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생일에 어김없이 어머니의 메시지가 왔다. 근 20여 년 간 비슷한 내용이다. “어미로서 자식에게 해준 것이 없어서 늘 미안하구나.” 이런 내용이다. 철이 없을 땐 이 내용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마흔을 넘기고, 아이를 키우다보니 부모가 내게 들인 시간과 수고는 당연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영화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 스틸컷.

탄광촌의 세 부자


<빌리 엘리어트>는 빌리의 성장기이니 당연히 주인공은 빌리다. <람보>의 주인공이 람보고, <해리포터>시리즈의 주인공이 해리포터이고, <007>시리즈의 주인공이 제임스 본드인 것처럼 이건 너무 자명하다. 그러나 요 근래 다시 보니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

대처 시절의 영국, 레이건 시절의 미국은 민영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 시기, 1984년의 영국 더럼(Durham)에 있는 작은 탄광촌 에버링톤이다. 이곳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탄광 노조 투쟁의 최전방이었다. 이곳에 사는 열한 살 소년 빌리의 삶은 만만치 않다. 어머닌 작년에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집안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으며, 파업 전선의 대치는 팽팽하다. 그 시절, 그 탄광촌에서 생존과 생계 이상의 꿈을 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복싱과 축구를 해야 했고, 그렇게 터프한 경쟁을 통해 남성다움이 갖춰지면 저 갱도로 들어가 아버지와 어깨를 맞대고 석탄을 캐야 했다. 그 삶이 빌리의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의 모든 남자들이 받아들인 삶이었다. 빌리에게도 그 삶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권투를 배우던 빌리는 그렇게 그 마을, 남자의 삶이라는, 그 전형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발레를 만나게 되고, 그 후 빌리의 삶, 그리고 아버지와 형의 삶이 바뀐다.

'희생'이라는 단어의 의미


희생은 간단한 단어가 아니다. 아무데나 쓰고, 쉽게 입에 주어 올릴만한 단어가 아니다. 한자 희생(犧牲)엔 다 소 우(牛)자가 들어간다. 하늘과 땅과 조상에 제사를 드리고 기원을 드릴 때 제물로 바쳐지던 산 짐승의 역할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어의 sacrifice 역시 성스러운 제물, 구약의 번제물, 즉 소나 양을 불태워 신에게 바치던 의식에서 유래한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희생은 받쳐진 존재의 소멸 뒤에 찾아오는, 그 희생이 있어야만 기대 가능한, 미래로부터 도래할 축복을 위해 던져지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니 부모가 날 위해 희생했다는 말은 그 부모의 삶의 가능성 하나를 내 미래를 위해 소멸 시켰음을 의미한다. 아니, 오직 나 하나를 위해 그 삶의 모든 가능성을, 아니 그 삶 전체를 번제물로 바쳤음을 의미한다.

내 어머니의 삶 또한 그러했다. 어머니가 되기 전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어머니로 살아온 시간에 한정 될 뿐이다. 어머니, 그녀는 나를 키우기 위해 무용수의 꿈을 접었다. 청춘의 시간을 끝냈고, 공부의 문도 닫았다. 김진호의 노래가사처럼, 아들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 남은 인생을 바쳤다. 어머닌 아들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 본적이 없다. 제 혼자만의 궁리 끝에 전공을 광고홍보학으로 정했을 때도 별 말이 없으셨다. 그저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널 참 모르겠구나.”하고 한마디 하셨을 뿐이다. 아들은 이미 어머니가 모르는 세계로 진입했고, 어머니가 살아온 세상, 살고 있는 세상의 논리와 언어로는 아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번역할 수도 없었다. 어머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구지 자신의 삶의 경험 내로 끌어와 자신의 언어로 만들려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들이 설령 저 먼 화성에 가 산다고 해도, 저 사내는 내 속으로 난 존재라는 우주의 진실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기에, 어머니는 그렇게 낯선 세계로 가는 아들을 담대히 지켜보셨다.

