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상 TVCF 기업PR '갔다올게' 편. (사진갈무리=현대해상 유튜브)
현대해상 TVCF 기업PR '갔다올게' 편. (사진갈무리=현대해상 유튜브)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카피라이터하면 기발한 표현만 찾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것도 초년병, 혈기 왕성할 때, 말의 쓰임새 안 가릴 때 그랬고, 이후에는 특별한 대상을 향한 유별난 프로모션 때나 그리한다.

속된 말로 짬이 쌓이다보면 일상을 벗어난 일탈의 언어로는 일상을 사는 이에게 다가가기 힘들고, 설령 반짝이는 일탈의 단어로 잠시 주목을 끈다 하더라도 그 단어는 일상을 살아내는 이의 삶에 안착하여 오래 울림을 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겨울에 춥고 여름엔 덥고, 봄에는 설레고 가을엔 분위기에 젖는 것이 평범한 이들의 공통 된 계절감이듯 세상사를 담아낼 말은 하루치 쓰는 말에서 찾는 것이 좋다.

이런 평범한 말을 사용한 광고가 유달리 공감을 넘어 감동까지 줄 때는 그것이 내 이야기이면서도 그 가치의 소중함을 한참을 잊고 지냈거나 새삼 와 닿을 때다. 그로인해 때론 한 단어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무게와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갔다 올게"라는 인사가 소중하다.


아내는 하루 평균 3천명의 외래 환자를 보는 대학 병원 직원이다. 몸담은 지 25년쯤 됐다. 연애 때나 결혼 후에도 아내가 회식이 있다고 하면 밤 열두시 전까진 전화하지 않았다. 술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간만에 판을 깐 술자리가 쉽게 접힐 리 없고, 그 판에 전화질 해봤자 흥만 깨트릴 뿐, 이른 귀가를 재촉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향후 조직의 미래를 좌우할 대화가 오갈 수도 있다는 짐작도 들었다. 큰 조직의 생리를 모르는 나로서는 대기업 회식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던 나도 애가 엄마 퇴근 시간을 짐작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와 함께 베란다에 서서 아내를 기다렸다. 엄마의 차가 골목 어귀에 나타나면 아이는 주차장으로 나가 기다렸고, 두 여자는 몇 년 만에 공항에서 해후한 모녀처럼 부둥켜안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 아내도 코로나19 초창기, 집에 들어오자마자 딸이 다가오는 걸 막은 후 샤워부터 했다. 매일 환자와 상담하는 아내의 염려가 이해도 갔다. 그래서인지 “갔다 올게.”라는 광고 카피가 더 와 닿았다.

광고 내내 “갔다 올게.”하는 인사가 이어진다(현대해상). 남편이 아내에게, 사춘기 딸이 엄마에게, 유치원 등원 차를 타러가는 꼬맹이가 엄마에게, 집사가 고양이에게, 해녀가 선장에게.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문 밖이든 바다 속이든 이 말을 한 사람은 그 약속을 지켜야하고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그 약속을 당연시하며 떠난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그 반복이 일상을 만들고, 그리 쌓인 일상이 인생이 된다.

인생은 이 “매일 하는 말이지만 지켜야하는 말”이 지켜짐으로 만든 공든 탑인 것이다. 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못 느껴질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라면 이 무덤덤한 말이 광고에 담길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이후에도 꼭 지켜져야 할 말이다. 일하러 간 사람은 퇴근 후 집에 와야 하고, 군대 간 아들은 건강히 제대해야 한다. 광고 속, 이어지는 카피처럼 이런 일상의 반복이 우리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인생을 만들고 인연의 그물을 유지시킨다. 역설적이게도 일상에서는 그 소중함이 감지되지 않아 이런 시국에나 그 일상과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늘 보던 사람도 보지 못할 상황이 닥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밥 한번 먹자"는 약속


만날 약속을 많이 한다. “언제 밥 한번 먹자.”, “우리 조만간 뭉쳐야지, 술 한 잔 해야지.”와 같은. 모이지 말라는 나라의 당부가 어느덧 한해 절반을 넘겼고, 이런 약속 대부분을 고급 위스키 킵(keep) 해 놓듯이 밀봉하여 지난 연말부터 마음 한쪽에 묻어 뒀을 것이다.

