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난 고향이 없다. 사전을 보면 고향엔 네 개의 뜻이 있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 된 곳이다. 이런 저런 뜻을 기준으로 내 고향을 가려봐도 모호하긴 매한가지다.

태어난 곳은 서울의 수유리고, 그 근처 쌍문동에서도 살았지만 기억의 조각이 없다. 고향의 조건이 명절에 꼭 가야할 곳, 나를 기다리는 일가친척과 불알친구가 있는 곳이라면, 그 또한 없다. 고향의 조건이 유년의 기억이 시작 된 곳이라면 파주와 의정부고, 청춘의 추억이 많은 곳이라면 평택과 대전이다. 오래 산 곳이라면 부산이고, 마음이 편한 곳이라면 울산이다. 고향이 이들 조건 중 두 세 개 이상은 갖고 있어야 하는 곳이라면, 그렇다면 나에겐 고향은 없다.

영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海街diary, Our Little Sister, 2015)" 스틸컷.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


고향집에 한데 모여 사는 세 자매가 있다. 이들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아버지와 아버지가 나간 후 뛰쳐나간 엄마 대신 고향집을 지키며 살아간다. 이 세 자매에게 15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가 야마가타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 장례식에 참가한 세 자매는 이복동생 스즈와 마주한다. 세 자매는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하고, 스즈는 이 낯선 세 자매와 낯선 곳에서 살아가며 가족이 되어가고 가마쿠라의 소녀가 되어간다. 가족을 깨트린 여자가 낳은 자식이라는, 말 못할 상처를 치유하며 동네 사람들이 사랑하는 네 자매의 막내가 되어 간다.

네 자매의 일상 속에 등장하는 음식은 비중이 큰 조연이다. 자매들은 그 음식들을 함께 먹으며 많은 사연을 나눈다. 요리 싫어하는 엄마가 고기 넣은 카레처럼 오래 끓일 필요가 없다며 가르쳐준 해산물 카레, 아버지가 만들어 주던 잔멸치 덮밥과 잔멸치 빵,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어묵 카레, 자매의 어머니가 태어난 기념으로 심은 55년 된 매실나무에서 딴 매실로 만든 매실 에이드와 매실주, 그리고 메밀 소바까지. 이들 음식이 나오는 장면 중 셋째 치카와 막내 스즈가 카레를 먹는 장면은 유독 먹먹하다. 집 나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셋째와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 산 막내 스즈가 간직한 생생한 아버지와의 추억은 대조를 이룬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직계 여부와 혈통만으로 가족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넌지시 묻는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과 추억의 양으로 보면 마지막까지 추억을 함께 한 사람, 아버지의 최후의 가족은 막내 스즈였기 때문이다. 감독은 어쩌면 이 장면을 통해 가족은 함께 살아온 세월과 경험으로 형성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기억을 공유하고, 살갗을 부대끼고, 함께 밥을 먹으며 가족이 되어 가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처럼 말이다.

위로 받는 풍경, 고향의 풍경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가마쿠라의 풍경이다. 봄에서 시작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세월의 흐름과 마음의 변화를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풍경으로 담담히 보여준다. 감독이 이 풍경에게 맡긴 역할은 뭘까? 고향의 풍경은 엄마 대신 그 품을 내주어 자매들을 다독이고 위로한다. 매일 밥을 나눠먹고, 한 지붕 아래 잠드는 자매라 하더라도 어디 좋은 시절만 있을 수야 있겠나. 그러나 지지고 볶고, 울고불고, 다시 안 볼 듯 핏대를 세우며 싸워도 다시 밥상머리 마주하며 화해하고, 그런 함께 울고 웃는 세월이 쌓이다보면, 매실청과 매실주가 세월 속에 익어가듯 가족의 정도 함께 한 사연 속에 깊어진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풍경은 고향의 풍경이 된다. 가족이 되어가는 시간을 지켜본 고향의 풍경은 언제나 마음 속 상처의 통증을 가만히 가라앉혀 준다. 그렇게 통증은 가라앉고, 상처는 치유되어 진다. 그 풍경에 위로 받으며 어느덧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날 다독여준 그 풍경은 어디에 살아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의 풍경이 된다.

