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음이 닮았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2007)" 스틸.
영화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2007)" 스틸.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범람하던 감염병에 휩쓸렸던 딸은 이틀을 혹독하게 앓으며 2킬로그램의 살이 빠졌다. 아이가 회복한 후 그동안 내리던 비가 그친 뒤 거실 복판까지 들이친 봄볕이 냉기를 밀어냈건만 우크라이나를 덮은 포연(砲煙)은 달을 넘기고도 걷힐 기미가 없다. 이 전쟁을 뉴스로 보면서 느낀 감정은 40도까지 치솟은 딸의 열을 어떤 해열제로도 쫓아낼 수 없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줄 때의 마음과 닮았다.

그 와중에도, 그러니까 하루에도 몇 백 명씩 병에 걸려 죽고 수십만이 동시에 병에 걸려 약국의 감기약이 동나 어린이 시럽 약을 사기 위해 여러 곳의 약국을 전전해야했던 이 시기에도 일은 들어왔다. 먼 나라에선 전쟁으로 하루에도 몇 천 명씩 죽고 도시 몇 개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 이런 마음으로 꾸역꾸역 카피를 썼다. 카피를 쓰는 동안, 장례식장에서 소주 한 잔을 옆에 놓고 뜨거운 육개장에 쌀밥을 말아 먹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이 감정 뒤에 ‘우리가 과연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몰려 왔다.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코로나19의 이전과 전쟁 발발 이전의 세계는 복원될 수 있을까? 이 세계가 두 고난의 후유증을 만성 질환처럼 안고 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회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오히려 더 나은 세계가 될 수 있다면 그 조건은 뭘까? 이 영화와 소설을 다시 보며 답을 찾아 봤다.

하나의 소설, 세 개의 영화


2007년도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1954년 발표 된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1964년과 1971년에 이어 세 번째로 영화화 됐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 소설의 배경이 1976년이라는 점이다. 1982년에 만들어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2019년을 시대 배경으로 삼은 것처럼 1954년의 작가에게 1976년은 아주 먼 미래였던 것이다. 원작 소설은 1964년도의 영화와는 비슷하고 2007년의 영화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2007년의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1971년도 영화인 <오메가맨>을 원작으로 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인물의 설정과 흡혈귀와의 투쟁 구조가 그렇다.

물론 세 영화 모두 이야기의 줄기는 닮았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은 흡혈귀가 됐고 오직 한 사람, 로버트 네빌만 남는다. 그는 집을 요새로 만들어 낮에는 잠들어 있는 흡혈귀를 찾아다니며 죽이면서 식량과 연료 등을 구하고, 밤에는 흡혈귀의 야유와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다. 안 그래도 암울한 이야기의 엔딩은 더 암울하다. 지구 최후의 사람이었던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죽고 흡혈귀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이 생경한 엔딩과 함께, 2007년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볼 때 이해가 안 갔던 점이 또 있었다. 주인공이 끝까지 집을 지키려 했던 점이다. 흡혈귀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여타 다른 좀비 영화와 달리 말이다. 심지어 흡혈귀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 연구도 병원이나 대학 연구실이 아닌 집에서 했다. 집에 대한 이 집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영화에서 풀리지 않던 의문의 실마리는 다시 읽은 소설 속의 대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집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 집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게요. 습관처럼 말이야. 그냥.....그냥 습관처럼....그 집에 익숙해 있었소."라고.

1954년에 발표된 "I am legend" 원작.
1954년에 발표된 "I am legend" 원작.

좀비 영화, 특히 미국의 좀비 영화는 주로 반지성주의와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미국인과 미국 사회에 냉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 담긴 은유는 약간 다르다. 오히려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가치관으로 판단되거나 규제될 수 없고 그 도래 또한 막을 수 없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1976년도 영화 <오메가맨>에서 로버트 네빌이 선택의 여지없이 유일하게 볼 수 있던 영화가 1970년에 나온 <우드스탁: 사랑과 평화의 3일>이라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담은 기록 영화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장면이 있는 <오메가맨>은 소설과는 다르게 새 시대와 새 세대가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하위문화를 그야말로 컬트적인 현상으로 치부해 버린다. 결국 주인공은 신흥 종교의 교주 같은 흡혈귀 집단의 리더가 던진 창을 맞고 분수대 조각에 쓰러진다. 그 조각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거두어 가던 로버트 네빌은 그를 찾아온 최후의 인간 무리에게 치료제를 건네면서 숨을 거둔다. 마치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롱기누스의 창을 맞고 죽은 예수처럼.

속편의 이유


<오메가맨>의 바람과는 달리 좀비는 치료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 영화를 전후로 해서 좀비 영화는 하나의 장르로 정착됐고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공포 영화들은 무수한 속편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공포 영화들이 꾸준히 속편을 찍어내는 이유가 뭘까? 전문가들은 제작비가 적고 살인마의 “아우라”를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감염병 사태와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재래식 전쟁 뉴스를 보면서 속편 생산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가 남아 있는 한 속편은 이어진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원작 소설이 나온 1954년 이후에는 물론이고 <오메가맨>이 나온 1971년 이후에도 미국 사회의 다양성은 지속적으로 심화됐고, 그로인해 낯선 존재와 미래 세대에 대한 공포 또한 다양해지고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낯설게 봄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는 공포 영화, 특히 좀비 영화를 재생산시키고 소비시키는 토양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건 데,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는 한 속편은 만들어진다. 낯선 것이 여전히 낯선 것으로 남아 있으면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공포의 상황이 끝나도 공포를 불러온 낯섦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여진은 지속된다. 공포의 경험은 악몽처럼 남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심지어 다른 공포를 예감케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님을, 전편에서 죽었던 살인마가 거짓말처럼 살아나 속편에 등장하듯, 아니 심지어 더 강해져 등장하듯, 우리를 공포에 빠트렸던 것이 언젠간 다시 찾아 올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게 한다.

문을 닫는 이유


로버트 네빌이 그랬던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불안이 집의 문을 닫아걸게 한다. 그러나 그의 집이 완고한 기성세대의 사고방식만을 상징한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소설 속의 표현을 빌리면 "새로운 세계란 늘 원시적”이다. 원시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사회와 시대가 갖고 있는 사고의 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것은 문명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스스로 자임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발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를 짊어지고 오는 낯선 존재가 곧 젊은 세대는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집”안에서 내다보는 모든 타자는 모두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타자는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영원히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지금 로버트 네빌처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집 밖으로 나서는 대신 낯선 것을 소외시키고 격리시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낯선 존재로 규정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이 봄, 지독한 갈등과 대립의 시간을 겪었던 원인일지 모른다. <월드워Z>처럼 전 인류가 감염병과 싸우는 와중에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세대와 세대가 싸우고 남성과 여성이 싸우는 시간을 지나왔다. 아니 아직도 지나고 있다. 꽃은 피었는데 세계와 우리 사회에 봄은 멀다. 타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낯선 타자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 막연히 피어오른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방법, 그러니까 늘 속편이 나오게 하는 공포 영화의 클리셰를 종결짓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다리던 진짜 봄이 오기 위해선, “나”라는 집, 내 이성과 경험과 판단의 집 밖의 세계와 조우하여 공존을 모색하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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