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다


울산과기원의 한 교수님이 미팅 자리에서 이런 하소연을 했다.

“작가님,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만 바라더니 이젠 과학계에도 그런 걸 원해요. 아니 양자 물리학을 쉽고 재미있게 말해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게요. 철학자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을 쉽게 설명해보라는 거랑 비슷한 거겠죠?”, “맞아요, 작가님. 어려운 건 어려운 거예요.” 이런 대화가 기억에 남아 있던 저녁, 우연히 페이스북을 들여다 보다 다가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결심이 있어야 되는, 어려운 것으로 남겨져야 할 것에 대해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쯤 페이스북을 하다 보니 인문학 타이틀을 건 이벤트가 제법 많다는 걸 알았다. 각계각층의 알 만한 사람들을 초대해 릴레이 강연을 하는 것도 인문학 간판으로 취합 되고, 인근 여러 지역의 콘텐츠 관련 기관에서 하는 행사들 중에서도 인문학 명찰을 단 것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지역의 팟캐스트 라디오 콘텐츠는 젊은 직장인 몇 몇을 모아 만드는 라디오 콘텐츠에 인문학 DJ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월급 장이 청춘들이 퇴근 후 주제 하나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30년차 DJ 배철수씨가 늘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마음에 새기고 있다는, 쌀로 밥 짓는 이야기와 비슷한 소소함을 나눌 패널에게 라디오 DJ의 이름을 달아준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이런 콘텐츠에 인문학 조명까지 쏴 주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의심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장승업의 군마도(群馬圖). (사진=국립유산연구지식포털)
장승업의 군마도(群馬圖). (사진=국립유산연구지식포털)

상품화 된 인문학의 후폭풍


인문학 타이틀을 얹은 강연과 콘텐츠는 많아진 시대에 오히려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을 가졌던 사람은 그전에도 있었다. 2016년 5월의 한 강연 프로그램에서 유명 스타 강사가 이양원 전 동덕여대 교수의 말 그림을 조선시대 화가인 장승업의 그림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방송에서 “이것이 진짜 조선화다.”, “이중섭의 소처럼 역동성이 살아있다.”라고 코멘트를 해서 관련 학계를 술렁이게 했다. 이 방송이 그저 유명 연예인이 패널로 나와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면 무지한 그림 팬의 실수로 웃고 넘어 갔을 것이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어른들의 인문학, 조선 미술을 만나다.>이었고, 그 강연의 강사가 비전공자인 수능 사회탐구 강사라는 점이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그 영상을 제작한 제작진조차 그 강사의 말을 검증하질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 조선일보는 <참을 수 없는 인문학의 가벼움>, <너무 쉽게 소비되는 얕은 지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한 달 터울로 게제하며 이 사태가 상품화 된 인스턴트 인문학 열풍이 낳은 폐해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 시기, 페미니즘 이론가인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TCU)의 강남순 교수는 경향신문의 기고문에서 그 강사의 “인문학 강의를 끝까지 듣는 것은 사실상 고도의 인내심이 요청되는 일이었다.”라고 고백하며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노골적 인문학의 상품화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화를 위해 인문학의 복합적인 성격이 왜곡 된 채 인문학이 하나의 상품으로 “청중의 환호 속에 자연스럽게 고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양원 전 동덕여대 교수의 군마도
이양원 전 동덕여대 교수의 군마도

이렇게 상품화 된 인문학은 결말이 순하게 바뀐 명작 동화, 쓴 맛 대신 과일 향 가득한 라들러 맥주와 닮았다. 균열과 상처, 흔들림을 허락하지 않는 인문학이다. 이런 인문학 상품 목록엔 부정의 인문학은 없다. 마음을 불편하게해서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없는 인문학은 팔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재즈가 유행하던 90년대 중반, 정작 대중의 귀를 불편하게 할 만한 어려운 재즈는 듣기 어려웠던 이유와 비슷하다. 90년대 초 중반 불었던 재즈 열풍은 갖다 붙일 수만 있다면 어디에든 재즈를 갖다 붙이게 했다. 드라마 제목도 재즈였고 화장품, 의류, 카페, 레스토랑 등에도 붙었다. 유하, 하재봉, 장정일도 각각 「재즈1」,「쿨재즈」,「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의 제목의 시와 소설을 세상에 내 놓았다. 무라카미 류의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재즈 블루」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신간처럼 등장했고, 때 마침 출간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그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이 재즈를 오브제로 사용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음반사들은 듣기 좋은 재즈곡을 모아 컴필레이션 음반을 내놓았고 영화<접속>은 사라 본의 그 유명한 <A Lover's Concert>를 대히트 시키며 재즈 열풍을 부채질 했다. 그 때 많은 음악 평론가들이 진짜 재즈는 더 소외 되고 있다며 강남순 교수나 조선일보와 같은 논조로 재즈의 상품화를 개탄스러워했었다.

질문으로 시작되는 인문학


강남순 교수는 앞의 칼럼에서 상품화 된 인문학은 질문을 배제한 인문학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의 다른 칼럼에서는 “질문은 심오한 사유의 세계로의 초청장”이라고도 했다. 질문 없는 인문학이 상품화 된 인문학의 태생적 한계라면 당연히 제대로 된 인문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인문학은 한 개인이 세상과 현실, 그리고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기 위해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그 여정의 인문학은 서로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명분과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쩌면 질문의 인문학은 앎을 채워가는 누적의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모름”을 사무치게 깨닫는 것이고 모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태함을 반성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질문의 인문학은 그 반성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무지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고, 진리의 가능성을 향해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야성을 갖고 그 뒤를 쫓는 것이다. 이 집요한 추적자와 순례자와 같은 여정엔 온천이나 마사지 같은 치유와 힐링의 인문학 휴게소는 없다. 힘든 사람에게 하나마나한 “힘내.”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위로와 위안의 단맛도 없다. 질문의 인문학은 안온한 삶에 반문을 던지는 것이고 믿고 의지했던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보디빌더가 근육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처럼 기존의 상식과 지성에 상처를 내어 그것을 단련시켜 안팎의 모양새를 다른 이와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참는 고통


결국 인문학은 고통을 참아가며 흉터를 내고 문신을 새겨나가는 것과 같다. 영화 <메멘토>의 레너드처럼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중요한 정보를 몸에 문신으로 새겨 넣었던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잊지 않기 위한 그 행위, 그 망각의 저지 행위가 인문학의 본질 중 하나인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메멘토>의 줄거리처럼 개인의 고통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답을 얻고자 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그 여정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여정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갈 때 우린 더 나아진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남과 다른 존재, 다른 삶의 의미를 가진 내가 될 것이다. 이런 힘을 인문학에게 원한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두려움은 상대적 무지가 아니라 무엇을 새겨야만 하는 가에 대한 질문 없음이다. 명확한 질문을 품은 자는 그 순례의 여정이 주는 고통을 반가와 할 것이다. 그 험난함을 예감하면서도 그 여정에 올라설 준비를 하는 순례자들을 위해서도 인문학의 입구에 저잣거리의 네온사인을 내걸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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