이렇게 묻어둔 약속을 눈치 챈 카피라이터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너에게 밥을 보낸다.”, “밥 한번 먹자는 말 대신 너에게 밥을 보낸다.”, “미안해 라는 말 대신 너에게 밥을 보낸다.”하는 카피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이, 사랑싸움 끝에 건네야 될 미안해라는 사과가,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따듯한 밥을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이 이 간단한 주문으로 해결될지 모르겠다. 이 시국에 그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고 넘어가기엔 마주한 얼굴로 전해지는 감정의 깊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사랑해와 미안해라는 말의 울림이 너무 크다.

밥 한번 먹고 싶은 친구와 어느 정거장에서 스쳤다면 약속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렇게 밥을 끼니로만 여기는 민족이었나.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 아니라 밥상머리의 민족 아니었나? 만나야 될 사람은 만나야 되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우린 이제야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


은퇴 한 남편이 모처럼 외출했다. 그 남편, 눈치도 없이 밥도 안 먹고 점심때 지나서 집에 들어와 밥을 안 먹었다고 한다. 아내는 눈을 잠시 흘기고 부리나케 만둣국을 끓여내 상을 차리고, 식사 후 설거지까지 한다. 그 아내에게 “근데, 여보, 아까 거, 만둣국 맛있더라. 잘 먹었어.”하는 인사는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한다. 긴 세월 반복해 온 그 인사에 얼마나 많은 감사함이 담겨 있는지 그 인사를 들어온 이만큼 아는 이가 또 있을까? 일전에 말했듯이 밥상을 마주하는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 마주한 세월이 길수록 쌓은 사연도 두텁다. 그런 사람과 밥상을 마주하면 그 안색만으로도 하루의 일상이 읽힌다. 그 사람을 위해 차리는 밥상은 정성이다. 냉동 만두를 데워 내든, 쌀밥에 3분 카레를 얹어 내든 “그 사람”을 위한 상차림은 마음을 들이는 일이다. 그러니 이 간편식 광고에 쓰인 “정성으로 차리다.”하는 카피는 소중한 이를 위한 밥상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 밥상을 받은 이의 인사로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어.” 같은 인사보다 더 좋은 인사는 없다는 것 또한 정확히 알고 있는 이가 쓴 것이다.

다들 오래 그리워한 일상들


앞서 말한 광고들은 해외여행이 그립다 말하지 않았다. 밤샘 파티나 왁자지껄한 축제가 그립다 말하지도 않았다. 소중했으나 그 소중함을 몰랐던, 그걸 잃어야만 그 소중함이 절실히 느껴지는 일상의 조각들이 그립다고 했다.

일하러 간 사람이 건강히 퇴근하고, 그렇게 퇴근한 저녁에 옛 친구를 만나 밥 한 끼 마주앉아 먹는 일상, 그런 일상들이 그립다고 했다. 그 일상 유보 된 것인지, 빼앗긴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한건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참아온 일상의 욕구들이 있는 모양이다.

태화강국가정원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쓰레기가 넘쳐나고 헌팅과 부킹을 하며 해 뜰 때까지 술판이라는 기사를 봤다. 뉴스를 보니 부산 광안리 수변 공원도 다를 바 없다. 이런 뉴스 끝에는 의례 마스크도 안 쓰고 거리두기도 안 지키니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장소를 폐쇄하자는 말들이 따라 붙는다. 말 그대로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까지 인내했던 욕구가 만들어낸 필연적 현상에 이런 꾸중은 너무 야박하지 않나?

청춘들의 욕구를 뭐라 하지 말자. 오히려 잘 관리해서 안전하게 놀게 해주는 게 낫지 않겠나? 한 여름 뜨겁게 놀고 싶은 청춘이라면 발 벗고 접종 줄에 설 테고, 그러면 올 8월쯤엔 해운대 해변에서 마스크 벗은 청춘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늦어도 가을엔 이 산 저산에서, 겨울엔 스키장에서 다들 즐길 수 있지 않겠나? 혼술 좋아하고 방콕족인 중년의 필자에겐 해당 되지 않는, 혈기 왕성한 청춘에게만 해당되는 일상이라고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소중한 개별 일상이 모여 우리의 일상이 될 테니, 그대와 나의 일상이 모두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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