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 굴곡· 파동에도 5無 경영문화

손해 봐도 차라리 원칙…
변질·변형 없는 창업정신
해운 굴곡· 파동에도 5無 경영문화

▲ KSS해운 특유의 육각형 로고

KSS해운의 창업 전야는 각종 난관과 장벽이 겹쳤지만 창업주 박종규 회장의 공격적 추진력으로 돌파했다. 한 고비를 넘긴 후 케미칼 화물운송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융성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던 불운으로 좌절을 경험하고 정부의 해운산업 통폐합 방침에 따라 죽다가 살아난 자구(自救)노력으로 부활, 회생함으로써 더욱 확고한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리베이트, 이중장부 등 5無 경영

KSS해운이 창업 이후 몇 단계의 굴곡과 파동을 겪었지만 창업의 기본정신은 변질, 변형되지 않고 일관되어 왔다. 리베이트 없는 해운사의 기틀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창업주의 확고한 신념인 ‘바른경제’, ‘바른자본주의’를 오늘까지 지향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박종규 회장의 창업 및 경영정신은 각종 수상을 통해 언론의 평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KSS해운에는 사시(社是)를 비롯하여 인맥(人脈), 리베이트, 이중장부, 밀수 등 다섯 가지가 없는 5무(無) 해운사라는 평판이 나왔다.
회사에 사시가 없다는 것은 ‘지시형 구호’가 따로 없다는 뜻이고, 인맥이 없다는 것은 창업의 혈맥이 없고 학연이나 지연이 없다는 의미다. 또 리베이트가 없다는 것은 선박계약 단계에서부터 경험했던 ‘뒷돈거래’ 유혹을 과감히 떨쳐 버렸다는 뜻이고, 이중장부가 없다는 것은 분식회계에 의한 비자금 조성이 없었다는 의미다. 이밖에 밀수가 없다는 것은 외항선 선원 등의 부수입원 처럼 인식되어온 시계나 화장품 밀반입 등 ‘고착형 비리’를 근절시켰다는 뜻이다.

▲ 나진항에 선 전용만 회장, 배홍철 나진항장, 박종규 회장 (왼쪽부터).

이 같은 5무 경영풍토는 CEO의 강력한 의지가 바탕이지만 내부 간부진과 선장, 선원 등이 모두 적극 동참했기에 이룩될 수 있었던 KSS해운의 경영문화라고 할 수 있다. KSS해운 우리사주조합이 발행한 ‘손해 봐도 차라리 원칙을 지킨다’(1999.12)가 바로 이를 잘 말해 준다.
리베이트와 비자금이 없는 경영문화와 관련한 에피소드 한 토막이 이 책 속에 소개되어 있다.
박 회장이 해외출장 중일 때 국세청의 세무조사팀이 회사 장부를 뒤져보고 압수수색하다가 미국 유학 중인 박 회장 아들의 편지를 발견하여 이를 읽어 본 국세청 직원들이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 편지 속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무리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도 월 생활비 100달러가 부족하니 이를 송금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한 대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박 회장은 아들이 유학생활을 통해 근면과 자립정신을 익히도록 단돈 100달러의 용돈도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국세청 세무조사팀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장부조작과 분식회계 등 의심을 풀고 돌아갔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 가나안농군학교 연수를 마치고…

바른 자본주의를 위한 신념과 행동

박 회장은 1994년 9월, 고 김용기 장로가 설립한 가나안농군학교 제정 ‘일가상’(一家賞) 산업부문 수상소감을 통해 자신이 추구해 온 바른 자본주의 실천의지를 밝혔다.
박 회장은 국영 해운공사 10여 년간 바다를 알고 선원생활을 알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조합간부로 4년간 활동하며 선원들의 해외송출을 성사시킨 보람을 회고했다. 또한 종업원 지주제 도입을 위해 해운공사 주식 100주 사기 운동을 벌여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 비서실장마저 100주 주주로 서명을 받은 비화를 공개했다. 종업원이 회사주식을 보유하는 것은 주식분산의 의미도 있지만 종업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우리회사 만들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해운공사에서 끝내 소망을 성취하지 못해 KSS해운(당시 한국특수선주식회사) 창업을 통해 창업동지 3분의 1, 이맹기 회장과 자신이 각각 3분의 1 출자로 종업원 지주회사를 실현했다고 밝혔다. 그 뒤 회사가 발전하면서 종업원 지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외부 인사들의 참여를 권장하여 자신의 지분은 20%대로 낮아졌다는 이야기다.
박 회장은 KSS해운은 창업 시부터 종업원 회사로 출발했기에 자식을 후계자로 심어 놓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해운업계의 관행처럼 성행하던 리베이트 풍토 속에 오직 기술력과 의지에 의존하여 위험화물을 운송하는 노하우를 쌓아 왔다고 밝혔다.
당시 박 회장은 KSS해운이 중소기업 규모에 지나지 않지만 믿는 것은 오직 천민자본주의가 아닌 바른 자본주의라고 강조했다.

기아사태와 전문 경영체제에의 고언

박 회장은 IMF 외환위기 때 기아(起亞)사태를 계기로 전문 경영인체제에 관한 일부 비판이 일어나자 오너경영을 옹호하기 위해 전문 경영체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 반론을 제기했다.

▲ 선원들의 사랑방 선원노조 사무실

일본의 경영계에는 100대 기업 가운데 전문 경영인이 96개 기업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기아산업과 유한양행의 2개사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기아의 부도사태는 결코 전문 경영체제가 옳지 못해 빚어진 경우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기아가 주인이 없어서 망했다고 주장한다면 주인이 있던 진로, 대농, 한보그룹 등은 왜 망했는가. 기아사태의 원인은 전문 경영인이 재벌총수의 경영방식을 모방하여 본업과 관련 없는 계열사 등 무려 28개 기업을 거느린 방만경영이었다.
또한 최고 경영자가 권력기반을 주주에게 두지 않고 종업원에게만 의지하여 사실상 노조와 동침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기아그룹의 ‘노사공동경영’ 방식은 파업기간 중에도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포기한 것이 사실이었다.

▲ 89년 4월, 홍콩에서 열린 가스로망호 건조 계약 체결식에서 박 회장(왼쪽)

박 회장은 감시체제가 없는 그룹총수의 장기집권은 필연코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유한양행의 경우 창업주가 작고한 이후 전문 경영체제로 평균 5년마다 CEO가 교체되면서 아무런 탈 없이 안정 경영을 지속하고 있다고 비교 설명했다.
박 회장은 강성 노조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기아노조가 취약한 경영권을 볼모로 자기네 몫을 늘리기에 골몰한 사이에 기업은 서서히 침몰하고 말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기아사태의 수습방안으로는 금융계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앞서 노사 간 과감한 감량경영을 실행하고 경영의 유연성을 제한하는 기존 단체협약의 백지화와 모든 책임자의 사퇴 등으로 제3자 인수방식이 아닌 국민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고언했다.
그 뒤 기아사태는 현대차그룹에 인수되어 오늘의 기아자동차로 부흥, 글로벌 빅5 대열로 진입했으니 획기적인 성공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기아자동차의 창업주나 전문 경영인체제의 명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으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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