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고민하다.

(사진=이코노미톡뉴스)
(사진=이코노미톡뉴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태화강국가정원 가을편 카피를 쓰느라 애를 먹었다. 봄에는 수레국화와 꽃양귀비, 거기에 작약까지 은은하게 받쳐주니 카피가 절로 나왔었고 감독도 신이나 카메라를 돌렸었다.

여름에는 긴 강가를 따라 십리를 내달리는 대숲에서 이래저래 지쳐 있는 시민과 국민들이 말 그대로 힐링 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기에 카피도 순하게 나왔었고, 30도를 넘는 무더위도 대숲으로는 얼씬 못해 촬영 또한 쾌적했었다. 문제는 가을과 겨울이었다. 그나마 겨울에는 떼까마귀 무리가 볼만하다. 그 무리가 기운찬 묵선을 그리듯 노을 진 붉은 하늘을 배경 삼아 초단위로 바꾸는 동선만 담아도 그림은 될 터였다. 그러나 가을은 여간해서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 카피 생각한다고 태화강국가정원을 수차례 답사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들춰보다 이 글에 다다랐다.

숨 가쁘게 살아 온 한국의 도시들


대부분의 대도시와 산업 도시들이 그렇듯이 울산과 부산은 한국 전쟁 이후 육지와 바다의 경계만큼 그 삶의 모양이 급격히 변화해 왔다. 울산은 박정희 정권 이전만 해도 전형적인 반농반어촌이었다. 1962년에 울산공업지구로 지정 됐고. 그 후 십 년 뒤에 현대울산조선소의 기공식이, 그 2년 뒤에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의 명명식이 거행됐다. 그리고 그 뒤 십여 년 뒤에 우리는 포니를 만날 수 있었다.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때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에 생생히 담겨 있듯이 피난민의 판잣집으로 영도 일대와 남포동 인근의 구도심이 의도치 않게 난개발 됐다. 그 후에는 일본과 맞닿은 지리적 여건 덕에 마산과 함께 섬유, 고무, 신발 등 경공업과 중공업의 전진 기지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게 두 도시 모두, 단 한 번의 쉼표도 없이 시대와 변화의 최전선에서 버텨 왔고, 새로운 세기에도 쉼 없이 변화하며 살아내고 있다.

그 세월 속에서 이 도시의 산업역군들은 대다수 한국의 어른들처럼 제 각각 노는 법을 배울 새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봄이면 진해에서 벚꽃을 보고, 여름에는 울산 도심이 텅 빌 정도로 같은 시기에 휴가를 갔다. 가을이라고 다를까? 밀양, 양산, 울산을 가로지르는 간월재를 중심으로 천고지가 넘는 산들이 수두룩하고 인근 김해에도 무척산, 불모산 같은 좋은 산들이 많으니 그곳에서 만나는 억새며 단풍으로 가을을 느끼는 것은 이 지역 주민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 <뉴욕의 가을>에서의 리차드 기어처럼 우산 끝으로 낙엽을 흩뜨려 가며 가을 공원을 산책하는 것은 남에 나라 가을 풍경으로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과 정서를 갖고 있는 지역민들에게 강을 따라 광활히 펼쳐진, 지정 된지 이제 갓 일 년이 된 가을날의 국가정원을 찾게 하는 것은 담당 공무원뿐만 아니라 나 같은 카피라이터에게도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었다.

