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서 파독광부까지 눈물의 역사

광복70년 현대사 체험수기
피와 땀의 생존투쟁사
국민행동본부· 조갑제닷컴 공모시상
6.25에서 파독광부까지 눈물의 역사

국민행동본부와 조갑제닷컴이 광복 70주년 기념 현대사 체험수기를 공모하여 지난 10월 2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당선작 18편을 시상했다. 체험수기는 6.25와 월남전 참전, 파독광부와 간호사 이야기, 중동 근로자 등 220명이 응모하여 최우수상 1명, 우수상 5명, 가작 12명이 수상했다. 이들 체험수기는 연내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배포할 예정이다.

▲ ‘광복 70주년 기념 현대사 체험수기 시상식에서 수상자’ 와 서정갑 본부장, 조갑제 대표 등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조갑제닷컴>

피와 땀과 눈물의 체험수기들

최우수상은 1983년 대한전선에 입사하여 수출담당으로부터 30년간 아프리카, 중동시장을 누빈 김진한(金珍漢) 씨의 이야기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수출제일주의 시대 수출 전사(戰士)들의 24시간을 증언한다.
우수상은 △우필형(禹必亨), 김영진(金永眞) 경찰관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소년들을 위한 재건학교를 세워 제자들과 함께 기록한 ‘동인천 재건학교’ 이야기 △강원도 양양군 김집(金鏶) 씨의 5대독자 아들과 함께 입대한 43세 아버지의 파란만장 이야기 △6.25로 부모를 잃고 자수성가하여 여교장에 오른 박창진(朴昌鎭)씨 △중졸 출신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박사학위에 오른 오상환(吳尙煥) 씨의 주경야독 이야기 △월남전 참전과 파독광부를 다녀온 이범영(李範永) 씨의 성공기 등.
가작 12편은 △파독 간호사 고영숙(高永淑)씨 △벼 품종개량연구관 김종호(金鍾昊) 박사 △공군대령 출신 김중광(金重光) 씨의 애국운동 △고학으로 교사가 되어 38년간 교단을 지킨 김지태(金智泰)씨 △이념대립으로 피 묻은 김형좌(金亨佐) 목사댁 이야기 △38년간 시집살이 박금자(朴金子)씨 이야기 △함흥의대 출신 오윤근(吳允根) 씨의 월남이야기 △해사출신 이동권(李東權) 선장 이야기 △11공수여단 소속 이정식(李 正湜) 소위(미국거주)의 광주사태 현장 체험기 △만주에서 제주도까지 정경균(鄭慶均) 씨의 피난기 △독학으로 중동 진출한 홍원주(洪元周)씨 이야기 △황경춘(黃敬春) 씨의 8.15 직후 미군 통역으로부터 AP통신기자까지 이야기 등.

우리시대 생존투쟁…국민실록

이날 시상식에서 국민행동본부 서정갑(徐貞甲) 본부장은 광복 70주년 기념 현대사 체험수기 현상 공모는 지난해 말 개봉된 ‘국제시장’ 영화에 감동 받아 현대사를 체험해 온 수많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우리시대의 위대한 성취를 후세에 남기자는 뜻으로 기획했다고 밝혔다.
서 본부장은 응모수기 220편이 모두 감동스토리지만 재정형편상 한계로 열여덟 명만 선정, 시상했으나 수기를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는 나머지 수기 내용들도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 본부장은 이번 행사를 진행하면서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룩한 기성세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 전에 남아 있는 ‘마지막 전투’가 우리가 체험한 현대사를 진솔하게 기록하여 후대로 전해 주는 국민운동임을 깨달았으며 이들 기록은 국가기록원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수상작 본 심사에 참여했던 조갑제 대표는 이번 현대사 체험수기는 다양한 직종에서 응모한 집단증언으로 ‘국민실록’(國民實錄)이자 우리의 생존투쟁 역사라고 논평했다. 조 대표는 대한민국 현대사는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으로 발전해 왔으며 성공요인은 자유민주주의 제도, 희생적인 지도층, 근면한 국민, 미국의 지원 등이라고 요약 설명했다.
조 대표는 대한민국 발전은 아직도 미완성이기에 고칠 것과 반성할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당면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 전쟁도 극복의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환갑노인 석사, 74세 재난과학 박사

