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지역 경쟁력인 시대

1982년 5월 경남 울산만 서쪽에 있는 장생포항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1982년 5월 경남 울산만 서쪽에 있는 장생포항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요즘 젊은 카피라이터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풋내기일 때는 국내외 선배 카피라이터들의 책들을 무작정 사들여 열심히 파고들었고, 지역 카피라이터 모임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었다. 요즘은 관련 정보가 넘쳐나고 그 수집도 편하다 보니 그동안 쌓아온 지식을 시대에 맞춰 수정하고, 그때그때 일의 성격에 맞는 자료를 분석하고 동향을 파악하며 따라가고 있다.

지자체 일을 하게 되면 당연히 그 지역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마치 우물 바닥부터 탐사하듯이 고대사부터 말이다. 선배 카파라이터나 작가들은 조선왕조실록 CD롬을 몇 십 만원에 사서 들여다보거나 삼국유사를 읽어가며 역사를 공부해야 했다. 지역의 민담이나 전설은 지역 향토사학자를 찾거나 동네 어르신의 구전을 통해 들어야 했고 말이다. 요즘엔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는 물론이고 각종 민족문화 콘텐츠를 정리해 놓은 정부 기관 사이트가 많아서 나 같은 이들의 수고를 덜어준다. 또 지자체별로 홈페이지에 지역 역사를 꼼꼼히 기록해 놔서 해당 지역에 대해 두루 알 수 있다. 발품을 팔면 관련 학회를 초대해 여는 세미나 참가도 쉬워졌고, 출간 된 자료는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 무료로 받을 수도 있다.

지역의 역사는 이제 도시 경쟁력이자 브랜드 가치로까지 이어지는 추세다. 게다가 지역의 문화재와 유적이 지역민의 자부심이 되고 관광자원을 위한 스토리텔링의 코어가 되다보니 고대사부터 차곡차곡 지역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걸 바탕으로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지자체도 많아졌다. 예를 들어 경남은 가야 역사 복원 경쟁이 한창이다. 함안은 아라가야의 땅임을 자랑하며 그 관련 유물 및 유적 발굴과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고령 또한 대가야의 터전임을 내세워, 관련 박물관을 새롭게 정비하고 캠핑장과 수목원에도 대가야의 이름을 붙여 운영하고 있다. 김해는 아예 경전철로 부산에서 김해로 접어드는 불암역 앞에 허황후와 수로왕의 전설을 시각화 한 금옥문을 설치해서 “여기서부터는 금관가야의 땅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선을 긋는다.

일 때문에 파고든 울산


최근엔 울산의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레 울산에 대해 공부를 좀 하게 됐다. 내년 가을엔 이곳에서 전국체전도 열리니, 겸사겸사 내가 이해한 이 도시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울산하면 산업도시라는 인식이 강하니, 나 또한 이 지점부터 공부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산업도시가 된 건지 궁금했다. 이 시점에만 집중하면 울산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다.

1962년 2월 3일, 당시 박정희 의장이 울산 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962년 2월 3일, 당시 박정희 의장이 울산 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박정희 정권이 공업지역으로 지정하기 전만해도 울산은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해안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이 불과 몇 십 년 만에 자동차와 배를 만들고 산유국의 원유를 가져다 정유로 만들어 다시 되파는 도시가 된 것이다. 일 때문에 이런 곳을 견학한 경험이 몇 번 있다. 그 장관은 대자연이 주는 박력하고는 또 다른 박력을 전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이프라인과 초고층 빌딩만한 선박들, 어지간한 상가 건물만한 스크류와 같은 선박 부품, 5킬로미터에 달하는 아산로를 끼고 빽빽이 들어찬 수출을 기다리는 자동차들, 그 자동차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항구에 배를 댄 각국의 선박들, 그 건너편의 석유화학단지가 만들어내는 태화강 하류의 풍경은 박력이라는 단어 말고는 딱히 걸 맞는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울산의 근대사만 놓고 보면 울산의 산업화와 지금의 삶은 과거와의 단절로 인식 된다. 반농반어촌의 소읍이 이런 공업도시로 탈바꿈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대사부터 보면 울산에서 배를 만들고 쇠를 다루는 건 이 땅의 운명으로 느껴진다. 일단 반구대 암각화를 자세히 보면 커다란 배들이 그려져 있다. 또 2018년, 울산대곡박물관과 한국청동기학회가 함께 주최한 학술 대회에서는 “현재까지 울산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150여개 소에 이르고, 주거지 수는 약 3500기 이상"이며, “단위 면적 대비 청도기 유적의 밀집도는 국내 최고”라는 울산문화재연구원 정대봉 팀장의 발표도 있었다.

