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종목 ‘노루모’ 이어 원비 히트
‘고진감래’의 교훈… 효도 대물림 소망
실전적 경영이론… 신용을 생명처럼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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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경제풍월 창간 15주년 기념, 제5회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을 발굴하고 있을 때 제약보국 창업 1세대는 아흔둘 동갑 세 분이 생존해 있었다. 한국베링거인겔하임 한광호 명예회장, 한독약품 김신권 명예회장 및 일양약품 정형식 명예회장 등. 그러다가 한광호 명예가 금년 2월, 김신권 명예가 4월에 별세하여 8월말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을 시상할 때는 정 명예가 홀로 남아 있었다.

창업종목 ‘노루모’ 이어 원비 히트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일제하의 동화약방, 유한양행 등 10여 곳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8.15 후 대한민국 창업 제약사로는 동아제약, 일성제약, 종근당 등 여럿을 들 수 있으며 일양약품은 14번째 창업으로 꼽힌다.

정 명예의 제약인생은 일제시절 일인약방의 배달업무로부터 첫 인연을 맺어 타고난 근면, 성실에다 뛰어난 열성으로 자수성가했다. 일제말기에 접어들었을 때 해동약국 운영이 어려워지자 정형식에게 경영을 위임하여 나중에 독자적인 약방을 개업할 수 있는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8.15 후 차차 나라 질서가 잡히게 되자 정형식이 낙원동에 있던 공신약국을 인수한 것이 제약인생의 첫 걸음이었다. 그러나 곧 6.25전쟁으로 피난 다녀오고 국민방위군 근무로 병역을 마친 후 1957년 5월 재창업했다. 종로구 돈의동 65번지 가정집에 알약제조 정제기 1대 두고 위장약 제조에 나섰다. 전쟁의 폐허 속에 먹을 것 없던 시절 소화불량 등 위장병 환자가 많았다.

정형식도 늘 속이 불편하여 “내 위장병부터 고쳐야 겠다”고 다짐하며 온갖 문헌을 뒤지고 소문을 모아가며 찾아낸 것이 ‘노루모’였다. 보사부에 어렵게 제약을 신청하여 제조허가를 받았으니 일양약품의 창업 종목이었다. 노루모 효과가 퍽 신통했다. 한 포만 마시면 금방 위통이 사라지니 입소문이 퍼져나가 시골에서도 위장병 환자가 찾아왔다.

주문이 밀려 판매여사원 10명을 채용해야만 했다. 곧이어 신문광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과음, 숙취에 노루모’라는 광고가 매출액을 단번에 5~6배나 팽창시켜 줬다. 이에 더 이상 가내수공업 식으로 감당 못해 1960년 초에 하월곡동 넓은 부지로 공장을 확장 이전했다. 이어 사장 전용차로 지프를 구입하고 다시 신진 코로나를 구입했다.

노루모에 이어 비타민, 인삼, 녹용의 원비 제조허가를 받으니 노루모와 쌍두마차로 일양약품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느껴졌다.

초기 일양약품 임직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정형식 회장)
초기 일양약품 임직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정형식 회장)

‘고진감래’의 교훈… 효도 대물림 소망


1970년대 들어 노루모, 원비 외에 관절염 치료제, 관장약 등으로 제조 품목을 다양화 하면서 사세가 날로 확장되어갔다. 중노동 시절, 과음․과식․소화불량이 겹치니 제약시장이 절로 번창했다. 뒤이어 대망의 1980년대는 더욱 고성장이 약속되어 있었다.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의 예약으로 대한민국의 국운이 활짝 펴졌다. 오랜만에 통행금지가 폐지되니 국민의 생활패턴이 한꺼번에 바뀌기 시작했다. 스포츠계가 풍성해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988년 일양씨름단을 창단하여 ‘모래판의 신사’로 불린 천하장사 이준희를 스카우트했다. 이듬해에는 천하장사 강호동을 스카우트 하니 일양약품의 브랜드가 대중 속으로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1989년 5월, 일양약품의 씨름단(원비씨름단)에 스카우드되어 1990년 3월 천하장사 등극 이후, 1990년 7월 18일, 현대의 남동하 선수를 3-1로 물리치고 천하장사에 재 등극했다. (사진=연합뉴스)
1989년 5월, 일양약품의 씨름단(원비씨름단)에 스카우드되어 1990년 3월 천하장사 등극 이후, 1990년 7월 18일, 현대의 남동하 선수를 3-1로 물리치고 천하장사에 재 등극했다. (사진=연합뉴스)

나라 잃은 망국시절을 체험한 정형식 창업주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반겼다. 이때부터 기업의 영속성을 생각하여 후계작 양성을 생각하고 내부역량의 강화, 축적에 나섰다. 장남 정도언이 중대 약대를 나와 해군장교로 복무한 후 경영수습에 참여했다. 차남과 3남도 전문 과정을 거쳐 계열사의 경영수업을 받았다.

정형식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님에 대한 효심이 넘쳤다. 제약사업이 번창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온갖 효도를 실천했다. 아들, 딸 5남매에게도 효도 대물림을 요구했다. 5남매 부부 10명을 앉혀놓고 우애와 화합을 다짐 받고 ‘효도서약’을 받아냈다.

정 명예는 제약 창업 1세대로 명예와 권위를 다 누렸다. 각종 표창에다 모범 납세자상, 금탑산업훈장도 받았다. 몇 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렇지만 정 명예는 5남매 부부로부터 서명 받은 ‘효도서약’이 더욱 귀중하고 뜻 깊은 문서라고 생각했다. 일제하의 망국시절, 8.15의 혼란과 6.25의 끔찍한 폐허를 체험한 제약보국 창업 1세대의 소망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노루모 내복액 신문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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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적 경영이론… 신용을 생명처럼


정 명예는 제약일생을 통해 신용을 생명처럼 중시했노라고 회고한다. 창업이후 사세가 날로 뻗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은 도중에 자금난 등으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은행 돈이 막혀 사채시장에 의존하여 이자 갚기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신용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또한 정 명예는 기업경영이란 ‘종합예술’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생산, 판매, 고객관리 등 여러 부분이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를 위해 경영자는 종합예술 지휘자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정 명예는 필생의 제약사업을 통해 행동준칙 7가지를 체득했다고 소개한다.

①나라 없으면 기업도 없다. 나라의 국법과 규제를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②기업의 생존 토대는 사회다. 그러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③권한보다도 책임이 먼저다. 바로 경영자의 책임이다. ④자신의 노력으로 자력갱생하고 자조(自造)노력을 다해야 한다. ⑤매사에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어느 일방적 독주는 옳지 못하다. ⑥근로자들도 경영의 파트너이다. 노사균형과 화합이 조건이다. ⑦현장을 중시해야 한다. 생산에서 판매와 고객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현장의 소리다. 이를 듣지 않고 경영할 수 없다. (경제풍월 창간 15주년 기념, 제5회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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