가을 놀이를 다시 생각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료를 들춰보니 우리 조상들의 가을 산행과 단풍놀이 내력은 오래 됐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저자와 작품을 외웠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가을 산을 못가 아쉬워하는 이규보의 마음 한편이 담겨 있다. 당시 등고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음력 9월9일, 중양절에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셨다. 그런데 시인은 마침 중양절을 앞두고 손을 다쳤고 결국 산에 못 오르게 됐던 모양이다. 다행히 금슬은 좋으셨는지 시인을 측은히 여긴 부인이 국화주 술상을 차려주셨고 때 마침 의리 있는 서풍이 불어 가을 정취를 미약하나마 느꼈지만 가을 산에 못 간 아쉬움은 달래지지 않는다고 쓰셨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는 중종이 명나라 신하들과 경회루에서 잔치를 하다가 단풍나무를 보고 신하들에게 무슨 나무인지 물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단풍나무도 있다고 하니 가을에 단풍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193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조선의 청년들이 봄, 가을로 높은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먹으며 산놀이를 즐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리 보면 우리가 철마다 놀이를 즐기는 것은 조상 대대로의 내력이었던 것이고, 지금도 봄에는 꽃놀이, 여름에는 천렵, 가을에는 단풍놀이, 겨울 대보름에는 불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놀이가 관광 상품화 된 것은 각 정권의 적극적인 관광 정책과 맞물려 있다. 1962년, 박정희 정권 등장 후 서두른 일 중 하나가 한국관광공사의 전신인 국제관광공사 설립이었다. 이후 71년 경주를 시작으로 제주 중문, 설악산, 부여와 유성온천 등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이 개발은 68년의 경부고속도로 완공과 맞물려 신혼여행은 물론이고 단풍놀이와 꽃놀이가 그야말로 전국구, 광역화 되는 계기가 됐다. 전두환 정권의 <국풍 81>은 국가적 잔치가 무엇인지 보여줬고, 그 잔치의 광장인 여의도 광장에는 전국의 소문난 향토음식이 몰려들어 맛집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 후 단체로 관광버스에 실려 놀이를 가는 것은 하나의 문화가 됐고, 그 사이 노태우 정권의 89년 여행 자유화 이후에는 그 단체 놀이가 세계로까지 진출했다. “배고픈 사람은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로제 카이와의 말처럼 경제와 관광은 그야말로 동반 성장했던 것이고, 성장의 한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지구 곳곳을 개척하며 우리나라 여행객을 실어 날라 왔다.

혼자만의 가을을 만들 때가 됐다.


“열심히 일 한 당신 떠나라.”라고 말하는 카피처럼 열심히 일한 노동자와 대중에게 놀이는 특별하다. 하위징아는 <호모루덴스>에서 놀이를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일상과 비 일상의 경계를 둘러치는 것이라고 했다. 놀이를 통해 사람들은 색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일상적 생활을 중지시켜 잠시 특별한 순간을 도래시킬 수 있다. 그 순간,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은 특별한 존재가 되고, 텅 비어 있던 광장은 특별한 공간이 되어, 그곳에 한데 어우러진 이들을 특별한 우리로 만들어준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단체 관광버스 여행은 하위징아가 말한 놀이가 가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특성이 극대화 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한 경계의 둘러침은 “우리”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둘러침이었을 것이다.

그 둘러침의 선명함을 위해 전원 참여의 단풍산행은 당연했을 것이다. 비록 사람에 떠밀리며 촘촘히 늘어서서 단풍은 고사하고 앞 사람의 엉덩이와 오색 찬연한 등산복만 구경하다 올지라도 회사, 부서, 계모임, 동창회 전원이 가을 산에 오르는 것이 당연시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당연시 되던 것이 힘들어진 시대다. 이 기회에 이제는 나만의 둘러침을 통해 나만의 계절의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진정한 계절 놀이는 혼자여야만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무리에 섞여 무장해제 된 채 만끽하는 일탈의 놀이가 아닌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 혼자 존재하면서 계절을 홀로 만끽하는 것이 진짜 계절 놀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콘셉트를 “산책”으로 잡았다. 걷는 건 의사가 하라고 해야 겨우 하는, 운동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방법으로는 최고이니 태화강변을 걸어보시라. 등산복, 운동복 말고 가을 남자답게 좀 폼 나게 입고 걸어보시라. 계모임, 동창회, 산악회 무리하고 걷는 것도 좋지만 평생을 봐온 남편과 아내 손을 잡고, 가끔은 혼자도 걸어보시라. 철새가 날아든 강가를 국화와 억새에 취해 걸으며 느리게 가는 시간을 느껴보시라. 걷다가 문수산과 간월재로 넘어가는 노을이 만든 붉은 노을에 주변 사위의 변화를 불현 듯 느끼며 이미 가을 저녁이 깊어졌음을 눈치 채어 보시라. 그런 마음으로 카피를 썼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키워드

#최영훈 칼럼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