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지난여름, 해외에선 코로나 파티가 유행이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코로나를 축하하는 파티가 아니라 확진자를 파티에 초대한 후 파티 참석자 중 누가 가장 먼저 코로나에 걸리는지 내기하는 파티였다.

이 뉴스를 본 후 줄곧 머릿속을 맴돈 영화가 좀비 영화였다. 조지 로메로가 아직 살아 있다면 이런 뉴스를 소재로 다시 좀비 영화를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 2017년 여름에 생을 마감했다. 21세기 들어서도 계속해서 좀비 영화를 만들며 미국 사회와 이 시대를 풍자했던 그가 없는 요즘, 그를 대신하여 할로윈 데이에 어울릴만한 얘기를 해 볼까 한다.

잭 스나이퍼 감독의 영화
잭 스나이퍼 감독의 영화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 2004)" 스틸컷.

그들이 마트에 간 이유


1968년에 제작 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한창 붐이었던 자동차 극장과 함께 공포 영화의 전성기를 주도한 B급 공포 영화 중 하나였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이 좀비 영화는 좌우 이데올로기와 그 양분법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있던 냉전 시대의 미국과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에 흠뻑 젖어 이성의 냉철한 힘과 비판 정신을 잃어가던 미국인에 대한 풍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감독은 십년 뒤에 만든 <시체들의 새벽>에선 그 비판의 화살을 그 사이 더 고도화된 소비 사회에 겨눴다. 이 시기 미국은 신용카드가 대중화 되면서 그야말로 계층과 세대를 막론하고 소비의 광풍이 불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좀비를 피해 도망간 곳도, 좀비들이 그렇게 들어오고 싶어 하는 곳도 대형 쇼핑몰이었다. 이 원작은 9 .11테러가 발생한지 몇 년 후인 2004년, 잭 스나이더 감독이 <새벽의 저주>로 리메이크했다.

이 영화 역시 미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이 현실의 고단함과 공포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좀비에 쫓기던 사람들이 대형 쇼핑몰에 들어간 후 생존과 탈출의 궁리는 뒷전으로 미룬 채 쇼핑을 하고 정사(情事)를 한다. 그러나 로메로 감독의 좀비와 스나이더 감독의 좀비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바로 스피드다.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됐고 인터넷이 보편화 된 21세기의 시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좀비의 속도 또한 빠르게 한 것이다. 영국에서 이걸 다시 코믹 버전으로 패러디 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에선 좀비들하고 싸울 때 아날로그 무기를 쓴다. 크리켓 방망이, 삽, 심지어 DJ가 꿈이던 주인공은 LP판을 던지며 싸운다. 아날로그를 지키며 살아온, 시대의 속도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좀비들하고 싸운다는, 다분히 영국적인 비틀기라고 할 수 있다.

좀비처럼, 파티 손님처럼


로메로 감독은 21세기에도 꾸준히 좀비 영화를 만들었다. 또 지금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미디어와 콘텐츠를 통해 좀비는 살아남았다. 이렇게 좀비 콘텐츠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고, 심지어 더 흥행까지 되는 이유는 뭘까?

냉전시대까지는 적과 아군, 안과 밖, 이단과 정통의 경계가 분명했기에 공포의 원인 찾기와 해법 찾기가 비교적 쉬웠다. 반면 21세기의 공포는 그 발원지의 구분과 판가름이 모호한데다가, 그 촉발의 현장을 명확히 구획할 수 없어서 그 해결이 묘연하다. 옆집에 연쇄살인마나 폭탄 테러범, 또는 총기 난사범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세상, 밤에는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던 사람도 아침에는 좀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근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범인이 잡히면 다들 “얌전한 청년이었다.”, “모범적인 가장이었다.”말하며 놀라기만 할 뿐,

그 공포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모두가 모두를 경계하는 더 큰 공포로 이어진다. 그 공포는 결국 일상화 돼서, 사람들은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저 쇼핑몰에 갇힌 생존자들처럼 소비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안온한 마취제를 찾게 된다.

