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도서관을 둘러싼 뉴스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온오프라인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 중 어떤 형태로든 책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있다. 출판사 사장도 있고, 편집자와 작가도 있다. 또, 도서관 사서도 몇 명 있다. 이 분들의 SNS를 보다 보면 이해당사자가 아니면 못 봤을 뉴스가 보인다. 당연히 도서관과 출판에 관한 뉴스다. 뉴스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행정 부서나 지자체의 판단에 따라 도서관이 용도 변경되거나 통폐합, 예산이 삭감되거나 출판 사업 지원에 축소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뉴스들을 보다가 불쑥, 정말 뜬금없이 이 영화 <투모로우>가 생각났다.

필자가 이렇게 뜬금없이 이 영화를 떠올린 건, 영화의 주인공인 기상학자의 아들이 친구들과 피신한 곳이 도서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도서관은 피난 장소로는 부적절하다.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골라야 했기에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의 입장에선 심사숙고 끝에 고른 장소이겠지만, 음식도 많고 다양한 시설을 갖춘 학교도 있고, 영화 <고질라(1998)>(참고로 이 영화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작품이다)에서 고질라가 숨었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과 세계인이 알아볼법한 고층 빌딩도 즐비한데 감독은 왜 하필이면 이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골랐을까? 이 답을 얻기 위해선, 일단 도서관과 책이 얽힌 역사의 순간을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2004) 스틸컷.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2004) 스틸컷.

도서관의 짧은 역사


중세 시대 때부터 수도원에 자리 잡기 시작한 도서관은 그 장서의 수가 몇 십 권에서 몇 백 권 수준이었다. 그 책들은 철저하게 수도사들의 공부를 위한 책들이었기에 평민들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이후, 도서관은 귀족과 왕들의 장서를 향한 열정과 세계 최고와 최대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한 경연장이 되기도 했다. 매튜 매틀스의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를 보면 도서관의 장서수와 규모를 두고 유럽의 제국과 이슬람 제국은 경쟁했고 그 도서관을 통해 제국의 힘을 과시했다. 그 과정 속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도서관은 신성한 장소이자 문화의 장소, 교육의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도서관이 물론 모든 시대에,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을 받고 그 지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어느 세계, 어느 시대에나 분서(焚書)의 역사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특히 히틀러 시대의 분서에 한 챕터를 할애했다. 나치군이 루뱅 도서관을, 속된 말로 어떻게 작살을 냈는지 아주 꼼꼼히 설명하고 있으며, 괴벨스의 묵인과 은근한 지원 아래 독일학생연맹이 소위 대중적인 소설과 희곡들을 도서관에서 긁어모아 태운 사건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괴벨스는 각 도시의 도서관에서 이런 책들의 화형식이 열릴 때면 종종 찾아가 연설을 했다고 한다.

도서관의 수난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금서(禁書)다. 앞서 말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정권을 잡은 1933년 이후 1년 만에 천 권의 금서 목록을 발표했으며, 그 후 1년 뒤에는 4천100권을 금서로 지정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금서의 역사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금서 항목에 간략히 정리된 역사를 간추려 보자. 우리나라의 금서 역사는 1411년 태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참은서와 음양서를 불태우게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금서 사건이다. 강명관 교수님이 쓴 2007년 주간 동아의 칼럼을 읽어보니 소위 개혁 군주라고 칭송받는 정조 또한 책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민감했던 모양이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천주교 관련 서적의 유통과 독서를 금지시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절되지 않자 아예 중국과의 책 무역을 막았다고 한다. 심지어 신하와 저자의 문체를 문제 삼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는 우리가 잘 아는 <열하일기>의 박지원의 문체와 규장각에 근무하던 엘리트였던 박제가와 이덕무의 문체를 폄하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후에 문체반정이라고 부른다. 이후, 다 알다시피 어떤 당파가 조정을 장악하는지에 따라 금서의 목록은 수시로 바뀌었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우려됐던 정감록이나 서구의 앞선 학문을 소개했던 서학 관련 책들도 금서로 지정됐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도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됐고, 잘 알다시피 군사정권 시절에도 여러 잡지가 폐간 되고 여러 서적들이 금서로 지정됐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상상화. 19세기 독일의 화가 코르벤이 당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현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저작=퍼블릭도메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상상화. 19세기 독일의 화가 코르벤이 당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재현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저작=퍼블릭도메인)

 

도서관을 그냥 놔둬도 되는 이유


이렇게 도서관과 분서와 금서의 역사를 짧게나마 이야기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서 피난 장소로 선택된 도서관의 의미를 찾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최근 책과 도서관, 그리고 출판사가 문화 뉴스가 아닌 정치 뉴스에 나오게 된 갈등의 대안 같지 않은 대안을 넌지시 제시하고 싶은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이를 위해 일단, 정치가 도서관에 신경 쓰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에 설명해보려 한다.

