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간첩 김동식씨, 자유경제원 강연
한국청년들, 북에 대한 환상 깨우쳐야

▲ 자유경제원은 ‘ 나는 좌파였다’ 연속세미나 여섯 번 째로, 1995년 부여간첩사건 의 핵심인물 김동식 씨(사진)를 초청해 좌파사상을 버린 이유와 이 시대 청년에 게 주는 고언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사진=자유경제원>

전 남파간첩 김동식 씨가 지난 3월 7일, 자유경제원 강연회에서 북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허구성을 말하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누가 공짜로 준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의 피살사건을 들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가 언제든지 김정은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여간첩으로 검거, 전향 22년

남파간첩 김동식(52) 씨는 1995년 충남 부여 정각사에서 경찰과 총격전 끝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검거된 후 22년이 지났다. 그는 지난 7일 하오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를 주제로 6번째 강연을 하면서 북한에서 태어나 30년간 보고 듣고 배우고 신념을 간직하여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사회주의 사상을 부정하고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살았던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가 결코 인민의 나라, 지상낙원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현실을 보면서 왕년의 신념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다고 사상전향의 계기를 털어놨다. 이날 김동식 씨는 두 차례에 걸쳐 남파 침투하여 공작 임무를 수행한 사실을 자세히 설명했다.

1차남파, 이선실 대동복귀 및 운동권 포섭

1990년 5월 1차 남파 시 김동식 씨의 임무는 ‘이선실’의 접선과 대동 복귀 및 운동권 포섭과 지하당 구축이었다. 그는 이 같은 임무를 맡아 조장 권중현과 함께 1990년 5월말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으로 침투하여 10월 17일 강화도를 통해 북으로 복귀할 때까지 6개월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서 활동했다.
이때 권중현, 이선실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 준비위 대외협력위원장 겸 조국통일위원장 손병선, 1980년 사북사태 주도 황인오 등을 노동당에 가입시키고 북으로 복귀할 때는 이선실과 황인오와 함께 갔다. 이 같은 공로로 조장 권중현과 김동식은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고 이선실은 그해 12월 묘향산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거물 여간첩 이선실은 1916년 11월 제주도의 작은 섬 가파도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광복 이후에는 부산에서 여맹간부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빨치산부대에 들어가 태백산을 넘나드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6.25 때는 서울로 내려와 여맹간부 활동을 했고 전후에는 북한에서 간부로 활동하다 1960년대는 대일 공작원이 됐으며 신분세탁 후 재일교포 ‘신순녀’ 명의로 영주 귀국 침투하여 1990년까지 10년간이나 서울에서 공작활동을 벌였다. 그 뒤 월북하여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권력서열 19위까지 올랐다.
김동식과 함께 월북했던 황인오는 월북 1주일 만에 되돌아와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조직했다가 1992년 가을 체포되어 법적처벌을 받았다. 4.19 세대인 손병선은 북한 노동당에 가입, 간첩활동 하다 황인오와 같은 시기에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처벌 받았다.

2차 남파 임무 ‘봉화1호’ 접선

김동식의 2차 남파는 1995년 9월로 남한에 침투해 있던 ‘봉화1호’의 안전한 대동 복귀와 남한에 자생한 주사파 운동권을 포섭, 지하당조직 구축이 임무였다. 이를 위해 조원 박광남을 대동하고 9월초 제주도 성산읍 온평리 해안으로 침투했다.
이때 서울, 광주, 안성 등을 오가며 포섭대상으로 선정해 온 운동권 인사는 허인회,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정동년, 고은, 황광우 등 7명이었지만 이들을 노동당에 가입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10월 24일, ‘봉화1호’와 접선하기 위해 부여 정각사에 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경찰과 국정원 수사관들과 총격전이 벌어져 관통상을 입고 검거됐다. 이로써 15년간의 남파 공작원 생활이 끝나게 된 것이다.
간첩 ‘봉화1호’는 1980년 봄 남해안을 통해 침투한 남파 공작원으로 6.25 때 월북한 충북 옥천 출신이다. 그는 1980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남파 공작임무를 수행한 베테랑 공작원으로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1980년 남파 시에는 스님으로 위장 침투했지만 6개월 만에 주민신고로 검찰에 검거 됐다가 전향했다.

자신의 가족 숙청 보고 북한정권에 배신감

김동식 씨는 사회주의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가족에 대한 숙청과 북한정권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남파 공작원 사상교육 할 때 최악의 경우 자폭이나 자살을 강조한다. 남파 공작원들은 목숨을 버릴 각오가 없으면 대남침투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10년간 혹독한 훈련을 받은 공작원들도 남파단계에 들어서면 죽을 수도 있다는 심적 압박감 때문에 탈락하는 경우가 생긴다. 김동식 씨는 15년간 사상교육과 강훈으로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어 두 차례나 침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총격전 끝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두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만약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안주머니에 있는 독약 앰플을 깨물고 자살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북한정권에 충성을 다하려 했지만 총상으로 체포된 것이다.
그 뒤 듣고 보니 북한정권이 그의 부모형제들을 모두 숙청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부친도 30년간 노동당 간부로 활동했지만 하루아침에 숙청됐으니 배신감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동식 씨는 봉화1호와의 무리한 접선을 지시한 북의 공작지도부가 책임져야 할 것을 총격전 끝에 부상으로 체포된 자신과 가족에게 책임을 지운 북한정권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지상낙원 아니고 사회주의 나라 아니다

김동식 씨는 북한에서 태어나 30년간 북한당국의 가르침을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3년 가을 노동당 간부로 현장체험을 하면서 인민의 나라, 지상낙원이 아니며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인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수령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김씨 일가는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1990년 초반,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공작부서에서 남한 운동권 내의 주사파와 비 주사파 간 이념논쟁처럼 주체사상과 수령 및 후계자론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고 관련 조치들을 취했다. 이 무렵 김동식 씨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위대하고 특출한 능력이 있어 지도자가 된 것이라는 억지주장에 할 말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함부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이론에 세습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김동식 씨는 좌파사상에 빠져 있는 한국청년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도록 촉구하고 특히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도록 강조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김씨 일가의 왕국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한국에서 태어날 때부터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어떤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 김정은의 노예일 뿐이다.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어디 있고 출판과 집회의 자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셋째로는 한국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가 선사했거나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를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김정은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김 씨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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