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90년대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유행을 앞서가는 행위 같았다. 한 방송에서 전현무가 하는 말을 빌려 표현하면 트민남, 즉 트랜드에 민감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것도 나이가 들면서 뜸해졌다. <슬램덩크>와 <마스터 키튼>을 마지막으로 일본 만화책도 안 보게 됐고 <소년 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을 마지막으로 애니메이션도 잘 안 보게 됐다.

그러나 내가 안 본다고 그것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니어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 잠시 채널을 고정해놓고 보다보면 제법 재미있고 의외로 진중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괴물의 아이>도 그런 영화다.

“인간은 '어둠'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인간이 '어둠'에 삼켜지진 않는다.” (사진갈무리=영화 괴물의 아이(The Boy and The Beast(2015))
“인간은 '어둠'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인간이 '어둠'에 삼켜지진 않는다.” (사진갈무리=영화 괴물의 아이(The Boy and The Beast(2015))

 

상처가 있는 소년의 성장기


줄거리는 이렇다. 이혼한 부모 중 엄마와 함께 살던 아홉 살 소년이 있다. 어느 날,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고 아빠와는 연락이 안 된다. 엄마의 친척들이 소년의 신변을 인수하려 할 때, 소년은 거리로 나가 헤매다 시부야까지 다다른다. 그곳에서 오묘한 분위기의 골목을 발견하여 들어서게 되는데, 그 골목은 짐승들의 세계, 쥬텐카이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소년은 그 세계로 들어서고 그곳에서 거친 무사 쿠마테츠를 만나 함께 살게 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장기다.

이 성장기를 통해 영화는 여러 메시지를 던진다. 과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한 사회에서 어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묻는다. 더 나아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마음에 생긴 결핍을 채우지 못하면 괜찮은 어른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결핍은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메워지고, 사람은 그 사랑을 주고 희생을 한 누군가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살면서 괜찮은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그 결핍, 그 결핍이 만든 내면의 심연을 제대로 메우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주변과 세상을 파국으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고도 한다.

이 메시지는 짐승의 세계에 사는 두 소년, 이치로히코와 주인공 큐타의 대비를 통해 더 극적으로 전달된다. 이치로히코는 인간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짐승의 세계에 어울리는 짐승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아무리 강해져도 짐승의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상처 받고 좌절한다. 그 좌절은 절망(切望)이 되고, 결국 무망(無望)의 상태가 된다. 소망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꿈이 사라진 소년은 존재의 증명을 위해 내면의 공백, 즉 결핍의 어두운 힘을 끌어와 괴물이 되어 세계를 파국으로 끌고 가려 한다. 반면 큐타는 짐승의 세계에서 다양한 양육자들, 인생의 스승들을 만난다. 몰래 빠져나와 돌아갔던 인간의 세계에선 카에데라는 여자 친구도 사귄다. 물론 그도 이치로히코처럼 마음속에 검은 구멍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여자 친구 카에데와 곁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스승들의 도움으로 어둠의 힘을 이겨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격려의 힘을 마음에 품고 괴물이 된 이치로히코와 맞선다.

영화 모비딕(1956년) 포스터
영화 모비딕(1956년) 포스터

 

어두운 구멍과의 긴 투쟁


영화 속 쿠마테츠의 라이벌 이오젠의 말처럼 인간은 나약하기에 마음속에 어둠을 품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에겐 크든 작든 어두운 구멍이 있다. 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랑이 없는 가정이나 사랑이 있더라도 이혼이나 불의의 사고로 그 가정이 해체되어 성장기를 힘들게 보낸 사람 중 일부에겐 그런 구멍이 있을 수 있다. 설령 성장 과정에서 무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 이 어둠을 다스리지 않으면 괴물로 변하여 사람들을 헤친 이치로히코와 같은 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 이치로히코가 고래로 변하고, 소설 <백경>이 등장하는 건 이 경고를 하기 위함이다.

흰 고래 모비딕은 <백경>의 41장에서야 등장한다. 그 장엔 에이허브와 모비딕의 악연의 역사가 담겨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딕을 쫓다가 세 대의 보트가 박살나고 부하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자신은 “단검을 빼들고 부서진 뱃머리에서 아칸소의 결투자가 상대에게 덤벼들 듯 고래에게 덤벼들어, 한 뼘 길이의 칼날로 한 길 깊이에 있는 고래의 생명에 닿으려고” 했다. 그러다 “낫처럼 생긴 고래의 아래턱이 갑자기 바로 밑을 휙 스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예초기가 들에서 풀을 베듯 에이허브의 다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후 그에겐 모비딕을 향한 분노가 생겼다.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다.

에이허브는 분노의 대상이 아닌 분노 그 자체에 사로잡혀 분노의 대상과 같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내 심연의 분노, 그 어두운 구멍의 넓이와 깊이를 감시하며 살아야하는지도 모른다. 안 그러면 우리 또한 이치로히코나, 에이허브처럼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시는 쉽지 않다. 백경에 나온 대사를 인용하여 말하자면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서 광부가 일하고 있다면, 쉴 새 없이 달라지는 광부의 희미한 곡괭이 소리를 듣고는 그가 어느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걸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린 그렇게 내 밝음과 어둠, 그 양면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영화 속 카에데의 대사처럼 “스스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 “진정한 내가” 된다.

이 어두운 구멍과의 투쟁엔 동반자가 필요하다. 큐타가 여자 친구와 함께 괴물이 된 이치로히코와 맞섰던 것처럼 내 안의 슬픔이나 우울, 부정적인 기운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싸우고 물리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큐타가 쿠마테츠의 영혼이 들어간 검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결국엔 자신의 가슴에 그 검의 기운을 간직하고 사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 검과 같은 결연하면서도 따뜻한 의지,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기운을 마음에 간직하여 그 힘으로 어두운 구멍을 몰아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진=이톡뉴스)
(사진=이톡뉴스)

 

우린 모두 같은 투쟁 끝에 어른이 됐다


얼마 전, 이십 여 년 만에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를 만났다. 당시 내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친구는 유복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진 적이 있었는데, 서울의 전통적인 부촌의 이층집이었다. 그의 방엔 좋은 컴퓨터를 비롯해 없는 것이 없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락이 끊겼지만, 난 다른 친구는 몰라도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종 업계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친인척의 도움으로 손쉽게 사회에 진출하여 비교적 빨리 자리를 잡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무난하게 살줄 알았다. 또 그렇게 산 줄 알았다.

세 시간 정도, 서로의 이십 여 년을 이야기했다. 그는 나보다 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속된말로 나보다 더 험난한 인생의 파도를 넘어 왔다. 많은 사업을 했고 성공도 했고 실패도 했다. 돈과 사람을 잃기도 했다. 그의 삶에 비하면 내 삶은 상대적으로 무난하고 평탄한 편이었다. 그렇게 맞은 오십 대의 그는 평온해 보였다. 아마 나도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둘 다 마음 속 어두운 구멍과 투쟁했다. 어둠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고 버티면서 그럭저럭 봐줄만한 어른이 됐다. 그가 어떤 힘, 누구의 도움으로 그 어둠을 이겨내고 어른이 됐는지 난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혼자서는 그 투쟁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괴물의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둠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인간이 어둠에 삼켜지진 않는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어둠에 삼켜지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선 카에데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마, 언제 어느 때건 홀로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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