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가 보고 싶어 한 사진

상기 사진은 필자와 관계없음.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상기 사진은 필자와 관계없음.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누이는 충북 청원에 산다. 마흔에 만난 남자와 딸 둘을 낳아 키우며, 작은 반찬 가게를 하며 산다. 사는 걸 본 적은 없다. 사진 몇 장만 봤을 뿐이다. 누이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06년, 내 결혼식 때였다. 그 전까지 십 년 넘게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십 몇 년 간 누이를 만나지 못했다.

살아 있고 행복하다는 걸 알고 있다. 사진 속 누이의 얼굴은 좀 피곤해 보이지만 겨우 평화를 찾은 듯 했고, 두 조카의 얼굴엔 구김살이 없다. 매부는 부리부리한 눈매에 그을린 얼굴이고 산전수전 다 겪어낸 사내만이 지을 수 있는 깊이 파인 미소를 갖고 있다. 딸과 조카 둘은 한 살 터울들로, 차례대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작년 초, 누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버지 사진이 있는지, 있다면 한 장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사진은 딱 한 장뿐이다. 1977년이나 78년, 누이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함께 찍힌 사진이다. 장소는 창경원. 아직 동물원일 때다. 누이는 코코아 색 코듀로이 원피스에 흰 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신발은 노란색 샌들이다. 난 빨간색 폴로셔츠에 하늘 색 반바지, 흰색 스타킹을 받쳐 신었다. 샌들은 파란색. 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하늘색 여름 정장이다. 흰 색 셔츠의 깃은 재킷의 라펠을 덮었고, 그 기하학적 무늬가 눈에 띈다. 흰색 양말을 신었고 오래 된 사진으로도 그 촉감이 전해지는 검은색 스웨이드 더비 구두를 신었다. 아버진 정원 석축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고 난 아버지와 마주서 있다.

사이에 놓인 동그란 양은 도시락에는 김밥이 담겨 있고 그 뒤에 환타 병이 보인다. 누이는 아버지가 두려운 듯 내 뒤에 숨듯이 선 채 젓가락 쥔 오른손을 길게 빼서 도시락을 향하고 있다. 어머니는 사진 속에 없다. 삼각대가 없어 어머니가 찍었을 지도. 이 사진이 아버지, 나, 누이가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누이와 함께 찍힌 사진도 이게 유일하다. 누이와 어머니, 누이와 아버지, 나와 아버지가 찍힌 사진도 없다. 당연히 네 식구가 함께 찍힌 사진도 없다.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어 누이에게 보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니 애도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딸에게 살갑지 않았던 아버지가 새삼 그리워졌거나 보고 싶어서도 아닐 것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부모의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누이는 아이들에게 그 앞의 시간들, 즉 부모 이전의 시간을 보여줘야만 했을 것이다. 나 또한 딸이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 수도 없이 이런 질문을 들어야했다. “아빠의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사진 속 아버지는 겨우 스물일곱, 여덟이다. 응석받이로 자란 사내는 애비 노릇이 서툴렀고 그 서투름은 원숙함으로 나아가지 않아 여럿의 삶에 흉터를 남겼다.

영화
영화 "코코(Coco, 2017)" 스틸 컷.

사진과 기억으로 소환한다.