장산과 해운대 전경. (사진=해운대구 제공)
장산과 해운대 전경. (사진=해운대구 제공)

딸의 사투리에 담긴 고향


본의 아니게 많은 곳을 떠돌며 살았지만 정작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 없으니 저 영화의 자매들처럼 그리운 음식도, 그리운 풍경도, 그리운 사람도 없다. 그래도 요 몇 년 전부터는 내 사전의 변두리에 웅크려 잠자던 고향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다. 스스로 “Born to be Busan.”이라 말하며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딸 때문이다. 출생신고를 할 때 가장 뿌듯했던 점이 아이에게 고향을 만들어줬다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 고향의 초등학교를 가는, 아빠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넌 경험할 수 있겠구나, 내 떠돌이 팔자가 너까지 이어지지 않겠구나.’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 기대는 아이가 부산 소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이뤄졌다. 집안에 사투리 쓰는 사람이 없는데도 딸의 사투리는 진해졌다. 다섯 살 봄, 그동안 다니던 작은 어린이집에서 큰 어린이 집으로 옮겼을 때, 적응을 걱정했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자 조금씩 사투리 톤이 비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나오는 톤이라,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여름쯤 되니 사투리가 말투의 절반을 넘었고, 가을엔 부산 소녀의 톤이 정착 됐다. 어느 날 딸을 데리러 갔더니 딸의 담임선생님이 물었다. “은채가 어린이집 친구 얘기 많이 하나요? 이제 좀 적응한 거 같죠?” 난 간단히 답했다. “은채가 사투리가 늘었어요.” 선생님은 한참 웃으셨다.

위안 음식, 위안 풍경


좋아하는 음식의 순위 매기는 걸 좋아하는 열 살짜리 딸과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고향의 의미가 조금 더 뚜렷해진다. 열 살짜리 부산 소녀는 순대를 막장에 찍어 먹는다. 돼지국밥을 좋아하고 회란 모름지기 배부를 때까지 먹는 것임을 당연시 여긴다. 제사상에는 당연히 문어숙회가 올라와야 하고, 그 문어를 살짝 얼려 슬라이스로 잘라 먹어야 제 맛이라는 것도 안다.

방아잎의 향을 좋아하고 개불과 해삼도 맛있게 먹는다. 8월 낮이면 파란 하늘에 적란운이 솜뭉치처럼 떠 있는 해운대 바다와 저녁 무렵 광안대교를 건너면서 금탑처럼 빛나는 마린 시티를 볼 때마다 감탄한다. 이제야 미국에 사는 딸의 이모, 처제가 고향에 올 때마다, 김해공항에 내리자마 마자 돼지국밥을 먼저 찾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처제에게 돼지국밥은 말 그대로 고향의 음식, 소울 푸드, 우리말로 순화 된 표현을 하자면 위안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 돼지국밥을 잔뜩 먹고 난 후, 친정에서 하룻밤을 보낸 처제는 다음날부터, 언니는 출근길에 매일 보는 광안리 해변과 형부는 매일 올려다보는 황령산을 가자고 조른다. 소울 푸드의 순화 된 우리말이 위안음식이라면, 그리운 고향의 풍경은 위안 풍경쯤 되려나.

위안을 주는 음식과 그 풍경은 그렇게 고향을 가진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하나의 문신이다. 딸 또한 누가 봐도 부산 아가씨임을 눈치 챌, 그 영혼의 문신을 깊이 새긴 채 삶을 꾸려갈 것이다. 부산이 아닌 객지에서 삶을 꾸려간다면, 명절이 가까워져 올 때마다 명절 선물 목록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부산에 가서 먹을 음식의 리스트도 함께 작성할 것이다. 광안리나 해운대 어느 전망 좋은 카페에서 고교 동창들과 만나 수다 떨 시간을 기대하며 신상 카페를 폭풍 검색할 것이다. 그러면서 지쳤던 마음에 그리움의 생기를 불어 넣을 것이다. 그렇게 그 생기로 부풀린 마음을 안고 어느 역이나 터미널에서 “부산행”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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