▲ 최우수상 수상자 김진한 씨 (왼쪽 두번째). <사진=조갑제닷컴>

우수상 오상환(吳尙煥) 박사의 ‘일하며 공부하고 살았다’는 수기는 인간승리의 감동으로 넘치는 우리시대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오씨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귀국 후 초등학교 2학년 때 6.25를 만나 대전 한밭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난으로 진학이 어려워 18세에 이등병으로 입대, 12년간 복무하며 육군중사로 제대했다. 그로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주경야독으로 열관리사, 공조냉동기계기사, 소방설비 기술사 등 10여 개의 국가기술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기술자격을 바탕으로 백화점 기계설비팀장으로 성실히 근무했지만 1997년 12월, IMF 여파로 해고되니 너무 억울했다. 이에 59세의 늦은 나이에 소방설비 기술사 시험도 도전했다.
기술사(技術士) 시험은 대졸이상 학력에 국가기술자격 1급 기사 및 실무경험 4년 이상이었지만 오씨는 열관리사로 18년간 실무경험을 쌓았기에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하루 10시간, 공휴일과 명절도 없이 4년 6개월간 시험공부에 매달려 환갑날에도 시립도서관과 안양과학대 도서관에서 보냈다.
2001년 첫 번 도전에서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 이듬해에 환갑노인으로 합격하여 모 종합건축사무소 이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씨는 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63세에 검정고시학원에 등록, 3개월 만에 경기도가 시행한 고졸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2004년 3월 서울산업대(현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에 입학, 방재공학(防災工學) 석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다시 박사학위에 도전하여 인천 송도 글로벌대학 캠퍼스 공사장과 청주시 북대동 45층 아파트 신축 공사장을 오가며 소방관리원 임무를 수행하면서 장거리 통학으로 국내 재난과학(災難科學) 1호로 학위를 취득했다. 74세의 고령으로 박사가 되어 지금은 ㈜선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상무이사로 근무한다.

좌익의 인간말살로 피 묻은 가족사

전북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의 김형좌(金亨佐) 목사의 ‘좌익들의 만행…피 묻은 가족사’는 6.25 남침전쟁이 가져온 잔혹한 인간말살 기록이다.
김 목사는 1934년 기독교 집안의 4남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나 8.15 해방공간의 마을 주민마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이념대립을 지켜봤다.
6.25로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대동청년단 간부이던 둘째 형은 집을 떠나 몸을 숨겼지만 좌익 편에 섰던 백부와 사촌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나 동네 인민위원회서 반동을 다 죽이라고 하니 도망 간 둘째(김형배)를 내 놓으라고 야단쳤다. 그 사이 교인 가운데 밀고자가 있어 좌익들이 전주 고모 집에 숨어있던 둘째 형을 잡아와 꽁꽁 묶어 산채로 모래사장에 묻어 죽였다.
국군의 북진으로 인민군이 도주하자 붉은 완장의 백부는 급사하고 아들은 자살하고 손자 하나는 산에서 돌에 치어 죽고 말았으니 천벌을 받은 꼴이다.
또 이종사촌 윤아무개는 산 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경찰서를 점거하고 경찰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필자가 달려가 ‘아무개형 자수하시오’라고 권했더니 “형좌야, 네가 이리 오라”고 되받았다. 그 뒤 몇 년 전에 빨치산 추모제가 있었는데 그 이종사촌이 추도사를 했다는 소문을 듣고 집안 혼사가 있던 날 예식장에서 만나 “그때 우리 형님을 왜 그토록 참혹하게 죽였소”라고 묻고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어찌 빨치산 추모사를 할 수 있소”라고 따졌다.
그는 “시절이 그러하여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좌익에 부화뇌동했던 그도 담낭암으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비단 이념으로 얼룩진 피 묻은 가족사가 김형좌 목사댁 뿐이겠는가.

인민군 군의관 탈출한 자유로의 여정

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 군의관이 됐다가 탈영하여 국군이 북진할 때 미군 통역이 되고 영어교사로 정년을 마친 오윤근(吳允根, 90세) 선생의 수기는 인생역전의 기록이다.
함경북도 두만강 남안 국경마을에서 태어난 오 선생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손목시계를 강탈당했다. 당시 소련병사들은 노략질로 팔목에 서너 개씩 시계를 차고 있었다.
1946년 3월 13일 함흥 반공학생들의 소련군 만행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1945년 11월 23일의 신의주 반공학생 의거 다음으로 규모가 큰 반소련 데모였다. 1950년 들어 전쟁준비로 함흥에도 인민군이 주둔하더니 6.25 남침을 개시한 후 ‘전쟁승리를 위한 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강의실에서는 입대지원 행사가 벌어졌다.
오 선생은 북청 예비사단으로 동원되어 학생복장으로 장교식당에서 숙식하며 친구 범은이와 탈영을 준비했다. 걸어서 고향마을 고갯마루에 이르러 국군과 유엔군을 만나 마을이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1950년 12월 6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후퇴하여 오 선생과 친구는 고기잡이 범선을 타고 20여일 만에 구룡포에 기항했다가 포항 양포읍까지 걸어 파출소에 물어보니 경주에 가면 육군병원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경주 시내에서 미군부대 통역으로 근무하는 학교 친구 김신현을 만나 친구와 함께 미군통역이 되어 부대가 인제로 이동했다가 휴전을 맞았다.
1954년 미군부대 근무를 끝내고 홍천농고 영어교사가 되어 자유로의 여정은 험난했지만 전쟁 통에 살아남아 제자들을 가르치니 큰 행운이라 여겼다. 지금은 고향 떠난 지 65년, 부모형제를 다 잃었지만 마지막 남은 소망이라야 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이다.

