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진출처=Das bundesarchiv(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진출처=Das bundesarchiv(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강규형(명지대 교수, 서울시립교향악단 이사장) 칼럼@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올해 탄생 114년 주년이 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은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모차르트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 태생의 이 천재음악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후반을 장악했던 ‘음악계의 황제’였다. 한국에서도 그를 모델로 한 ‘명품’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왔을 정도로 그는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클래식 음악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프랑스의 거장 감독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e’는 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영화 만들기를 즐겼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초대형 작품에서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와 ‘글렌 밀러Glenn Miller’와 같은 인물들을 묘사했다. 그가 묘사한 인간의 군상에는 히틀러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나치에 협력했고, 종전 이후 음악계의 황제 노릇을 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영화 속 인물처럼 카라얀만큼 음악계에서 애증의 대상이 됐던 인물은 많지 않다. 음악계의 황제, 흥행의 천재, 그리고 천박한 대중영합주의자, 독재자, 나치 협력자, 코카콜라 ……. 수많은 악평이 그에게 쏟아졌다. 카라얀의 라이벌 지휘자이자 지독한 독설가였던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대중을 매혹시켰다. 마치 코카콜라가 그랬던 것처럼.”

훗날 나치 협력문제는 카라얀처럼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ngler’, ‘카를 뵘Karl Böhm’,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와 같은 다른 거장 음악가들을 괴롭히는 사안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한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 다섯 명의 지휘자 판을 많이 들었는데, 바로 ‘카를 뵘’, ‘오토 클렘페러’, ‘브루노 발터’, ‘푸르트뱅글러’, 그리고 ‘카라얀’ 이었다. 세련된 외모의 카라얀과 투박한 외모의 뵘은 동시대를 산 오스트리아인이었으나, 외모만큼이나 서로 다른 음악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레퍼토리를 극도로 제한하고,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음악세계만을 고수한 뵘과 대중과 호흡하고, 거의 모든 클래식 레퍼토리를 섭렵하며, 화려한 세계를 펼친 카라얀은 정녕 대조적인 음악인이었다. 나는 이들의 음악을 거의 동등하게 들으며, 동시에 좋아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뵘의 음악이 험난한 고산준령高山峻嶺이라면 카라얀의 음악은 빼어난 자태를 지닌 수려한 명산名山이었다고나 할까.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연주로 나와 카라얀과의 첫 만남은 시작됐고, 그 후 그의 음악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젊은 시절, 월터 레게Walter Legge의 영향 아래 주로 필하모니아와 EMI/Angel에서 작업하며 싱싱하고 세련된 음악을 보여주었다. 그 후, 후반기에 그는 주로 ‘그의 악기’인 베를린필하모니와 ‘노란딱지’ 도이치 그라모 폰Deutsche Grammophon을 통해 개성과 에고Ego를 남김없이 표출했다. 후반기에 갈수록 그의 음악은 중후하고, 기름지고, 화려해졌으며 잘 훈련된 베를린 필의 압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카라얀은 월터 레게나 존 컬쇼John Culshaw와 같은 명 프로듀서들이 권력을 가졌던 시기에 대지휘자들이 권력을 갖도록 이끌어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프로듀서가 감히 후반기 카라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기악 협주자들과 성악가들을 거대한 오케스트라 밑에 묻히게 했다는 후반기의 그에 대한 비난은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카라얀은 후반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에고 때문에 개성 있는 거장 연주자보다 그의 개성을 잘 따라오는 경량급 신인 연주자들을 선호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얀은 전 인생을 통틀어 많은 젊은 연주자를 발굴하고 육성한 공이 있다. 안네 조피 무터, 자비네 마이어, 크리스티앙 페라스, 군둘라 야노비츠, 헬가 데르네슈, 호세 카레라스 등은 그가 선호하고 끊임없이 지원하며 키워낸 음악가이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 ‘조수미’를 발굴한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이다.

특히 국제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던 야노비츠 Janowitz를 기용해서 리히아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바그너의 <발퀴레>, 하이든의 <천지창조>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등을 녹음해 그녀의 진가를 후세에 남겨준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이 소프라노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감사해 마지않을 일이다.

카라얀은 이름에서 보듯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출생지, 불후의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리처드 로저스 작곡)”의 고향, 세계적인 음악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더불어 카라얀의 출생지라는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적 음악 도시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Mozarteum이라는 유명 음악원도 여기 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세계적인 명물이 된 데에는 카라얀 자신의 공로가 컸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카라얀은 2차 세계대전 후 음악계의 황제로서 누가 뭐래도 클래식 음악을 대중과 가깝게 만든 첫 번째 공로자였다. 고전음악을 모르더라도 눈을 감고 한껏 멋을 부린 카라얀의 사진과 그의 판 재킷을 보지 못한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키는 작았지만, 생긴 것 자체가 예술적이었다. 정말로 경이로운 것은 그의 레퍼토리다. 한 인간이 그 많은 레퍼토리를 섭렵한다는 것은 세기의 천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더욱 경탄할만한 것은 그 모든 레퍼토리를 일정 수준 이상의 연주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 졸작이 없듯이 그의 연주에는 레퍼토리가 무엇이건 연주 시기가 언제였건 비록 연주의 편차가 있어도 수준 이하의 녹음은 하나도 없다. 한 장르, 한 작곡가에만 매달려서 경지에 오르는 것도 힘든데 그는 수많은 작품을 수준급으로 연주했고 그중 많은 연주가 명반의 반열에 올라 있다.

불가사의할 만큼 폭넓은 레퍼토리와 카리스마가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또한 음악에 있어서 영상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수많은 음악 동영상을 남긴 것도 그의 업적이다. 현존하는 무수한 스타 지휘자 가운데 아직도 카라얀만큼 클래식 음반시장을 주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의 레코딩이 아직도 대중과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압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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