<코코>는 사진과 기억에 관한 영화다. <코코>를 본 관객이라면, 제단 위에 사진이 올라가지 않은 영혼은 <죽은 자의 날>에 살아 있는 가족들 곁으로 갈 수 없다는 것과 주인공 미겔이 증조할머니 코코를 위해 부른 <기억해줘>라는 노래와 그로인해 할머니가 말을 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장면이 인상에 남을 것이다. <코코>에서 사진과 노래는 기억되어야만 하는 망자의 필수 조건이고, 기억해야만 하는 사람의 점화원이다. 이 필수조건과 점화원의 절대성은 미국 가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또 실제로 방문한 미국의 일반 가정엔 <코코>에 나온 제단처럼 많은 사진이 전시 되어 있다. 우리처럼 결혼사진이나 애 돌 사진 몇 개만 붙어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액자를 세울만한 공간만 있으면 빽빽이 세우고, 붙일 만한 벽만 있으면 빈틈없이 붙인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코코>에서 본 제단,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죽은 자는 사진을 통해 이야기의 육신을 입는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남은 사람들에 의해 때마다, 철마다 다시 부활한다. 지난 해,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시기를 앞두고 앤서니 파우치 소장이 TV에 나와 여행 자제를 호소해야만 했던 것은, 전염병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부모의 집으로 향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향은 미국의 모든 살아 있는 이들이 짊어진 명절의 책임이다. 그 책임은 각자가 기억하는 이야기마다 다른 옷을 입고 부활하여 가족 곁에 존재할 죽은 이에게 입힐 이야기의 육신을, 자기 기억 몫의 육신을 만들 책임이다. 많이 모일수록, 많은 육신이 주어지고, 죽은 이는 더 오래 산자 곁에 머문다.

4,5년 전에 텍사스 어머니 집에 갔을 때, 집 안 곳곳, 방방마다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 카피라이터 초년병 시절에 찍힌 내 사진을 발견했다. 나에게도 없는 내 사진이었다. 물론 내 딸과 아내, 우리 식구의 사진도 곳곳에 있었다. 그렇다. 미국 가정의 사진들은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여기 없는 이, 멀리 있는 이도 이야기를 통해 불러 온다. 결국 미국인들은 명절마다, 가족 행사 때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이 자리에 없는 모든 이들을 이야기를 통해 부활시켜 소환 한다. 그 소환의 반복은 떠나온 땅에 두고 와야 했던 역사, 감수할 수밖에 없던 단절 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민 온 땅에서의 역사를 꼼꼼히 새롭게 써가는, 일종의 시각적 족보 만들기다. 그래서 사진의 제단은 가족의 역사가 전시 된 유적이자 박물관이다. 더 나아가 기억의 제단이자 부활의 전당이고 가족의 성곽이다. 미국에서의 명절은 그 성곽의 유지 보수를 위해 흩어져 있던 일꾼을 모으는 날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코코>는 멕시코의 노래와 색을 빌려온 가장 미국적인 영화다.

사진의 누락, 상실 된 개인사


초등학교 소풍 때마다 카메라를 가져온 친구 옆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나마도 두어 장뿐이다. 그 후로도 사진을 찍을 만한 순간도, 카메라도 한참 없었다. 사진의 누락으로 인해 개인사 기록의 절반은 없다. 이삼 십여 년 분량의 사진이 없거나 드문 것이다. 그렇게 우리 남매의 역사 기록은 반절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의 역사는 꼼꼼히 만들어지고 있다. 조카들은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를 쓸 것이고, 내 딸의 부산 사투리는 이미 억세어 졌다. 그 누적의 패인 길을 따라 아이들은 안정적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삶의 궤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서운한 것도, 응어리도 없다. 그저 오래 전의 어긋남으로 인해 긴 세월,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냈고, 그로 인해 한참을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다. 누이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이가 이 땅 어딘가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음에 안도한다. 누이를 닮은 딸, 내 조카가 잘 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다만, 아직 얼굴을 마주하고 그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어, 그저 사진을 보며 안도하고 또 안도할 뿐이다. 둘 다 살아왔구나 하는.

작년 말, 누이가 화상통화를 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조카들이 삼촌을 보고 싶어 한다면서 말이다. 조만간, 다음에 하자며 미뤘다. 언젠간 해야 할 것이다. 사진으로 서로의 삶을 확인했으니 영상 통화를 통해 생동감 있는 순간을 나누는 것이 다음 순서일 테니. 그 후, 언젠간, 아이들을 앞세워 어색함을 무릎 쓰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딸이 입다 작아진 옷을 택배로 받은 누이가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아직 답장을 못했다. 글을 쓰는 김에, 누이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5월, 어쩌면, 사랑한다, 그립다는 말보다, 기억하고 있다, 잊은 적도 잊힌 적도 없다는 말이 더 절실한 사람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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