월남파병, 서독광부로 젊음을 불태워…

우수작 이범영(李範永) 씨의 ‘월남전과 파독광부 이야기’는 조국 근대화에 젊음을 불태운 자부심의 기록이다.
1944년 김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 씨는 중학교 졸업 후 국립 농산물검사소 급사로 취직했다가 1년 만에 시험보조원으로 승급했지만 1965년 징집으로 논산훈련소를 거쳐 월남 파병을 자원했다. 1966년 1월 5일 밤, 베트콩과 첫 전투를 겪었다. 3월 23일에는 채명신 사령관이 적의 점령지역 한 가운데로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장병 여러분은 모두 애국자”라고 말하고 “전투수당은 1달러라도 아껴 본국으로 송금하여 국가와 국군의 명예를 지키는 용맹 맹호용사가 되라”고 격려했다.
목숨 값인 전투수당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아버님께 송금했다. 2년간 파월 복무를 마친 후 1967년 9월 만기제대 후 철도청 청원경찰이 되어 춘천 외곽 강촌구간의 철교 경비 초소장으로 근무하다 파독광부 모집에 응시, 3년간 지하막장에서 일했다. 월급 700마르크는 고향으로 송금했다.
파독 3년간 무결근, 무병가 기록을 세우고 다시 3년 연장근무를 신청했다. 1975년 10월에는 파독 간호보조사와 결혼, 첫 딸을 낳았다. 1977년 2월, 귀국 후 점포 달린 2층집을 사고 치킨집을 운영,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니 슬프고 원통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시키고 재혼도 하여 용감하게 개척했던 지난날의 보람에 감회에 젖곤 한다.

6.25 적치 겪고 초등교사로 38년 근속

3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후 은퇴한 김지태(金智泰) 선생(75)은 고학으로 교사가 되고 자녀 넷을 훌륭하게 키워낸 감동 스토리다.
6.25 전쟁 때 영월군 주촌면 마을은 머슴 출신과 젊은 여맹원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마을 사람들의 집안 내력을 인민군에게 일러 바쳤다. 어느 날 ‘반동분자의 집’이라고 낙인찍어 쉰다섯의 아버지에게 쌀짐을 지워 전선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제천, 단양, 충주를 거쳐 이화령으로 가던 중 미군기 폭격 중에 도망쳐 1주일 만에 귀가하여 형님과 같이 토굴에 숨어 지냈다.
전세가 역전되어 주천면 사무소에 다시 태극기가 휘날릴 때 붉은 완장 패거리들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학교 교사 둘은 월북했다. 아버지는 부역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애국자 집안’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1.4 후퇴로 제천을 떠나 충주로 피난가면서 길가에 얼어 죽은 시신들을 수없이 보았다.
1951년 1월 24일 다시 국군의 반격으로 귀가 도중 마을까지 8km 남은 공순원 고개에서 아버지께서 마을 형편을 살피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1953년 4월에는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큰형님의 유골함이 돌아왔다.
학업을 중단한지 4년 만에 초등학교 4학년에 복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살길이 막연하여 영월군 상동면 옥동광업소의 광부로 취직했다가 막장 사고로 팔과 허리를 다쳐 퇴사해야만 했다.
1963년 논산훈련소를 거쳐 1사단 15연대 제1대대에서 최전방 복무로 제대하여 군 복무 시 수상경력 등으로 영월군 하동면 모운초등학교 임시교사로 교육자의 길로 나섰다.
그 뒤 춘천교육대학에 임시 초등학교 교원 양성소가 설립되어 4개월 교육을 받고 삼척군 하장면의 미동초등학교 교사가 되니 임시교사, 준교사를 거쳐 정교사가 된 것이다. 다시 한국방송통신대학이 생겨 초등교육관에 입학, 3년 만에 졸업하고 초등교육 학사과정 4년도 마쳤다.
그 사이 3남1녀를 강원대와 상지대에 보내 큰딸은 어린이집 원장, 둘째 딸은 신라호텔, 셋째 딸은 고용노동부에 취직하고 아들은 농협중앙회에 다닌다. 38년간 교직을 마치고 은퇴해 조용히 살고 있으면서 이미 어른이 된 옛 제자들의 궁금한 소식을 기다린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6호 (2015년 12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채택된 제보는 사례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