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게 반하지 않았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통신사에서 온 문자를 보니 첫 번째 스마트 폰의 2년 약정 기간이 끝났다. 그동안 페이스 북을 해 왔다. 여긴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보니 최근 좀 특이한 일을 겪어서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내게 말을 걸 리 없다"


낯선 이름의 젊은 여성 두 명이 두어 달 간격으로 친구 신청을 했다. A는 신청 며칠 후에 페이스북 메신저로 말을 걸어 왔다. 몇 마디 했다. 낌새가 이상해서 그 여성의 페이스북에 다시 들어가 봤더니 한 남성이 댓글로 훈계를 남겼다. 대충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는 얘기였다. 눈치껏 친구를 삭제하고 차단했다. B도 비슷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하고, 메신저로 대화를 트고,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고 말을 먼저 걸었다. 그러다 외롭지 않냐, 고 운을 띄운 뒤 외로울 땐 일탈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대화로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 순 없지만 이 세계엔 이렇게 일탈을 미끼로 대화 하자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 여성들이 나와 어떻게 알고리즘으로 엮어져 있나 궁금해 그 여성의 친구 목록을 보면 어김없이 나와 페이스 북 친구 관계인, 사회적으로 제법 그럴싸한 직함을 갖고 있는 중년 사내가 눈에 띤다. 물론 대부분의 사내들은 그런 친구 신청을 무시한다. 모든 모험엔 청구서가 따른 다는 걸 알만한 나이고, 그 나이가 되면 주제 파악이 어느 정도 되는 터라 지나가는 여성이 말을 걸만한 매력이 있는지 정도는 스스로 분간한 줄 알기 때문이다.

나만해도 여성, 특히 이 삼십 대 여성이 먼저 말을 거는 건 일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다. 그마저도 부산 박물관을 찾고 있는 관광객이거나 딸과 함께 있을 때 회원을 유치하려고 학습지 샘플을 건네는 학습지 교사, 그도 아니면 “도를 아십니까.”하고 길을 막는 종교인 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매력적이고 섹시한 젊은 여성이 뜬금없이 친구 신청을 해도 설레지 않는다. 인근 지역 동종 업계 선후배 동료나 업무상 안면을 트고 싶은 이라면 몰라도, 그냥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이십대 여성이 있을 리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건 너무 자명한 사실이라 의심해 볼 필요도 없다. 게다가 외로움에 취해 이런 냉철한 현실 파악의 끈을 잠시 놓아버리면 이런저런 비용이 지출 된다는 것도 안다.

사회의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그 해결 비용과 비즈니스의 규모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일러스트=정연주 제작, 저작권=연합뉴스)
사회의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그 해결 비용과 비즈니스의 규모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일러스트=정연주 제작, 저작권=연합뉴스)

외로움의 경제적 비용


물론 사람은 가지각색이라 이러저러한 손해를 외로움 해결에 당연히 지불되어야 할 비용으로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외로움의 경제적 비용”이라고 해야 할까? 필자는 한 이삼년 전에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통해 이 표현을 알게 됐다. 기사내용은 대략 이렇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Ageing, NIA)가 은퇴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외로움으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이 매년 7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영국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영국의 자영업자 400만 명 이상이 가입 된 생활협동조합(Co-ops) 보고서는 외로움으로 인한 추가 비용이 매년 25억 파운드(약 30억 달러)가 발생한다고 한다.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표현을 빌리면 최근 “외로움의 사업”에 뛰어든 온라인 콘텐츠에 쏘아지는 “별풍선”에 쓰이는 돈도 이런 비용에 포함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그 해결 비용과 비즈니스의 규모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우리보다 먼저 일인 가족 트렌드가 찾아온 일본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 대여해 주는 서비스가 많다. 짐작하듯 성매매 산업도 다종다양하다. 그냥 사람만 빌려주는 서비스도 여러 종류다. 예를 들어 친구 대행업은 같이 밥 먹을 사람, 산책해줄 사람, 심지어 같이 쇼핑 해줄 사람도 빌려준다. 요금도 만만치 않은데, 몇 년 전 기사를 보니 한 시간에 5천 엔이 넘는다. 리얼충 서비스도 있다. 일본에선 SNS에서의 관계 맺기가 아닌 현실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리얼충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그렇게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사람을 빌려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 SNS에 올리게 돕는 서비스가 리얼충 서비스다. 우리도 일본처럼 되고 있다. 액션 장면에 스턴트맨 쓰듯이 사람 빌려 쓰는 것이 흔해졌다. 소문을 들으니 당근마켓이라는 곳에서는 함께 고기 먹을 사람도 구할 수 있다더라.

사람을 만나는 진짜 이유


생각해보면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사람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외로울 여지도 없었다. 친구가 늘 “거기” 있었다. 집 앞에, 옆집에, 공터에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친구”가 없어지게 된 원인을 한 사회학자의 글 속에서 찾아보자.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리퀴드 러브>에서 “시장이 거둔 중요한, 아마 가장 중대한 성공은 친교의 기술을 조금씩, 그러면서도 꾸준히 무너뜨린 것일 것이다.”하고 썼다. 이어, 그 폐해의 가속화를 이리 설명했다. “다른 인간을 소비 대상으로 취급해 그를 소비재의 유형에 따라 ‘화폐 가치’라는 관점에서 얼마만큼의 쾌락을 가져다주는가에 따라 평가하는 경향에 의해 조장되고 가속화”되고, 그 결과 “타자들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소비 행위를 함께하는 동반자로서만 가치를”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진정한 외로움의 소멸은 만남을 비즈니스화 하지 않아야 가능할지 모른다. 비즈니스란 게 뭔가? 일을 하면 성과를 내고, 시간을 들여 사람을 만났으면 내용과 의미를 생산해야 하는 일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겐 이런 비즈니스적인 강박,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든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는 듯하다.

그건 마케팅적인 강박이다. 새로 산 차로 출퇴근만 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자동차 광고의 설득과 같은 것이다. 이런 설득에 넘어가면 사람을 만나면 여행도 하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하다못해 집에서 홈 파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계획 없이, 이벤트 없이, 맛 집 정보 없이 사람을 만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뭘 해야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사람을 만나면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은 뭘 할 거리가 없으면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할 거리 먼저 만들어 놔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진다. 그 강박은 다시 사람을 만나서 한 것에 부여할 어떤 의미를 찾아야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진다. 바쁜 사람들이 귀한 시간 내 만나 뭘 했는데 아무 의미 없이 "했다."로만 끝나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건져야 하고 그 사진에 해시태그도 달아야하니 이래저래 의미 생산은 필수다.

바우만이 말했듯, 사람을 만날 때마다 행위를 통해 의미를 찾고 이유를 찾으면 그 만남에 사람은 없다. 사람, 그 자체가 이유이고 목적일 때 우린 한 사람을 계속 반복해서 만날 수 있다. 노인정에서 일 년 내내 만나도 만날 때마다 반가워하는 시골 할머니들처럼 말이다.

일탈의 사람, 그 사람과의 일탈로는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일탈로 외로움을 해결해 주겠다는 이들의 말에 속지 말자. 일탈은 일상일 수 없으며 그런 이유로 일탈로는 일상에 놓여 있는, 주말 낮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게으름 같은, 그 외로움을 쫓아낼 수 없다. 프랑스의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 역시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일상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서 빠져나온다고 주장하는 역할들이 그곳에 사로잡혀 있다. 남편과 애인들은 똑같이 좌절되고 속임수를 당한다.''고. 앞서 일탈로 외로움을 이겨내자던 낯선 여인에게, 그 여인들로 잠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 뭇 남성들에게 이 문장이 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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