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e톡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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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현충일 밤, 무심히 채널을 돌리다보니 홈쇼핑에서 여행 상품을 팔고 있었다. 여행사와 홈쇼핑 모두 여행이 일상 회복의 상징적 상품이라 판단됐기에 이른 여름부터 장에 내놨거나, 두 달 전부터 여름휴가 준비를 하는, 여행에 “진심”인 사람을 위해서 내놨을 것이다.

홈쇼핑에서 여행상품을 팔기 시작한지 벌써 25년이 넘었을 만큼 여행 시장이 넓어진 요즘, 젊은 친구들 중엔 여행부심을 부릴 정도로 여행을 각별히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여행부심은 “너 거기 가봤어?”, “집에만 있지 말고 여행 좀 다녀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심리를 일컫는 말이다.

언젠가 말한 것 같지만 필자야 삼십대 중반에나 비행기를 타봤고, 여행도 그때부터 했으니 여행을 즐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운동이나 독서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다. 이렇게 여행 안 좋아하는 필자도 여행을 갈 수 밖에 없는 휴가철을 앞두고, 여행부심 넘치는 젊은 친구들의 여행 사진 가득한 SNS를 기웃대며, 여행 안 좋아하는 카피라이터의 눈으로 여행의 매력과 의미를 찾아봤다.

행복과 환상을 예약하다


여행을 왜 할까? 그 이유를 짚어보려면 예약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람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 한다. 통제 할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함은 우리에게 기대를 주기도 하지만 공포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공포는 확실한 미래를 만들면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고, 일상이 팍팍할수록 그 확신한 미래가 특별한 미래이길 바란다. 기대하고 바라던 일이 미래의 어느 순간에 정확하게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예약이다. 그리고 여행은 예약으로 시작해서 예약으로 끝난다. 항공권부터 시작해서 호텔, 관광지, 식당, 자동차까지 말이다. 그러니 여행의 기쁨은 예약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기쁨의 극대화를 위해선 예약의 시점이 중요하다. 너무 멀면 막연하고 너무 가까우면 그 기쁨은 일상과 단절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여행의 예약은 최소한 한 달 뒤나 다음 계절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그러면 아직 오지 않은 달과 계절은 이미 행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번 달 불행했으면 다음 달 여행을 잡으면 된다. 봄에 이별했다면 여름에 여행을 계획하면 된다. 이건 일종의 예언이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내려주는 예언이자 신탁이다. 이 예언과 신탁엔 모호함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여행의 신탁을 준비한 이는 일부러 모호한 여지를 남긴다. 환상으로 메워질 여백이다. 여행지가 어디고,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는 정보로 채워졌기에 여행지의 낯설음은 없다. 준빈 된 여행자에게 여행지는 이미 읽고 본 정보 확인을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 예상 못한, 기대 이상의 환상이 껴들 여지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결국 환상은 만들어진다. 낯선 날씨, 낯선 사람, 낯선 시선, 더 나아가 우연한 만남 같은 것들이 그 환상의 풍선들이 되고, 그 풍선은 캐리어에 짐을 싸면서 더 부푼다.

이런 여행의 환상이 주는 즐거움을 알랭 등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이 같이 표현했다.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 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꽤 될 것이다. 여행의 현실이 상상했던 것과 다른 것에 실망하고, 그 반복되는 실망을 견뎌내며 익숙해진 여행자가 꽤 많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공항에 간다. 이번 여행은 상상 그 이상의 여행이 되리라 기대하며.

(사진=이톡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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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진과 포르쉐


여행의 여정은 관광지를 점으로 연결하는 선들로 그려진다. 우리가 항공사 잡지 뒤에서 보는 비행 노선도, 지하철 노선도에서 보는 그 선과 닮았다. 그 선은 환상을 얹기에는 가늘고 서사를 엮기에는 짧다. 결국 여행객은 환상과 서사의 완성을 위해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 보이는 모든 것을 배경으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사진에 담는다. 그 사진의 모음은 영화가 된다. SNS 영화사가 배급하고 스마트 폰 상영관에서 상영되는 로드무비다.

