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보좌관·비서실장 거쳐 3선의원

언론인에서 야당으로
YS와의 정치 20년
특별보좌관·비서실장 거쳐 3선의원
YS의 타고난 열정·집념 성취 감명

야당 3선 의원을 지낸 우사(又史) 박권흠(朴權欽) 한국차인연합회장이 지난 12월 4일, 경제풍월을 방문, 신년휘호로 새해를 격려해 주었다. 서예가인 박 회장은 경제풍월에 종종 기고를 보내 주시기도 했지만 새해 축하글은 완숙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 YS와 함께 활동하던 시절의 박권흠 회장(오른쪽). (사진 오른쪽) ▲ 저서 'YS와 나, 그리고 차'

새해 ‘정론직필’ 격려 후 YS 회고

근하신년(謹賀新年) 경제풍월(經濟風月) 정론직필(正論直筆)이란 대목이 너무나 흡족한 격려이다.
박 회장은 신문기자 출신으로 경제풍월을 애독하며 보수 우익 편집방향을 늘 지지하고 격려해 왔다.
민주신보, 국제신문을 거쳐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시절 YS가 그의 필력을 발탁하여 특별보좌역, 비서실장, 당 대변인 및 12대부터 3선 의원을 지냈다. 국회 건설위원장, 문공위원장을 역임한 후 도로공사 이사장을 거쳐 대구일보 사장으로 다시 본업에 복귀했다가 (사)한국차인연합회장을 맡아 24년간 다도대학원 등 한국 차문화 발전을 선도하면서 세계차연합회(WTU) 회장도 맡고 있다.
또 (사)사명당기념사업회장,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장 등 명예직도 많이 맡고 있다. 명예 정치학 박사에 한국서화작가협회장도 맡고 있고 ‘맹자의 직언’(直言), ‘정치의 현장’,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나의 차사랑 이야기’ 등 숱한 저술을 기록했다.

기자시절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집필

아호 우사(又史)는 YS 보좌관 시절, ‘역사를 다시 쓴다’는 각오로 지었다고 한다. 우사가 YS를 처음 만난 것은 부산 민주신보 기자 시절이었지만 5.16 혁명으로 국제신문 정치부로 옮겨 서울로 올라와 경향신문 정치부장 시절 YS맨이 됐다.
1963년 정치계는 야당의 대일굴욕외교 반대 투쟁이 극렬했다. 이 무렵 비상계엄으로 YS는 미 국무성 초청이란 명분으로 출국하여 120일간 구미 각국을 순방했다. 이듬해 YS가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너편 풍림식당으로 박 부장을 초대하여 대학노트 한 권의 여행기 메모를 내주면서 책으로 집필을 부탁했다.
당시 박 부장은 회현동 경동호텔에 방을 잡고 한 달 가량 낮에는 정치부장, 밤에는 YS 집필가로 세웠다. 메모를 읽고 책으로 엮으면서 “거제도 촌사람의 안목과 꿈은 과연 다르구나”라고 여겼다. 중학시절 하숙집 방 벽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적어 놨다는 꿈이 이런 것이었구나 짐작했다.
이때 원고가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는 제목으로 동아출판사가 간행하여 정가의 인기를 얻고 YS의 이미지가 국민 속에 자리 잡았다. 이 책이 2~3쇄를 거듭하자 YS가 아예 스피치 라이터로 기용했다.

스피치라이터로 40대 기수론 작성

YS가 민중당 원내총무로 정치력을 한껏 발휘하기 시작할 때 대외용 발언, 논평 등을 매일 대필해야만 했다. 박 부장이 작성한 YS의 말이 늘 신문에 보도됐다. 월간 사상계, 세대(世代)지, 월간 신동아 기고문도 박 부장이 대필하면 YS가 흡족히 여겼다.

▲ 박권흠 한국차인연합회장이 경제풍월을 방문, 신년휘호로 새해를 격려해 주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밀어부칠 때 신민당 유진오(兪鎭午) 총재의 건강이 대여 투쟁력 악화로 나타났다. 이때 YS가 사실상 당수역할을 대행했다. 42세의 YS가 1971년 대선에 출마하겠다면서 ‘40대 기수론’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의 기사회생(起死回生)을 위해 출마하겠다는 선언문을 박 부장이 작성하여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에 대해 당시 유진산(柳珍山) 당수가 ‘젖 냄새 난다’는 ‘구상유치’(口尙乳臭)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곧이어 DJ와 이철승 의원의 출마선언으로 40대 기수론이 부각되자 유 당수가 지명권을 행사했다. 당초 예상은 이철승 의원을 지명하리라고 관측됐지만 유 당수가 YS를 지명했다.
그러나 당 대회 결과 1차 투표에서는 YS가 1위를 차지했지만 2차 투표에서 DJ와 이철승계의 제휴로 YS가 낙선되고 말았다. 이때 YS가 흔쾌히 승복하고 DJ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대선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러 YS는 노태우·김종필과 3당 합당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DJ는 그 뒤 DJP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뒤 DJ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6년이 지나 YS도 88세로 별세했다.

YS와 함께한 정치인생 20년

1971년 대선 실패 후 YS는 1975년에 대비하여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박 부장은 경향신문 정치부를 떠나 YS 특별 보좌역으로 야당 정치의 길을 선택했다. 4선의 YS가 비서실장에 초선의 신상우(辛相佑) 의원(국회부의장 역임)을 지명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 17일 유신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말았다. 당시 YS는 주미 대사관 국정감사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한 반면 DJ는 망명을 선언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 박정희 투쟁활동을 벌였다.
1974년 4월 유진산 당수의 서거로 YS가 ‘반유신’ 성명야당의 기치를 내세워 총재 경선에 나서 당선됐다. 이 무렵 8.15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으로 서거하는 비극을 겪었다. 박권흠 보좌역이 YS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의 박정희 김영삼 영수회담을 수행하고 YH여공 사태를 겪었다.
그 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총재직 박탈, 국회 제명, 부마(釜馬)사태 등으로 격란을 겪고 10.26 국변으로까지 치달았다. 1974년 5월 전당대회에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의 공작정치가 극심하여 주위에서 ‘그만 포기합시다’라고 건의하자 YS가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당시 우사는 당 대변인으로 YS의 집념과 용기는 아무도 말릴 수 없노라고 생각했다.
우사는 YS 빈소에서 분향한 후 거제 섬아이 YS가 중학시절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다짐한 후 이를 필생의 성취목표로 삼아 투쟁하고 돌파해온 정치역정에 새삼 감복했다. YS는 늘 정권에 도전하기 위해 당권에 도전한다고 했고, 정권에 도전하지 않는 정당은 결코 정당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의 사후에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호칭된 것이 바로 이 같은 YS의 선명노선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1년 2월 ‘YS와 함께한 정치인생 20년’을 ‘YS와 나, 그리고 차’로 출간한 우사는 이를 다시 YS 영전에 바친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7호 (2016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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