그래서일까? 서구 사회에서 파티와 좀비의 은유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남들처럼만 하면 내가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같은 모습 속에서 개별적인 공포 또한 숨길 수 있다. 좀비는 같은 모습,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걷는 데, 모두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른다. 파티의 무리와 같다. 다들 그 끝이 없을 것처럼 무리지어 먹고 마시고, 취하고 춤추면서 그 파티장 밖의 모든 현실을 잊는다. 그러다 보면 파티의 이유는 뒷전이다. 아니 애초에 파티에 무슨 명분이 필요하겠나. 좀비의 뜀박질이나 요란스러운 파티나 목적도, 시작도 끝도 막연하긴 매한가지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좀비와 파티가 만연한 세상에선 아무리 흉악한 사이코 패스 살인마나 테러범이라도 좀비 흉내만 낼 줄 알면, 파티에서 적당히 몸만 흔들어주고 술 몇 잔 마실 줄만 알면 정체를 숨길 수 있다. <웜바디스>에도 나오듯이 인간과 좀비가 외형적으로 구분이 안 가면, 좀비도 사람흉내를 내며 사람처럼 살 수 있다. 그뿐인가,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를 보라. 킬러가 평범한 동네 사람처럼 보이는 데는 초대 받은 파티에 참석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미션 임파서블3>에 나오듯 파티에서 지루한 얘기만 할 줄 알면 비범한 첩보원도 평범한 사람처럼 위장하여 살 수 있다. 다들 지하철에서 스마트 폰을 볼 때 나도 보면 편한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

"미션 임파서블3(Mission: Impossible III, 2006)" 스틸컷

파티의 끝을 알았다.


70년대 좀비 영화는 자본주의와 냉전시대의 잔혹동화였다. 80년대의 <할로윈>, <13일의 금요일>, <나이트 메어>와 같은 살인마가 날뛰던 공포 영화는 레이건과 대처 시대의 시장주의와 보수적 사회적 분위기, 격화 되던 냉전 속에서 독단과 독선에 빠진 이성, 이성 있는 인간의 광기와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에 대한 과격한 농담이었다. 90년대 중반 <스크림>,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같은 슬래셔 영화로 그 전성기를 다시 연 공포영화가 21세기에 다시 불러들인 좀비는 코로나 파티와 같은, 공포의 본질에 대한 사유가 부재하는, 어쩌면 그런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의 오래 된 반지성주의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대한 조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테러, 전염병, 경제난, 환경오염, 그 밖에 우리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21세기가 선사한 공포를 잊기 위해 파티를 하고 마트에 달려간다고 21세기 좀비 영화는 과거의 좀비 영화의 사명을 이어받아 말해 온 것이다. 그러니 이 예언이자 경고는 수십 년 동안 이어온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1970년이었다. 그 책의 말미에 보드리야는 현대 사회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상(像)과 마주 대하는 장소였던 거울은 현대의 질서에서는 사라지고, 그 대신에 쇼윈도가 출현했다.”고 했다. 이어서, 쇼 윈도우를 통해 현대인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호화 된 사물을 응시한다고 했다. 마치 마네킹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좀비보다 더 생명 없고, 이성 없는 존재가 마네킹 아니겠나? 그러나 1987년에 개봉한 <마네킹>이라는 영화에선 주인공은 마네킹과 사랑에 빠진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마네킹은 주인공이 볼 때만 사람으로 변했다. 욕망하는 자에게만 사랑의 환상이 되어준 것이다.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권택영은 그의 책 <감각의 제국>에서 이런 사람 같은 마네킹,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된 마네킹을 떠올리는 글을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남겼다. “우리는 대상의 욕망에 의해 불어넣어진 텅 빈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다.”라고 말이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는 라캉의 경구를 이 좀비와 파티에 대한 글 마지막에 할 수 밖에 없다. 속지 않는 자만이 좀비가 되지 않는다. 잠들지 않는 자만이 프레디 크루거를 이길 수 있고, 공포를 이겨낸 여자만이 마이클 마이어스와 제이슨을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신데렐라에 대해 재평가해야한다. 신데렐라의 인생 역전은 처음 가는 그 화려한 파티와 왕자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두시 “땡”하기 전에 이성을 챙겨 그 곳을 단호하게 떠났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시국에도 혹여 서양 귀신을 쫓는 날, 그 쫓기던 귀신이 다시 사람 몸에 들어가지 않도록 귀신으로 분장해야 했던 그 날, 그래서 요란한 코스튬이 필수가 된 파티를 가더라도 이성은 챙기자. 귀신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적은, 그 뒤에 이어질 삶의 모든 기적은 그렇게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며 사는, 속지 않는 사람의 몫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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