이렇게 개인적인 로드 무비를 만드는 이유는 여행 정보 프로그램이나 여행을 소재로 한 TV 예능 프로그램처럼 여행하는 자신을 여행 중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 담긴 에피소드에 이런 여행자의 심리가 잘 담겨 있다.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쉐를 샀지만 막상 운전을 해보니 자기가 운전하는 동안 정작 주행 중인 포르쉐를 볼 수 없었다. 결국 친구에게 대신 포르쉐 운전을 시키고 자기는 택시를 타고 따라가며 주행 중인 포르쉐를 보며 택시 운전사한테 저 차가 자기 차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여행지에서의 셀카는 바로 이런 자랑을 위한 사전 작업이다. 김영하가 말했듯이, 여행자인 나를 삼인칭으로 볼 수는 없기에 그 셀카들을 SNS에 올리는 것이다. 내가 날 보고, 나를 친구에게 보여주고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여행지에서의 나를 스마트 폰으로 누군가와 함께 볼 때, 그러면서 그 여행과 여행지에 대해 얘기할 때 겨우 여행 부심은 완성 된다.

여행 부심을 완성시키는 사진의 모음집은 환상의 하이라이트다. 세 시간이 넘는 프로야구를 몇 분으로 편집해서 간편하게 승패를 알게 해주는 하이라이트나 유혹의 과정은 안 보여주고 오직 육체적 관계만 보여주는 포르노와 비슷하다. 여행지에서 겪은 외로움과 괴로움, 곤란함과 고통, 사진으로 남겨야만 하는 즐거움의 장소-음식, 술, 관광-로 가기까지의 과정은 누락 된다. 막간의 실망과 후회, 과음으로 부은 아침나절의 얼굴도 삭제 된 채 오직 여행의 쾌락만, 누군가에게 보여야할 것만 찍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찍힐 수 없는 것은 찍히지 않고, 찍히지 않은 것은 전시 될 수 없기에 우리 모두의 여행 사진은 대부분 같아진다.

결국 여행자는 사소한 다름을 위해 캐리어에 옷을 쟁여 넣을 수밖에 없다. 또 같은 이유로 여행 상품마다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나라, 많은 장소, 많은 스폿을 체험할 수 있는지를 앞 다퉈 강조할 수밖에 없다. 이 가격, 이 일정으로 이런 관광이 흔치 않다고 몇 번씩 강조한다. 그 상품 구성엔 여행지에서의 느긋한 휴식, 와인 한잔, 카페에서 멍 때리기, 아침 산책, 막간의 독서 같은 여유는 빠져 있다. 그런 여유가 없는, 그런 막과 막 사이의 틈이 없는, 가격 대비 누구보다 더 많은 곳을 갈 수 있는 곳을 갈 수 있는, 그렇게 촘촘하게 구성 된 여행상품이야말로 돈 값을 하는 차별화 된 여행 “상품”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느긋한 나그네처럼


여행객은 집으로 돌아온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기를 떠나 오랫동안 낯선 곳을 떠돌며 온갖 사물과 우연들 사이에 흩어져 있었던 것, 그것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하고 썼다. 그러니 이왕 돌아올 여행, 좀 숨통 트이게 갔다 왔으면 한다.

여행의 한자 중 여(旅)는 군대가 깃발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어서 현재도 군 편성 단위인 여단에 쓰인다. 이 한자가 여행에 쓰일 때는 나그네라는 뜻이 된다. 임어당은 “여행을 한다는 것은 방랑을 하는 것이고, 방랑이 아닌 것은 여행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임어당의 말처럼 여행을 방랑처럼 하면 나그네가 될 것이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람들 많이 가는 곳만 족집게처럼 찾아다니면, 임무 완수를 위해 오와 열을 맞춰 신속히 이동하는 군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임어당의 말을 요즘 식으로 하면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정도 되지 않을까? 이 역시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 쓴 말이다. 계획대로 완수 된 여행은 미지근한 맥주만큼 밍밍하다는 의미 아닐까? 빡빡한 일상과 팍팍한 사정으로 마음고생 많이들 했을 올해만큼은 좀 느슨하고 듬성듬성한 여름휴가가 되길 바란다. 여행 안 좋아하는 카피라이터의 주제넘은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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