 

자식의 꿈을 위해 바친 시간


자식이 좀 무난했으면 그 세월이 그나마 견딜 만 했을 것이다. 빌리의 아버지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권투를 하라면 권투를 하고, 축구를 하라면 축구를 하고, 다들 갱도에 들어가 탄을 캐니 너도 그리하라는 말에 따라 그리 살면 부모의 마음은 덤덤했을 것이다. 다들 농사를 지으니 너도 땅에 기대 살라고 하면 농부로 살고, 다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니 너도 바다에 삶을 담그고 살라 하면 어부로 살고, 그렇게 부모의 말대로 살면 그 길을 먼저 간 부모의 마음은 안심이 될 것이다. 그 삶은 부모가 아는 삶이고, 경험한 삶이며, 부모가 가르칠 것도, 감당해줄 것도 많은 그런 삶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에 위험과 위기의 확률도 줄어들고, 그 덕에 자식의 미래 또한 예측 가능한 삶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그렇게 부모가 물려준 그 업의 순리를 받아들이면 부모는 그나마 맘 편한 날이 늘어날 것이다.

광부 아버지 재키가 아빠찬스는 고사하고 죽은 아내의 유품까지 내다 팔고, 긴 파업을 버티게 하던 신념의 무릎도 꿇고 저 갱도에 들어가 돈을 벌기로 한건 오직 불확실한 재주와 미래에도 불구하고 춤이라는 낯선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막내의 꿈을 위해서였다. 그 아버지의 선택이 아프게 와 닿는다. 신세계의 백조로 날아오를지, 도시에 조그만 발레 학원이라도 내어 생계를 이어갈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와 저 익숙한 탄광에 들어가 아버지와 어깨를 부대끼며 탄을 캘지, 그 모든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따져보지 않은 채, 오직 다른 삶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희생을 선택한 것이다.

희생은 그런 선택이다. 희생 제물은 신으로부터 그 응답의 도래를 알 수 없다. 제단에 올라 불살라져 소멸 될 뿐이다. 그렇게 희생은 미래를 예측 할 수 없는 던져짐이다. 무조건적인 희생이라는 말은 그래서 동어반복이다. 희생은 애초에 무조건적이고, 부모의 시간은 그러한 무조건적인 삶의 던짐이다. 그러니 온 생을 던진 사람, 아버지 재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보답은 불가능하다.


재키 뿐이겠는가. 과거, 고도 성장기를 살아낸 우리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했다. 그 이전에 경험치 못했던 미지의 삶을 향해, 가 본적도 없는 저 대도시를 향해 청춘을 내던지는 자식들을, 부모는 응원했다. 무엇을 밑천으로 줘야 저 자식의 도전이 좀 순탄히 풀릴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밤마다 찾아오는 막연한 두려움은 눈물과 한숨이 되어 새벽을 불렀다. 그렇게 보낸 밤의 중첩 끝에 명절이라도 다가오면, 부모는 자식이 어떤 행색으로 오든 말없이 반겨 맞았다. 신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자식에게 부모와 고향은 그 도전의 역주와 역영이 시작되는 스타팅블록이자 세파(世波)가 닿지 않는 내항(內港)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아들의 가능성을 볼 때 마다 마음 졸였을 가난한 어머니의 시간의 무게가 조금 가늠된다. 차라리 무던하기라도 했다면 동네 공장이라도 보내어 견습공이라도 시켰을 텐데, 어머니의 눈엔 아들의 다름이 보여 그 도전의 시간을 허락하고 견디었을 것이다. 부모의 시간은 희생의 시간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희생 제물 또한 부활 할 수 없다. 희생 된 존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부모의 희생 또한 마찬가지다. 이미 아가씨도, 소녀도, 심지어 이름도 없다. 부모의 희생이 자식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건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기를 불살라 바친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를 불사른 존재에게 어떻게 은혜를 갚겠는가. 불가하다.

그 희생의 시간 뒤에 자식은 백조가 되어 비약했던가? 그저 지 팔자에 맞는 일을 용케 찾아 살아갈 뿐이다. 그것뿐인데, 어머니는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그렇다. 모든 자식이 화려하게 비상하는 빌리 같은 주인공으로 살 수 있나? 누구는 무명의 <지나가는 백조 1>이거나, 누구는 저 무대의 조명을 담당하거나 하며 그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나름의 구실을 하며 삶을 꾸려가지 않겠나? 그걸 실패라 여기지 말자. 부모는 그저 그 삶의 풍랑을 헤쳐 가는 자식이 대견할 뿐이다. 모든 자식의 삶은 그렇게 부모를 감동시키는 백조의 힘찬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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