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래트럴(2004) 포스터
영화 콜래트럴(2004) 포스터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당장 가능한데서 커트를 하는 것이 평소 머리 손질의 버릇이다. 점심시간, 짬을 내 사무실 옆 미용실에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모양인지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뭐하는 사람들인지 한참을 듣던 아주머니는 보기보다 바쁘게 사는 내가 딱했던지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독서라고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요즘 편의점의 새로운 주인공인 국산 하우스 맥주를 하나씩 마셔 보는 것, 딸내미가 새로 만든 요상한 춤을 감상하는 것, 유튜브에서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도 취미라면 취미지만 그래도 돈과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행위를 취미라고 한다면 단연코 독서다. 아주머니는 독서라는 취미를 듣자마자 무심결에 피식 웃으셨다. 뭔가 역동적이면서 그럴싸한 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카피라이터나 작가라면 뭔가 색다른 취미를 갖고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게 독서라는 취미가 의외로 평범하게 여겨졌던 그날 밤 TV에서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가 <콜래트럴>이다.

세상 볼 일 없었을 두 남자


이 영화는 빈센트라는 청부살인업자가 LA에서 다섯 건의 살인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한 맥스라는 택시 운전사와 함께 밤새 겪는 일을 담고 있다. 빈센트는 다섯 건의 살인을 위해 맥스를 인질 같은 운전사로 데리고 다니며 LA 곳곳을 누빈다. 그 여정의 공간인 택시 안에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살인 현장에서 다양한 일을 함께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맥스가 빈센트에게 가장 이해 못하는 점은 사람과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살해에 대한 죄책감이 부재 한다는 점이다. 그 의문에 대해 빈센트는 이렇게 답한다. “LA의 지하철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6시간 동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이다. LA라는 큰 도시에서 한 사람이 죽는 게 뉴스가 되는지 되묻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뉴스로 다뤄지지 않는 대도시의 비정함은 빈센트를 닮아 있다. 빈센트에게 한 사람의 생명은 임무의 완수와 그 대가로 받는 자본의 출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에게 살인은 그저 일이고 사람의 생명은 달러로 환전 되는 또 다른 화폐일 뿐이다.

비정함의 또 다른 이름


빈센트의 이런 비정한 사고방식은 평범한 단어로 일상화 되어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다. 얼마 전 김누리 교수가 한 강연 프로그램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화 이후에도 사람을 나라와 도시, 기업의 자원으로 보는 것을 어색치 않게 여겼다. 현재 한 기업의 채용관련 공식 블로그의 제목도 “사람이 자원인 나라.”라고 되어 있다.

김누리 교수의 말처럼 우리사회는 지난 백 년간 존엄한 인간을 키우는 교육에 대해 생각할 틈 없이 오직 빈센트 같은 심장을 가진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는데 집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인재들이 만들어낸 지금의 사회를, 김누리 교수가 말한 능력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메리토크라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회를 살아가는 미래의 인재들은 수능 결과에 따라 대학이 달라지고 그 한 번의 결과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수많은 임무의 실행을 통해 얻어지는 측정 가능한 지표로 자신이 평가 받는 것 또한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콜래트럴(Collateral, 2004) 스틸텃.
콜래트럴(Collateral, 2004) 스틸텃.

실행이라는 가치


필자가 카피라이터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실행”이란 단어가 마케팅 분야의 주요 화두였다. 물론 지금도 한 온라인 서점에서 “실행”을 검색하면 4백여 권의 책이 뜨고, 경영 분야로만 국한해도 2백여 권이 된다. 빈센트에게도 실행은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런 빈센트에게 사람의 생명이나 맥스의 처지와 상황, 타깃의 입장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아무리 이러저러한 사정을 늘어 놔도, 하소연을 해도 해가 뜨기 전에 실행을 해야만 한다. 빈센트는 말 그대로 실행자이기 때문이다.

실행자는 영어로 번역하면 Executioner로, 사형집행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근대 이전까지는 칼이나 도끼로 직접 사형수의 목을 치는 사람,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망나니를 이렇게 불렀다. 직업으로서의 살인을 하는 빈센트는 어찌 보면 21세기의 망나니라고 할 수 있다. 단지 훨씬 더 효율성을 추구하고 더 고비용을 청구할 뿐.

실행자이자 가차 없는 집행자인 빈센트에게 맥스는 어떤 사람으로 평가 될까? 맥스는 우연히 택시에 탄 맘에 드는 여성에게 호감 표시조차 망설인다. 막상 받은 명함으로 그녀가 변호사임을 알자 통화는 자연스레 포기 된다. 12년 째 꿈꾸는 리무진 서비스 사업도 자동차 계약을 미루면서 여전히 조심스러워한다. 빈센트 입장에서 이런 맥스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한 실패자, 루저 일뿐인 것이다. 빈센트는 그런 맥스에게 “남은 평생 후회하며 TV드라마나 보다 죽을 것.”이라고 악담한다.

실행과 그 완수를 기준으로 다른 이를 과감히 비판하는 빈센트의 논리는 오찬호의 책 속에 등장하는, 학교 이름과 학과 이름이 큼직하게 새겨진 점퍼를 벗지 못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논리와 유사하다. 그 논리는 고도성장기,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었던 성과에 대한 절대 신성시함에서 잉태 됐을 것이다. 이후 그 신성함을 녹여 만든 자기개발서를 통해 우상으로 재탄생 되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떠받들어졌다. 그 추앙을 토대로 형성 된 무서운 종교는 빈센트를 꼭 닮은 괴물을 만들어내 왔다. 오찬호가 말한 괴물, “취업 준비를 위해 당연히 위장병이 걸려야 하는, 그리고 그것조차 이겨내야 하는 괴물이 취업하는 사회”를 당연시하며 받아들이는,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 같은 성도를 계속 만들어내 온 것이다.

실행자이긴 전에 존엄한 인간


결국 킬러 빈센트는 소시민 맥스의 총에 죽는다. 맥스는 살인은 고사하고 그저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왔던 사람이다. LA 시내 곳곳의 시간대별 도로 상황을 꿰뚫고 있다. 병문안에 흔한 꽃다발 하나 못 사들고 가지만 아픈 어머니도 잘 모시고 나름의 사업 계획도 갖고 있다. 빈센트의 입장에서 보면 시시한 일상이고 실행 없고 성과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성실히 살아냈던 사람이다. 그 성실함을 지탱해온 그 내면의 강직함은 총 한번 들어보지 못한 그에게 총을 들게 했고 킬러를 피해 여변호사와 함께 도주하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비록 눈을 감고 쐈을지언정, 빈센트를 향해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

모두가 꺼려하거나 상대적으로 가벼이 여겨지는 어떤 일을 누군가가 함으로써, 그 누군가가 감당하는 작은 톱니바퀴 때문에 이 세계는 원활히 굴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이 타자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김누리 교수가 강연과 책에서 주장한 교육, 디그노크라시(Dignocracy=Dignity+Cracy)의 길로 나아가야 가능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쿵푸 허슬>의 주인공처럼 그 안에 나름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봄에 피는 꽃이 있으면 여름에, 또 가을에, 심지어 겨울에 피는 꽃이 있는 것처럼, 맥스처럼 12년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당신의 꿈이, 어쩌면 조만간 꽃 피울지 모른다. 안으로 꿋꿋이 뿌리내려온 대나무에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퀀텀 리프의 순간처럼 말이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우리의 존엄함을 스스로도, 또 서로 간에도 잃지 않도록 격려하며 버텨내야 할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의 다름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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