭 천재코스로 불린 명문 선린상고를 나와 조선총독부 관리로 뽑힌 수재였다. 8.15 해방 후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경영하다 해외여행길에 일본서 라면이란 신기한 식품을 발견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후 1억 명의 눈물과 참회 속에 희망의 구호품처럼 개발된 것이 라면이었다.

전중윤이 “일본의 식민지 압박을 받은 한국 국민들이 바로 이 구호식품을 먹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기계설비와 제조기술 도입을 생각했지만 막연했다. 기계 한 세트에 거액의 달러가 소요된다고 하니 나라의 총 외화보유고가 겨우 몇 만 달러에 불과한 처지라 불가능했다.

삼양식품 창업주인 전중윤 명예회장(앞줄 왼쪽 첫번째)의 라면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1980년대 당시 박 대통령과 박근혜양이 전중윤 명예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삼양식품 창업주인 전중윤 명예회장(왼쪽 첫번째)의 라면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1980년대 당시 박 대통령과 박근혜양이 전중윤 명예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5.16 정부 2인자인 JP(김종필)를 찾아가 달러 배정을 간청하고도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라면기 제조 도입에 성공, 커피 한잔 값에 국민 영양식을 보급했으니 ‘애국산업’이었다.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최고 지도자 박정희가 술 마신 뒤 얼큰한 라면 한 사발 마친 후 ‘거 참 좋구나’라고 품평했으니 성공이었다. 그로부터 삼양라면은 신바람으로 기세가 솟아났음이 물론이다.

김일성의 직․간접 침략이 극성이던 시절 전선과 수도권 24시간 불침번의 야식으로 값싸고 맛이 딱 좋았다. 민간부문이나 재래시장의 야식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소문이 퍼져 파월 장병들의 야식으로도 공급되어 고국의 향수를 달래는 역할도 했다. 실로 삼양식품은 ‘애국산업’이었고, 전중윤은 ‘식품황제’라는 말로 예우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소속된 경제신문에는 늘 삼양식품 소식이 훈훈한 단골메뉴로 소개됐다. 삼양정신이란 하늘(天)과 땅(地)과 인간(人)의 균형과 조화를 뜻했다. 전중윤 CEO의 메시지는 ‘식품평천’(食品平天)이었다. “온 국민이 배불리 먹으면 곧 나라가 태평하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목숨을 걸고 한강대교를 건너 배고픈 국민들에게 배불리 밥 먹게 해주겠다고 5.16을 일으킨 박정희에게 꼭 맞는 말이기도 했다.

“밥이 민주주의와 인권보다 앞서는” 최상위 개념으로 박통의 국정과제 1호였기 때문이다.

하월곡동에 위치한 옛날 삼양라면 공장. (사진=삼양식품)
하월곡동에 위치한 옛날 삼양라면 공장. (사진=삼양식품)

우지라면 악성투서… 10년 무죄투쟁


삼양라면이 잘 나가고 있던 세월이지만 6.29 선언으로 탄생한 노태우 6공화국은 유보됐던 노동권이 거리투쟁으로 나와 나라가 혼돈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선 개발, 후 보상’ 원칙에 따라 노동3권 가운데 단체행동권이 유보됐다가 가투(街鬪)로 나왔으니 실로 엄청 사나웠다. ‘군사문화 잔재’ 청산과 ‘신 민주질서’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폭발하니 ‘보통사람의 시대’를 선언한 노태우 정권이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1963년에 나온 최초의 삼양라면 디자인.
1963년에 나온 최초의 삼양라면 디자인.

시중에서는 군 출신 노태우를 ‘물태우’라고 불렀다. 소공동의 가화다방 마담마저 공개적으로 물태우라고 불러 신문에 나기도 했다. 이 무렵 청와대 상춘재 만찬장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물이 불보다 더 무서운 줄 모르시느냐”고 해명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토록 노동행동권 목소리가 하늘높이 치솟고 있을 때 식품황제를 추락시킨 돌발사태가 빚어졌으니 ‘우지(牛脂)라면’ 사건이다. 공업용 우지를 식품에 사용했으니 악덕 모리배라는 투서가 발단이었다. 행여 당시 라면시장 내부에서 제1위 삼양식품과 경쟁하던 라이벌 회사와 투서 관련 있지 않느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결론적으로 6.29 선언 이후 각계 곳곳의 봇물투서, 고발세태에서 나온 추악한 사건의 연속으로 비쳤다.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인체에 무해하다고 해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종인 보사부 장관이 라면을 시식하는 장면을 TV 화면을 통해 보여 주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이 연일 공업용 우지제품이라고 보도하는 여론재판을 막을 힘이 아무데도 없었다. 검찰과 경찰이 머뭇거리면 언론이 또 야단치니 ‘언론폭력’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라면업계의 실의와 절망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라면 1위 삼양의 시장점유율 60%가 15%로 순식간에 떨어지고 1,000여명의 삼양가족이 실직했다. 악성투서 한 장으로부터 여론재판이 국민 영양식으로 오랫동안 추앙돼온 애국산업을 죄악으로 내몰았지만 라면인들은 유구무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세월동안 삼양라면은 고등법원, 대법원을 거치면서 ‘공업용 우지라면’이란 투서상 허물은 조작, 무죄라는 최종판결을 받았다. 사필귀정이었다. 그렇지만 기업이 다 망하고 난 뒤의 무죄였으니 누군가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1997년 8월 27일자 세계일보에서 발표한 우지라면 무죄에 관련된 당시 기사. (사진=삼양식품)
1997년 8월 27일자 세계일보에서 발표한 우지라면 무죄에 관련된 당시 기사. (사진=삼양식품)

전중윤은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 제기를 거부했다. 10년을 참고 견딘 ‘절치부심’ 끝에 악덕, 모리배라는 모략으로부터 벗어났으니 다행 아닌가. 전 사장은 강원도 태생으로 천성이 ‘암하노불’(巖下老佛)이라고 해명했다.

2010년, 전중윤은 명예회장으로 내려앉았다. 자랑스런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도 직접 수상하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이때 라면 경영 50주년을 계기로 장남 전인장(50)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건(以健) 전중윤은 박정희의 구국 5.16을 높이 평가하며 대관령 고랭지에 초지 450만 평을 조성, 동양 최대 목장을 개발하면서 ‘산은 단백질원’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희가 목축산업 육성을 강조하자 여기에 호응했던 것이다.

월간지 경제풍월은 이들 모두를 한국의 기업가정신이라고 판단했다. (2010.8. 제1회 수상), (배병휴의 경제기자 일생 회고록 발췌)

한편, 7월 10일 삼양식품은 창업주인 故 전중윤 명예회장의 6주기를 맞아 7월 한달 간 삼양원동문화재단과 함께 소비자가 기준 3억원 상당의 제품을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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