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義士) 이용익(李容翊) 선생. (사진=국가기록원)
의사(義士) 이용익(李容翊) 선생. (사진=국가기록원)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우리 경제와 기업의 뿌리인 일제하의 민족기업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 가면 기업인은 선각자요 의사이며 독립투사나 다름없다.

의사(義士) 이용익(李容翊) 선생이 구국·애국 기업가정신의 발원 과정을 말해 준다. 함북 명천 태생의 보부상 이용익은 금광 노다지를 캐어 왕실에 헌납하며 “이 땅의 모든 것은 국왕의 소유이니 노다지를 주인에게 바친다”는 한마디로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고 대신 벼슬로 출세했다. 그가 광산 관련 세금을 걷어 왕실의 재정난을 해결한 것도 애국 차원의 기업정신으로 민족기업정신의 바탕이 됐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지주계급, 지식인계층의 독립운동 참여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기생집을 번창시킨 화류정책(花柳政策)을 도입했다. 그러나 민족기업인들은 기생들의 유혹을 극복해 냈다.

반일은 엄두도 못 내고 외형상 친일했지만 밤에는 극일운동 편이었다. 경주 최부자 최준이 총독부와 소통한 거부였지만 백범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에 가장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밀송금 했다.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은 제1의 친일 기업인이었지만 일본자본이 장악한 종로상권에 도전하여 화신, 신신백화점을 번창시켰다. 또 일제 말에 비행기 공장을 건립, 친일했지만 독립운동가·선각자들의 일본 유학생 자녀들의 취업 부탁으로 수백 명을 채용했다.

친일을 구분하는 잣대가 잘못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해온 민족기업인마저 반민족으로 규정할까 두렵다. 극단적인 눈으로 보면 일제하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친일파다. 만약 일제의 식민정책에 항거하여 살아남은 이가 없다면 우리 민족은 어찌 되는가.

인촌 김성수는 민족 지도자, 민족 교육자에다 경제독립운동을 실천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인촌이 창업한 경방 발기인 명단에는 영호남 지주들, 민족 지도자들이 다 올라 있다. 인촌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민족기업 설립에 동참토록 호소하여 ‘전국 지사들의 공동법인체’ 성격을 갖춘 것이다.

인촌 자신은 직접 경방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유능한 경영인을 발탁하고 기술자를 훈련 양성했다. 경방의 성공은 잠자던 토지자본의 상업화에다 국산품애용 운동사의 첫 장이다.

두산그룹의 시초가 된 두산상회의 창립자 배오개 포목상 박승직. (사진갈무리=두산픽처스(DOOSAN PICTURES) 유뷰브 채널)
두산그룹의 시초가 된 두산상회의 창립자 배오개 포목상 박승직. (사진갈무리=두산픽처스(DOOSAN PICTURES) 유뷰브 채널)

두산그룹의 뿌리인 배오개 포목상 박승직은 순수 상인정신의 창안과 승계자다. 박승직 상점을 가업으로 물려주면서 자식들을 모조리 상업교육을 시켜 은행 근무를 의무화했다. 이로써 두산 가문 100년이 넘는 장수기업사를 쌓으면서 박두병, 박용성, 박용만 등 상의회장 3명을 기록한 것이다.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경우 식민지 백성이 건강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취지로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유 박사는 9세 때 도미유학 기회를 얻어 15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 GE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모국 방문 기회에 헐벗고 굶주린 식민지 백성이 영양실조에다 각종 위생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제약사를 설립한 것이다. 나중에 유 박사는 전 재산을 몽땅 사회에 환원하고 빈손으로 떠났다. (회고록 '배병휴 경제기자 일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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