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마주한 편견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해 뜨는 나라의 공장' 북커버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해 뜨는 나라의 공장' 북커버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아빠, 관념이 뭐야?” <두근두근 마녀 시상식>이라는 동화를 읽고 독서록을 쓰던 딸이 물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고정관념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서라고 했다.

동화 내용을 들어보니 실크라는 뜨개질 잘 하는 마녀와 바느질 잘하는 나나라는 소녀가 함께 어우러져 잘 산다는 이야기다. 읽고 나니 주로 사람을 못 살게 굴거나 고약한 마법이나 거는 이로 묘사 되어온 기존의 마녀 캐릭터가 고정관념에 의해 그리 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물과 현상에서 시작해서 개념과 관념, 고정관념을 거쳐 편견과 선입견까지 풀어줬다. 그러고 나니 하루키의 가발 공장 에세이가 생각났다.

하루키와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가 가발 공장 견학 에세이를 쓰기 위해 우선 번화가의 가발 매장 본점을 방문한다. 이 일행과 마주한 본점의 홍보 담당자가 대뜸 이런 말을 한다. “저기 말이죠, 무라카미씨가 지금 노란색 스웨터를 입으셨는데, 솔직히 대머리들은 어지간해선 그런 색을 입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그 이유,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색을 입으면 말이죠. ‘흐흥, 대머리 주제에 뭐 저리 화려한 색을 입었담.’하고 뒤에서 수군거리거든요. 아니, 실제로는 수군거리지 않아도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지레 못 입는 법입니다.”

80년대 일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노란색을 좋아하는 내가 겨자 색 마운틴 파카를 입고 산책 할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향해 “반백의 일본 초밥 장인 같은 아저씨가 잘도 노란색을 입고 다니는군.”하며 수군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오렌지색, 노란색 연합이 무채색과 벌이는 투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옷장을 들여다 볼 때마다 늘 이런 생각이 든다. 나이나 직업에 따라 차림새와 색을 가려가며 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좀 변해도 되지 않을까?

살면서 스쳐간 편견들


십대, 이십대를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이 당연시 되던 기지촌에서 보냈다. 혼혈 아이들을 무심하고 철없이 튀기라 부르며 따돌리고, 양공주가 표준어인 줄 알았던 8, 90년대였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에는 검정고시 출신인 걸 어떻게들 알았는지, 과거가 제법 파란만장 하리라 단정한 선후배 동료들의 경계 어린 대우를 경험 했었다. 대학 강사 시절에는 티셔츠 하나로 발생한 오해와 편견도 겪어 봤다. 다니던 광고 회사엔 카피라이터를 위한 옷차림새 매뉴얼이 없었던지라 대충 입고 다녔었다. 때문에 대학 강의 의뢰를 받고나니 강단에 맞는 옷차림이 고민됐다. 그렇다고 새삼 와이셔츠와 양복을 새로 사 입는 건 부담 돼서, 결국 늦은 봄까지 입을 수 있는 얇은 터틀넥 몇 개를 구입해, 원래 있던 회색과 남색 재킷 안에 번갈아 받쳐 입고 출강 했다.

그렇게 두 세 학기 지나니 이상한 소문이 귀에 들어 왔다. 목에 용문신이 있어서 터틀넥만 입고 다닌다는 의혹에, 그 용문신의 까닭이 이러저러하지 않겠냐는 이야기 살이 붙어, 소문이 눈덩이처럼 커졌던 것이다. 가려야만 하는 문신에 대한 편견이 가릴법한 이유를 만들어, 그 편견에 걸 맞는 사람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런 사소한 오해를 바탕으로 한 편견과 선입견은 그 뒤에도 몇 번 있었다. 어머니가 미국에 사신다고 얘기하면 나까지 유학파나 교포로 오해 받곤 했다. 제법 머리가 길었던 십여 년 전에는 도예가나 미술 하는 사람으로 오해 아닌 오해도 받아 봤다.

'편견'이란 뭘까?


몇 차례 경험한 이런저런 편견과 선입견을 돌이켜보니, 그것이 사람과 상황의 실체와 전체를 다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데서 시작됨을 새삼 알게 된다. 한자 편견(偏見)을 뜯어보니 거기에 담긴 의미도 그러하다. 앞의 치우칠 편자는 사람 인(人)에 작을 편(扁)자가 합쳐진 것이다. 작을 편에서 주목해야 할 건 부를 이루는 지게 호(戶)자인데 문이 반쯤 열린 모양새다. 그러니 편견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사람이 문을 반쯤 열고 내다보는 데서 발생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절반의 틈으로 내다보며 문 밖의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편견의 발단이라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도어체인을 건 채 그 틈으로 문 밖의 사람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결국 편견은, 그 틈으로 보이는 형체의 일부와 그로인한 필연적인 정보의 결여 속에서 타자를 평가해야 하는 막막함을 문 안쪽에 발생시키고, 문을 다 열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고 해를 입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려 줄 수 있을 텐데 보이는 일부만으로 그것을 설득해야 하는 답답함을 문 밖에 발생시킨다. 조금 밖에 열지 않아 타자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건지, 문 밖의 타자에 대해 다 알지 못하여 발생한 공포와 불안으로 그 문을 반밖에 열지 못하는 건지, 그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 스틸컷.
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 스틸컷.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을 위해


달리 생각하면 편견이나 선입견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감에 의한 휴리스틱 판단으로 볼 수도 있고,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블링크>에서 말한 적응 무의식을 바탕으로 한 판단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빠른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까지 좋다면 더 긍정적이다. 이런 판단이 일상에선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할리데이비슨을 예로 들 수 있다.

거의 망해가던 할리데이비슨을 부활시킨 건 영화 <이지라이더>에 나오는 바이커 갱들이 아니라 모터사이클과 인연 없어 보였던 화이트칼라들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노스탤지어를 소유하기 위해 이 바이크를 선택했고 자기들끼리 종족(Tribe)을 이뤄 새로운 소비자 집단을 형성했다. 음악계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90년대 중반, 말 그대로 혜성 같이 등장한 <후티 앤 더 블로우 피시>라는 얼터너티브 록 그룹의 리드 싱어는 다리우스 러커라는 흑인이었다. 그 보컬리스트가 흑인은 R&B나 힙합을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과 흑인이 무슨 록이냐는 세간의 편견에 순응 했다면 그 풍성한 목소리가 담긴 멋진 얼터너티브 록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피부색에 요구된 세간의 편견과 선입견에 순응을 거부한 몇 몇-지미 헨드릭스, 레니 크라비츠, 프린스- 덕에 록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딸에게 색깔을 가르칠 때부터 아빠가 좋아하는 색은 오렌지색과 노란색이라고 주입시켰다. 사춘기 시기, 아빠가 오렌지색과 노란색을 입고 다녀도 흰 머리 아저씨가 주책이라는 험담을 친구와 나누지 않게 예방 조치 해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빠가 환갑을 넘어서도 여전히 오렌지색과 노란색을 좋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면 다른 누군가가 어떤 색을 좋아하든 그저 개인의 취향이라 생각하고, 이런 색을 좋아하면 이런 사람이라 지레짐작해 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이런 건 이런 색이어야 한다는, 그런 편견과 고정관념, 선입견 없는 열린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런 어른이 돼서, 무채색과 단조로운 생각으로 얼어버린 한 분야에 과감히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인재가 되어주길 바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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