울산 북구에는 그 역사가 삼한 시대까지 올라가는,『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과『후한서(後漢書)』에도 기록된 달천 철장이 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달천 철장은 지금의 제철소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이를 기념해 매년 <쇠부리 축제>가 열린다. 2012년, <역사스페셜>에서 다뤘던 반구동의 해양 유적을 통해서는 통일 신라의 번영을 이끌었던 항구도시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시기 울산항은 해양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었기에 지금의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무역항으로 이름깨나 날렸다는 것이다. 경주의 흥덕왕릉과 괘릉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무인상이 서역인, 즉 페르시아인을 닮았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그 무인이 서역인이라면 그가 첫 발을 내딛은 항구는 울산항이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울산 동구의 재야 사학자와 주민들이 그 앞바다에 버티고 있는 대왕암이 진짜 대왕암이라 주장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수라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풍수지리학자들은 울산의 지세를 구룡반취(九龍盤聚)와 구룡쟁주(九龍爭珠)로 표현하니, 울산은 그야말로 용들이 모여 저녁을 먹고,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범상치 않은 땅인 것이다.

이 땅의 과업을 지켜나가는 사람들


이렇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뒤 다시 내려와 보면, 오늘의 울산의 발전은 운명으로 여겨진다. 울산의 땅과 해안 곳곳에서 쇠를 만지고 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 땅에 수만 년 동안 내려온 운명과 그 기운의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조용히 촌부로 살다 하늘이 내려준 재능에 눈을 떠 무림의 고수가 되는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골리앗 크레인을 움직이고, 대형 선박을 만들고 있는 근로자는 천 년 전, 만 년 전 조상의 과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그 맥이 끊겼으나 다시 이어진 우리 민족과 이 땅의 과업을 말이다. 그 역사의 과업을 이어가는 울산의 근로자와 그 가족은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살아간다. 울산 동구에 가면 현대중공업이 있다. 그 정문에서 보이는 야드 외벽에 이런 슬로건이 써져 있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故 정주영 회장이 남긴 말이다. 지금 청춘들에게는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마음을 간직한 근로자들 때문에 울산의 인구대비, 오가는 국내외 인구 대비 코로나19 감염률이 낮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멈추면 나라가 멈춘다는 사명감을 갖고 다들 스스로 조심해 왔다는 것이다.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홍보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다. 90년대 중반에야 지자체장을 선거로 뽑았으니 길게 잡아도 30년 안쪽이다. 필자가 막 카피라이터 일을 시작할 때쯤 지자체 홍보 영상 유행이 절정에 이르렀고, 그 형식과 방법이 정착됐다. 그 후 약 이십 여 년 간 지자체 홍보 영상은 단체장의 치적 알리기와 정책 공보를 위한 일방적 메시지 전달이 주를 이뤘다.

요즘엔 달라졌다. 관도 시민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정책 효과가 있다는 걸 안다. 또 시민이 지역을 떠나지 않게 그 마음을 붙잡는 것은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도시의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요즘의 지자체 홍보는 이 땅에 사는 이의 삶을 응원하고 시민이 자기 도시를 사랑하게 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츠>에서 정치 장교 다닐로프의 대사처럼, 전쟁 같은 일상을 사는 이들에겐 희망이 필요하고, 그 희망을 얻기 위해선 본보기가 될 영웅이 필요하다. 그 본보기와 영웅은 도시의 역사 속에, 지금 이 도시에서 삶을 꾸려가는 이웃 속에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업을 가진 이들은 더욱 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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