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봄이 오면 사랑이 시작된다. 대학교 세 개가 몰려 있는 동네에서 이십여 년 살아보니, 벚꽃이 피는 즈음이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오늘부터 1일”을 외친다. 물론 필자 대학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다. 다만 그 사랑을 지켜낸 시간의 길이가 다를 뿐이다. 우리 땐 겨울이 오고, 해를 넘겨 연애하는 커플도 흔했다. 요즘은 일 년은 고사하고 한 계절도 쉽지 않은 듯하다. 대학 강사 노릇하면서 CC들의 무수한 탄생과 헤어짐을 목격하고, 또 최근엔 젊은 후배들의 사랑을 지켜보니 요즘 청춘들의 사랑의 유통기한은 확실히 예전보다 짧아졌다.

아내 마고와 남편 루의 모습. (사진=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스틸컷)
아내 마고와 남편 루의 모습. (사진=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스틸컷)

'헌 사랑'과 '새 사랑'의 교차로?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는 오래 된 사랑과 새 사랑의 교차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저 불륜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새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져 이혼하고 새 가정을 꾸리지만, 새 것이라고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르겠냐고 대놓고 묻는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결혼 5년차 부부가 있다. 아내는 프리랜서 작가인 마고이고, 남편 루는 푸근한 인상의 요리사다. 꽤 오랫동안 닭 요리를 주제로 한 책을 쓰고 있다. 그들을 모르는 사람도, 그들을 아는 사람도 그 부부는 행복해 보인다. 어느 날 마고는 비즈니스 여행 중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대니얼이라는 남자에게 강하게 끌린다. 그런데 하필 그 남자, 영화처럼 앞집에 산다. 이후 마고는 5년 묵은 남편과 새로 만난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뒷이야기는 스포일러이기도 하고, 말해 봐야 뻔한 스토리니 넘어가자.

애도 있고 살만큼 살았지만 에로틱한 긴장을 다시 관계에 불러오고 싶은 커플이 있을 것이다. 여주인공 마고를 위한 궁색한 변명을 해보자면, 마고가 먼저 그런 필요를 느껴 회복을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새로운 닭 요리법을 개발하느라 미처 거기에 반응을 못했다.

그 순간, 마고의 절망이 상상보다 컸다. 그 절망에 대한 공포는 사랑하는 연인, 부부 모두에게 잠재 되어 있다. 그렇기에 아마도 젊은 후배 커플들, 강사 노릇하며 봐온 대학생 커플들이 사랑이 식은 거 같다는 느낌이 오면 그 관계를 바로 깨곤 했는지도 모르겠다.

노력이 좌절 되는 걸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 노력을 안 한 채 관계를 깨 버리는 것이 상처 받지 않고 홀로되는 비결인 걸까? 사랑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나,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하고 묻는 젊은 가수 박원의 노래 가사를 자기 마음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사랑이 식었음을 예감하고 그로 인해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같을지 모른다. 다만 비겁함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떤 쪽이 더 비겁한 걸까? 근근이 이어가려는 쪽일까, 냅다 달아나는 쪽일까.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마주봐야 하는 이유


대학교 근처의 카페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젊은 연인들 중엔 마주 보지 않는 연인들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대부분 마주보지 않는다. 벚꽃이 필 때라면 또 몰라도 대부분의 커플들은 카페에 앉아서도 스마트 폰을 보고 있다. 스마트 폰 하나로 뭐든 함께 보면 그나마 이해가 갈 텐데 각자의 것으로 각기 다른 걸 본다. 스크롤 하는 속도로 봐서는 쇼핑이나 인스타그램 따위를 보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왜 마주 앉아 있는지 궁금해진다. 사랑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사랑에 막 빠졌을 때만큼 서로를 열심히 봐야 하지 않을까?

연인이, 아니 사람이 마주봐야 할 이유는 아주 간단한 상상만으로도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잠시 지구상의 모든 미디어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그럼 최초의 미디어였던 인간이 최후의 미디어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미디어가 있기 전, 세상에 모든 정보는 타자로부터 올 수 밖에 없었고 타자엔 대한 정보가 유일한 정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미디어가 사라지면 최후의 메시지와 콘텐츠 생산자는 인간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마트 폰은 이 원초적 미디어로써의 인간의 기능, 콘텐츠와 메시지 생산자로써의 원초적 기능을 퇴화 시킨다. 그래서 어쩌면 요즘 젊은 친구들에겐 메시지를 생산하고 미디어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수고로움이 버거울 수 있다. 게다가 메시지와 콘텐츠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수용자도 당연히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을 위한 훈련


아주 예전부터 이 커뮤니케이션 상호작용을 잘 하기 위한 훈련은 있었다. 중세의 기사들은 연인을 위해 시도 지을 줄 알아야 했고 낭송도 할 줄 알아야 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나 교회의 청년들은 문학의 밤을 위해 시도 쓰고 낭송도 해야 했다. 품앗이 하듯 이 교회, 저 교회,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 이런 행사에 참석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지는 어설픈 시를 들어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메시지를 생산하고 그걸 가만히 수용하고 해석하는 훈련이 일상이던 시절이었고 문학 소년이나 청년이라는 말이 흔하던 시대였다. 이 미디어와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훈련, 그 수용자와 해석자로서의 훈련이 안 된 연인들이 사랑의 열정의 식음과 동시에 스마트 폰만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마주보지 않고 스마트 폰만 들여다봄으로써 미디어이자 메시지 생산자로서, 그 해석자로서 격어야 할 피로감을 사전에 차단하는 건 아닐까?

영화의 원제는 <take this waltz>다. 왈츠는 두 남녀가 추는 춤이다. 왈츠가 왈츠답기 위해선 파트너 간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4,5분의 춤을 추려면, 누가 봐도 멋지게 춤을 추려면 그 춤 이전의 시간, 서로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댄서든, 연인이든, 상호작용은 에너지와 노력, 시간이 동반되는 작업이다. 사랑의 아름다운 순간 또한 그 상호작용에 들인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영화 곳곳엔 모든 사랑은 한 때 새 사랑이었고, 그 새 사랑도 세월 가면 헌 사랑이 된다는 메시지가 흩뿌려 있다. 상호작용의 시간과 그 가치에 대해선 스쳐 말할 뿐이다. 젊은 가수는 사랑은 노력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 사랑을 이어가고 싶으면 노력을 해야 한다.

나와 우리를 찾는 사랑의 시간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앙드레 고르스는 아내가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부터 모든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했다. 그가 여든세 살에 여든 둘의 아내에게 쓴 편지를 책으로 옮긴 것이 <D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 편지에 담긴 사랑의 사연 속에서 오랜 사랑의 가치와 만날 수 있다. 앙드레 고르스는 아내에게 “당신은 내 부족함을 메워주는 타자성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어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아내 도린은 결혼을 망설이는 앙드레 고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함께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갈 거라고요.”라고. 우린 어쩌면 사랑을 통해 비로소 “나”를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통해 비로소 '우리'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구축해 나가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흔하게 쓴 말, 우리가 진짜 우리라는 의미를 찾는 순간은 사랑을 통해 두 사람이 나도 당신도 아닌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되어가는, 그래서 서로에게 딱 들어맞는 서로의 맞춤형 인간이 될 때인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던 나를 찾는 데, 우리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데 한 계절로 충분할까? 일 년도 짧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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