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월호]

[그때그시절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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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없는 자연생활 시절

몽당연필 3가마

작가 洪昌一(홍창일), 사진인생 45

꿈과 희망의 기록새마을 정신

세월이 야속하지만 지나온 세월이 결코 허무한 것은 아니다. 그때 그시절 사람과 삶의 추억이 지금은 너무나 아름답게 회상되니 세월의 값진 자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이치는 마찬가지 이다. 자식 낳아 기르고 가르쳐서 좀더 훌륭한 후대가 이 땅을 지키고 발전시킬 것을 소망하는 것이 우리네 본심이다. 그래서 그때 그시절 사람과 삶을 되돌아 보는 것은 어제의 우리네 얼굴을 거울에 비쳐 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지금에야 아름다운 추억 아니고 무엇인가.

28년전 전북 김제 초처국교

지금으로부터 28년전, 1976년 몽당연필 산더미 앞에 티 없이 맑고 밝은 함박 웃음이 기록에 남아있다.

전북 김제시 봉남면 신흥리 초처국민학교 반 대표 19명의 어린이들 얼굴이다. 겨우 2?3cm 끄트머리만 남은 몽당연필을 쌓아두고 남녀 어린이가 천진하게 웃는다.

현장을 기록한 사진작가 홍창일(洪昌一) 씨는 아마 몽당연필 갯수가 세가마니는 될 것이라고 회고한다. 가마니에 모아뒀던 것을 사진찍기 위해 쏟아 부을 때 하나, , 셋으로 기억한다.

사진 속의 초처국민학생들 얼굴은 신난다는 표정이다. 깎고 깎아 침발라 쓰다가 영 못쓰게 된 몽당연필을 모아 뒀다가 사진이라도 찍게 됐으니 신나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벌써 스물여덟해 전의 일이니 지금은 30대 후반의 이 나라 주인들이다. 물론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여 386 세대의 주축으로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신세대가 국정을 주도하는 시절이니 정치권에 진출했었다면 지난 4·15 총선을 통해 국회에 등원, 국정에 참여하고 있을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땅 어느 두메산골을 찾아 헤매도 몽당연필을 다시 볼 수 없는 장면이니 이제사 아쉽고 아름답게 회상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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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하고 얼굴 예쁜 반 대표들

비단 김제 초처국민학교 뿐이겠는가. 오늘의 6070 세대야 말할 것도 없고 3040, 4050 등 풍요의 세대인들 몽당연필을 모르기야 하겠는가.

우리경제가 워낙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했기에 금방 가난이 풍요로 급변하여 몽당연필 기억을 잊고 지낼런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잠시 옛 앨범이나 일기장을 뒤적이면 손때 자욱한 낡은 책가방과 학용품이 금방 기억되어 콧날이 시큰시큰 해 질 것이다.2011-01-11_145622.jpg

1976년의 김제 초처국민학교는 교장 선생님과 교사들이 근검절약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학교새마을 우수학교로 지정되었다. 이에 새마을 기록 사진사인 홍창일 씨가 현장으로 달려가 근검절약의 상징인 몽당연필의 주인공들 모습을 찰칵 찍었다.

모두가 반 대표들이니 얼굴 이쁘고 공부도 썩 잘하는 학생들이다. 그러니 지금쯤 이 나라의 가운데 기둥으로 성장하여 각계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아마도 초처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고교 및 대학까지 모범생으로 학업을 마치고 정규 입시를 거쳐 직장의 중상위 간부직에 올라있을 것이다.

초처국민학교가 지금은 초처초등학교로 개명했지만 이들 몽당연필 졸업생들은 이 시절 70년대 모교의 사랑과 자부심을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

삼양타이어 박상구 사장의 경우

작가 홍창일 씨는 이 무렵 삼양타이어 공장새마을운동을 진두 지휘하던 당시 박상구(朴祥求) 사장의 열정적인 모습을 기억한다.

당시 부도 위기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박 사장은 공장 새마을운동이 일종의 신앙지도자로 앞장 섰다.

이무렵 제조업체들은 세계적 오일쇼크의 능력으로 거의 죽다가 살아나 근검과 절약 및 야근과 특근으로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사장과 사원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이때 박 사장이 앞장서고 사원들이 뒤따르자 회사는 부도 위험을 극복하고 되살아 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이로부터 두차례나 새마을 훈장을 받았다. 흑백사진을 통해 그때를 되돌아 보면 작업복과 작업모를 쓰고 열기 자욱한 공장 내부를 샅샅이 밟고 다니는 박 사장의 얼굴에 순수한 신앙이 절로 보인다.

타이어 기계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마치 부처님이나 예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나 다름 없다.

홍창일 씨는 이 시절 삼양 타이어 공장을 둘러 본 소감으로 이 시절 사랑의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솔선수범하여 부도위기를 넘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한다.

박 사장은 이 시절 새마을 운동에 심취하여 나중에 따님이 출가할 때 사위를 공장 내부에서 골랐을 뿐 아니라 나라에서 권장하던 가족계획에도 적극 호응했다고 한다.