필자는, 일단, 클릭만 하면 모든 서적을 볼 수 있는 이 시대에 굳이 도서관과 책, 그리고 출판업계를 건드려 뉴스를 만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독서와 출판에 대한 통계를, 그러니까 알게 되면 무지하게 안심될 만한 통계를 제시해 보겠다. 일단 2020년에서 2021년의 자료를 바탕으로 발표된 2022년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의 독서율은 47.5퍼센트다. 쉽게 말해 어떤 형태-종이, 오디오 북, 전자책 할 것 없이-의 책이든 한 권 이상 본 사람이 두 명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난 이것도 표본의 허위 응답이 더 많을 것이라 본다.). 이들이 일 년에 평균 읽는 책의 권수는 4.5권이다(이 또한 부풀려 대답하지 않았을까?). 이 수치는 2019년에 비하면, 독서율은 8.2퍼센트 줄어든 것이고, 책의 권수는 무려 3권이 줄어든 것이다. 서점과 출판사의 폐업률과 그 증가 속도는 마음 아프니 넘어가자.

히틀러의 '나의 투쟁' 1927년 초판본
히틀러의 '나의 투쟁' 1927년 초판본

 

더 안심될만한 이야기를 한다면, 아이 때문에 지역의 크고 작은 도서관을 드나들며 제법 찬찬히 소장 도서들을 봤지만 작은 도서관일수록 대중서적이 대부분이다. 대형 시립 도서관이라 해도 의미심장한 책은 거의 없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마르크스의 <자본>을 구비하고 있는 쌈지 도서관이나 구립 도서관은 드물다. 영화 <세븐>에 나온 것처럼, FBI가 그 대출 명단을 챙겨볼 만한 책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설령 있다고 해도 누가 읽겠는가? 두 명 중 한 명, 그나마도 일 년에 고작 네 권 정도를 읽는 사람이 심히 걱정될만한 책을 읽겠는가? 잘해야 부동산이나 주식 관련 책일 테고 좀 심난한 사람이라면 위로와 힐링에 관한 책, TV에서 언급한 가벼운 역사책이나 아이나 개 키우기에 관련된 책정도 일 것이다.

그러니 도서관은 그냥 놔둬도 된다. 도서관은 공원이나 박물관, 지역 축제 같은 것이다. 돈이 들어갈 곳은 많아도 돈이 나올 곳은 없는 곳이지만 있어야 하는 곳이다. 그렇게 놔두면, 정말 영화 <투모로우>에서처럼 도시에 재난이 났을 때 대피소로 쓰일 수도 있다. 도서관과 박물관은 책과 소장품을 보호하기 위해 최고의 공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물론이고 도서관 또한 재난 이후에 더 필요한 공간이다. 그래서야 안 되겠지만, 우리가 만약 우리의 도시와 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큰 재난을 맞이했다면, 그 후에, 우리가 다시 문명을 시작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언어와 미적분을 가르치고, 동물과 식물에 대해 무슨 수로 가르치겠는가? 도서관은 그런 곳이다. 종자보관소보다 더한 곳, 인류의 종자를 보관해 놓은 방주, 시드 볼트 같은 곳이다. 지구의 단 두 곳 밖에 없다는 바로 그곳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도서관은 시드 볼트다. 그리고 피난처다. 다른 논리가 사람의 가치를 앞질러 세상을 좌지우지하여 흉흉할 때, 그런 세상을 잠시 벗어나 이성의 불을 밝히며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피난 온 사람들이 밝혀 온 이성의 불꽃과 그 불씨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이성을 잃었을 때, 마음의 온기를 잃었을 때, 투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다시 우리가 사람임을, 우리에겐 문명을 만든 이성이 있음을 다시금 깨우쳐 주는 곳이다. 그러니, 도서관은 사서들과 서가를 서성이는 이들이 알아서 하게 그냥 놔두자.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