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히트 원더의 강렬함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칼럼을 위해 2,30개 정도 여분의 메모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메모는 한 장 이상이고 초안에 가까운 메모도 있지만 어떤 메모는 이 칼럼 메모처럼 단 한 줄만 있기도 하다.

영화
영화 "플래시댄스(Flashdance, 1983)" 포스터

“원 히트 원더.” 영화 <플래시 댄스>를 보다가 적어 놓은 메모다. 원 히트 원더의 정의는 시대나 장르에 좀 다르긴 하지만 보통 메가 히트한 노래 한 곡만 남긴 채 사라진 가수를 칭한다. 그 범위를 좀 넓혀 적용한다면 한 시대에 제법 히트한 노래 몇 곡을 남기고 잊힌 가수, 메가 히트곡 한 곡과 그저 그런 수준의 인기곡 몇 곡을 가진 가수도 이에 포함 된다. 다른 분야에도 적용해보자면 스포츠에선 엄청난 한 게임이나 시즌을 보낸 뒤 사라진 선수, 영화계에선 인상 깊은 데뷔작을 선보였으나 그 뒤의 영화들은 줄줄이 망하면서 사라진 배우나 감독에게도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2>에 나왔던 에드워드 펄롱은 그 뒤에 많은 작품에 나왔으나 이 작품의 영광에 가려 실패한 배우로 기억되고 있고, 맥컬리 컬킨도 <나 홀로 집에>시리즈의 영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사라진 원 히트 원더 배우다.

<플래시 댄스>는 1983년 영화다. 주인공은 제니퍼 빌즈, 감독은 그 유명한 애드리언 라인이다. 8,90년대 광고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영상 교본 역할을 했던 <나인 하프 위크>와 앞선 칼럼의 주인공 다이안 레인이 출연한 <언페이스풀>의 감독이다. 영상미는 지금 봐도 세련 돼서 장면, 장면 뜯어보면 우리나라 광고에 많이 차용 됐음을 알 수 있다.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의 다이안 레인처럼 <플래시 댄스>의 제니퍼 빌즈도 스무 살에 불과했다. 이 영화가 그녀의 두 번째 영화이자 그녀를 세상에 알린 첫 영화이며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의 거의 유일한 영화다. 거짓말 같다면 지금 검색해보라. 50편이 넘는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우리가 알만한 영화는 몇 편 안 되고 그나마도 “이 영화에 나왔었다고?” 의심이 갈 정도로 그녀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마흔 편 이상의 영화나 드라마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고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한 영화도 수두룩하다. 그나마 히트작이라고 할 만한 드라마는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한 <엘워드>정도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꿈이 이뤄진 뒤의 인생


그 사이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걸까? 다들 답이 다르다. 혹자는 그녀가 예일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까지 공부하느라 전성기를 이어갈 타이밍을 놓쳐서 그렇다고도 한다. 어떤 이는 <플래시 댄스>의 후광이 너무 강해서 그렇다고도 하고 심지어 그녀가 영화를 보는 눈, 그러니까 대본을 보는 눈이 형편없어서 그렇다고도 한다. 그러나 저 가려내기 힘든 다양한 원인들보다 더 내 주목을 끈 건 그녀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다이안 레인처럼 블록버스터의 조연은 고사하고, 언제 개봉 했는지도 모를 영화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학력과 과거의 빛나는 순간에도 얽매이지 않고 연기자로 살아왔다. 게다가 여전히 아름답다. 일도 미모도 아직 왕성한 현역이다.

<플래시 댄스>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모두 꿈을 갖고 있다.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아서 그 스탠딩 개그 클럽에서 햄버거나 만드는 스탠딩 코미디언 지망생 리치, 피겨 스케이터로의 성공을 꿈꾸지만 정작 대회에선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후 그 꿈을 접어버린 웨이트리스 지니, 정식으로 발레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 시립 발레단의 무용수를 꿈꾸는 주인공 알렉스.

이들은 피츠버그라는 삭막한 철강 도시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저 철의 세계 반대쪽에 있는 예술과 문화의 세계, 그 세계로의 진입을 꿈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미 실패를 맛보고 좌절했거나 그 좌절의 예감이 불어넣은 공포로 인해 꿈의 여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렇게 꿈을 쫓아가던 청춘 중 누군가는 도시를 떠나고 누군가는 편한 삶을 택하며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에 반항한다. 물론 영화는 심각한 예술 영화가 아닌, 오히려 한 편의 뮤직 비디오와 같아서(실제로 평단으로부터 한 시간 반짜리 뮤직비디오라고 혹평을 받았다.)주인공에겐 해피 엔딩이 허락 된다. 일도 사랑도 성공한다. 거기까지다. 영화 속 이야기는 딱 거기서 끝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질문이 이어진다. 알렉스는 자기가 일하는 제철공장의 사장이자 연인인 닉과 잘 살까? 정규 발레 코스에서 수련한 고상한 동료들과는 잘 어울렸을까? 무시를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을까? 어렵게 발레리나가 됐지만 바로 임신을 하는 바람에 경력이 단절 되지는 않았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에게 있다. 그리고 제니퍼 빌즈의 답은 그녀의 필모그래피가 대신한다. 화려한 한편의 히트작 뒤에 평범한, 아니 그 이하의 작품들을 이어가는 그녀의 행보, 40여년 가까이 연기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의 행보가.

그 행보는 저 영화 <플래시 댄스>의 뒷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플래시 댄스>는 어쩌면 제니퍼 빌즈의 “원 히트” 일수도 있다. 그 뒤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내리막길로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그녀를 영화계의 대표적인 원 히트 원더의 아이콘으로 볼 수도 있다. 마치 한 시즌을 반짝였던 신인 투수가 다음 시즌을 말아먹은 것과 같다. 그러나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린 2년차 투수가 바로 은퇴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아니다. 제니퍼 빌즈가 아직 현역이어도 되는 이유다. 투수는 던질 수 있을 때까지 던지는 것이고 배우는 무대가 자신을 부를 때까지 연기하는 것이다.

모두 기립박수를 받을만하다


모두의 기억에 남는 한 경기, 두고두고 명작이라 칭송되는 단 한 편의 영화, 그 이후에 평범해진 선수와 배우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까? 더 좋은 순간을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영화 <원더>에는 “모두, 평생 한번은 기립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없을 테니”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에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일화를 엮어 답을 얻어 보려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 중 최고의 영화를 꼽아달라고 하자 ‘next’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인생의 섬광처럼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직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참 나이가 든 후 청춘의 어느 한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가 정말 플래시처럼 빛났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나? 아니다. 그냥 묵묵히 내일을 향해가는 것이다. 기립박수를 받은 추억을 안고, 또는 그 박수를 기대하며.

영화 <원더>에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우린 모두 얼굴에 흔적이(marks)이 있다. 그 자국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보여주는 지도이기에 그 흔적은 절대로 추할 수가 없다(it's never, ever ugly).”고. 당신이 기립박수를 받았던 순간은 언제인가? 그런 경험이 있다면 분명 당신 인생엔 섬광(Flash) 같은 순간이 있었다는 얘기다. 설령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찰리 채플린의 말을 믿어보자. 앞으로, 언젠간, 한번쯤은 그런 순간이 올지 모른다. 설령 그런 순간을 기대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저 제니퍼 빌즈처럼, 영화 <원더>의 대사처럼 얼굴에 나름의 생의 지도를 그리며 살아나가야 한다. 누군가에게, 저 뒤에 따라오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삶의 진실을 알려줄 숨겨진 지도를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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