박상구 사장은 광주여객 지배인과 전무를 거쳐 삼양타이어로 옮겨 1979년 사장, ’80년 부회장, ’81년 회장을 역임했다.

나무와 돌과 오염없는 사회

홍창일 씨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그때를 불신과 오염이 없는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나무와 돌과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함께 정직한 땀과 열성으로 잘 살아 보자고 했으니 무균과 무부패 시절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당시 몽당연필은 대다수 학생들의 필수 학용품이었다. 선생님들이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연필 한자루 고무 지우개 한개를 함부로 쓰다 버리는 법이 없었다. 절약과 재활용이 거의 천성적 학습교재였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시범을 많이 보여 주었었다. 칼국수와 막걸리가 보여주기 위한 대통령의 먹거리가 아니었다. 진실로 쌀이 모자라 분식을 장려해야만 했고 먹는 입을 즐기기 위해 산아제한을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시락을 검사하여 잡곡밥이 아니면 벌을 서야 했던 일들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지만 그때 그시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기억이다.

뒷날 민주화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는 모습을 TV로 보여 주었지만 70년대 나랏님의 칼국수와는 질과 뜻이 전혀 달랐다.

작가 홍창일 씨는 새마을운동 시절의 이야기를 화보로 꾸며 오늘의 풍요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오염 안되고 부패 없었던 그시절 이야기를 오늘의 국정을 책임진 세대와 그 다음 세대에까지 들려주고 싶은 것이 필생의 소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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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대통령에게 행운의 열쇠

홍창일 씨는 1941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지만 강원도 원성군 귀래면 주포리에서 자란 시골 소년이었다. 지금은 도시 광역화로 충주시와 원주시로 불리지만 홍 씨가 태어나고 자랄 때는 자연 그대로의 농촌 마을이었다.

강원도와 충북을 돌다리 하나로 연결한 풍산홍 씨 집성촌이었다. 이곳의 시골소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꿈이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을 다니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나 홍 씨가 열일곱에 상경했을 때 집안 형님의 친구인 김종양씨의 새한칼러 사진을 만나 대학진학을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김종양 사장은 우리나라 칼러사진의 개척자이다. 당시로서는 선진국인 필리핀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서라벌예대의 사진학과 창설에도 참여한 선구자이다. 1958, 흑백사진 시대에 새한칼러와의 만남이 홍 씨의 일생을 사진작가로 인도했다. 당시 나라에 경사가 벌어져도 칼러사진을 찍을 기술과 장비가 없었다. 새한칼러에게 중요한 나랏일을 칼러로 기록해 주도록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홍 씨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여 서울시청 현관에서 김현옥(金玄玉) 사장이 행운의 열쇠를 증정하던 장면을 칼러로 찍었다.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바쁜 일정을 보내고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의 화보집도 홍 씨가 만들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이 워커힐호텔에 투숙했을 때 침대의 사이즈가 작아 특별히 새 침대를 준비했던 일이나 카티샥 양주를 주문하여 조니워커 대신에 카티샥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것이 화제였다.

홍 씨는 그때 서울시청 앞에서 행운의 열쇠를 증정하던 칼러사진을 우리나라 첫 외빈 칼러사진이라며 보물처럼 여긴다.

6070 세대의 삶과 꿈

불도저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은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사임해야만 했다. 홍 씨는 사건 다음날부터 이한림(李翰林) 장관이 불도저 처럼 밀어붙이는 건설부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011-01-11_145633.jpg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칼러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그의 긴급 업무였다.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서부터 각종 터널공사와 준공식 장면 등을 칼러화보로 제작했다.

당시 건설부 출입기자인 MBC 강성구(姜成求) 기자를 기억한다. 뒷날 MBC 사장을 거쳐 민주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당시의 강 기자가 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여러번 취재하는 모습을 감명 깊게 지켜봤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홍 씨는 경제개발 현장 기록사로서 전국을 샅샅이 누볐다. 수출 공단을 비롯하여 포스코, 한국비료, 현대중공업, 소양강 댐, 부산과 인천 부두공사 등 그의 카메라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현장의 숨결이 그의 기록사진에 몽땅 담겨졌음은 물론이다.

그뒤 홍 씨는 새마을운동이 번지자 청와대로 올라가 1980년까지 근무했다. 정무수석 홍종철씨, 비서관 정종택씨 시절 청와대가 움직이는 새마을 깃발을 따라 마을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고 공장을 닦는 현장에 홍 씨의 카메라가 필수 요원이었다. 홍씨는 그시절 기록을 양으로 따지면 얼마일까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노라고 고개를 내 젖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는 곧 새마을운동의 무단종식이나 다름없었다. 5공화국에서 새마을중앙회가 정치색을 띄우면서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은 변질되고 새마을 지도자들은 기를 잃고 말았다.

홍 씨도 청와대를 나와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옛기록물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궁리했다. 그러다가 86년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칼러화보를 제작하고 은퇴한 후 사진인생 45년을 향촌(鄕村)으로 엮기로 했다.

홍씨는 자신의 향촌이 개인의 기록이 아닌 오늘의 6070 세대가 고뇌하며 활기차게 살아온 우리사회의 역사로 읽혀질 것을 고대하며 마지막 정리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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