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인 카피라이터
"생업의 언어가 있다"

카피라이터 작업 현장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카피라이터 작업 현장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요즘, 카피라이터가 뭐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번역가, 통역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이유는 이렇다.

광고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가장 많이 듣고 쓰는 단어가 '콘셉트'다. 제품 콘셉트, 상품 콘셉트, 광고 콘셉트, 크리에이티브 콘셉트 등등. 제품과 서비스는 하나인데 왜 제 각각 콘셉트가 있어야 하는지, 가르칠 때나 배울 때나 이해하고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았으나,

이십 년 가까이 하다 보니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하나의 물건과 개념을 각자가 속한 영역의 언어로 번역해 놓은 것, 그게 각각의 콘셉트다. 과학이나 기술, 한 분야 전문가의 언어의 옷을 입고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대상 이 된 소비자의 생활 언어로 정확히 번역하는 일은 그 제품과 서비스가 시장에서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를 판가름 할 만큼 중요하다.

한때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카피가 히트했었다. 침대 카피라면 “별이 다섯 개”도 빼놓을 수 없다. 과학이 됐든 별이 다섯 개든 침대를 만드는 사람들은 거기 누워 자는 사람들이 다들 편하게 자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만들다 보면 그 방법에 몰두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정작 거기 누워 잘 사람들이 누릴 그 편안함과 그 편안함이 삶에 꽃 피울 무형의 가치에 대해 잠시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침대를 연구하고 만드는 이들이 더 편한 침대를 만들어도 파는 사람이 그 편안함을 소비자의 삶의 언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침대는 세상에서 빛을 못 본다.

물론 편안함의 의미는 개별적이다. 노년의 소비자나 몸이 불편한 사람에겐 건강한 아침의 조건일 테고, 바쁘게 산 누군가에겐 휴식의 조건일 것이다. 혼자 객지살이하는 청춘에겐 위안의 조건이고 “라면 먹고 갈래.”하고 은근히 말할 수 있는 믿는 구석이다. 그 믿는 구석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아마도 뜨거운 신혼부부일 테고 말이다.

딱 떨어지는 표현을 찾는 일


과학 기술도 마찬가지다. 요 근래 울산과학기술원에서 만난 교수와 학교 기업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연구와 그 성과를, 당연하게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시간을 들여 자세히 말한다. 물론 바닷물로 전기를 만들고, 안전하게 원자력을 운영하고, 커피콩의 99퍼센트라는 커피 찌꺼기를 업싸이클링 하여 자원으로 만드는 것은 분명 지구를 살리고 인류를 이롭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소비자의 언어로 바꾸지 않으면 세상에 내다 팔 수 없다. 그것이 쉽지 않음을 그들도 잘 알기에 나 같은 이를 신분증 없인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는 그 삼엄한 곳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어디 기술뿐인가? 다른 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겐 음식 광고가 제일 어렵다. 매운 맛 음식을 광고한다 해보자. 우리나라 말에 매운 맛을 표현하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가. 얼큰하다, 맵다, 매콤하다, 시원하다, 얼얼하다, 칼칼하다, 알싸하다는 기본이고 부산에서 자주 쓰는 맵싹하다(표준어는 맵싸하다인데 영남권에서는 맵싹이라고 소리 낸다.)까지. 이들 표현은 어떤 음식을 누구에게 팔 것이냐에 따라 카피라이터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다.

이러니 한 음식의 매운 맛을 소비자의 정서에 딱 들어맞는 단어로 바꾸는 건 보기가 너무 많은 시험문제와 같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매운 음식이라면 매콤, 알싸, 맵싹 정도가 선택 될 수 있을 테고 중년의 사내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이라면 얼큰과 시원이 선택 될 것이다.

그 단어를 찾아도 문제는 남아 있다. 얼큰한 음식을 생각하면 허름한 시장 골목 안 노포의 칼칼한 갈치조림을 떠올리는 아저씨도 있을 테고, 대파를 숭숭 썰어 넣어 푹 끓여주신 고향집 어머니의 육개장을 떠올리는 아줌마도 있을 것이다. 이러면 매운 맛은 향수, 즉 각자의 노스탤지어로 이어진다. 매운 맛 표현으로 “시원하다.”를 말하면 부산 사람들은 매운 고추를 베이스로 한 양념장이 그 맛을 책임지는 맑은 대구탕이나 복국을 떠 올릴 테고, 경기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 같은 이는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동태찌개를 떠올릴 것이다. 더 나아가 시원하다는 표현은 젊은 친구들 사전엔 없는 매운 맛 표현일 수 있으니 이런 음식들은 더 나이든 타깃, 그 시원한 참맛을 아는 이에게나 쓸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매콤하다는 떡볶이나 양념 치킨이 내 입맛엔 영 맞지 않는 걸 보면 그 매운 맛에도 세대차이가 분명해 보이니 매운 맛의 소비자가 다양할수록 그 표현 하나 고르는 데도, 그 표현을 이미지화 하는 데도 더 많은 고민이 동반 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문제를 매일 풀어야하는, 이 업을 그나마 수월히 오래 해 먹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사람과 세상에 대한 평생공부


번역가 정수윤의 에세이 <날마다 고독한 날>에 실린 ‘러브레터’라는 글에는 나쓰메 소세키가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그러면서 살면서 “사랑해요.”라는 말을 세 번쯤 들어 봤다는 일본인 친구가 맘에 드는 사람에게 호감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썼다. 그 표현이 참 담백하다.

“그럼 넌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 뭐라고 말해?”

“음, 날이 좋으니 같이 오토바이를 타자거나? 오늘 밤 너랑 먹는 카레가 특별히 맛나다거나?”

이 담백한 표현의 진의를 모르면 일본인과의 연애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의 성공도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발휘 된 애정 어린 공부에서 출발한다. 카피라이터 일 또한 그렇다. 역지사지에 담긴 진리를 몸소 실천해야 하는 직업이다. 광고주에게 제품은 말 그대로 자식 같은 제품이다. 개발팀은 밤을 샜을 테고, 생산팀은 완벽한 제품을 위해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회사도 살고 나도 산다는 절박한 심정에 영업부는 그야말로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닐 것이다. 그러니 광고쟁이에게 당부 할 말이 많은 건 당연하다. 그걸 찬찬히 들어주는 것이 일단 우선이고 그 들은 것을 시장의 언어, 소비자의 언어로 잘 번역해서 양자를 설득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리고 이 설득의 일을 위해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같은 제품이더라도 다른 언어, 다른 옷을 입고 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그 촉과 감을 늘 바짝 세워야 한다.

광고 일과 칼럼 일을 다 해보니 광고 카피는 써야 할 말을 찾게 하고 칼럼은 덜어낼 말을 찾게 한다. 그러나 둘 다 오래, 잘 하려면 이런저런 세상 공부, 글공부, 사람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다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일수록 광고쟁이의 책임이 더 무겁다.

파는 이와 사는 이 사이에서 소통의 중매쟁이 노릇을 제대로 해줘야 과학자의 연구는 멈추지 않을 테고, 사업가는 이 불황에도 돈을 더 벌 수 있을 테고, 소비자는 적절한 가격에 좋은 제품을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광고쟁이의 필수 과목은 사람 공부와 세상 공부이고, 그 공부는 평생 공부여야 한다. 해가 갈수록 이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해서 요즘은 부러 감독을 따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침침해지는 눈을 원망하며 책을 뒤적이고 있다. 아내의 돋보기 추천을, 아직은 모른 척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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