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통경제…’ 관주도 ‘죽기살기식’

1972년 3월 27일, 박정의 대통령이 수출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1972년 3월 27일, 박정의 대통령이 수출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e톡뉴스)]  5.16 정부의 관주도형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야전 사령관 박정희가 이끄는 ‘박통’(朴統)경제라고 불릴만 했다. 5개년 계획 수립 과정에서부터 단계별 점검, 확인을 박통이 직접 주재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동향 관련 정기회의, 민․관합동 전략회의, 수출진흥 확대회의 등이 경제개발 동력원이었다.

기업인들은 박통 주재 관주도 회의에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행여 지방시찰 중인 박통이 사업장을 방문하면 너무나 감격하여 관련 기념사진을 가보(家寶)로 취급했다.

박통은 군 출신이기에 앞서 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으로 몸가짐이 단정, 반듯하고 누구에게나 존칭어를 사용했다. 박통은 경제를 잘 모르고 혁명 지도자가 됐지만 혁명공약 실천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어느덧 경제 전문가가 됐다. 늘 경제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경제학자들을 수시로 초청하여 질의응답 식으로 신 경제를 익히고 경제부처 관료들로부터 많은 보고를 통해 경제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박통은 관변회의를 주재하거나 경제현장을 방문하여 기업인들을 만날 때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자상하게 듣는 모습이었다. 박통은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기업애로를 들을 때는 원인을 캐묻고 해결 방도를 묻기도 했다.

기업인들은 박통을 무서워하며 신뢰하고 존경했다. 경제동향과 기업경영 애로를 거의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박통을 만나 악수하고 생산현장을 안내하고 질의에 응답한 기업인들은 ‘박통은 우리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결국 이 같은 박통의 진솔한 경제리더십이 기업인들의 ‘실적경쟁 충성’으로 나타나 박통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주요 기업들은 경영목표는 최대, 실적은 조기달성․초과달성 경쟁을 벌여 신문에 1등으로 보도되는 것을 큰 소망으로 삼고 자랑으로 여겼다. 이 시절 수출과 건설 실적경쟁은 ‘박통경제’에 대한 충성경쟁 성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군 출신 지도자에 의한 ‘압축성장’ 성공이었다는 평가다.(배병휴의 저서 '생존경제, 반칙경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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